◈두 종류의 행함 마7:21-23 출처보기
*인간 자신을 위하는 기독교 신앙은.. 거짓 신앙이라는 주제.
현대 기독교가, 아무리 십자가, 믿음, 보혈, 성령을 외쳐도
인간 자신을 위하는 기독교 신앙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주제의 설교문입니다.
◑사단의 미혹
사단이 인간에게 접근하여 미혹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는 것보다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다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것뿐이지만,
선악과를 먹는다면.. 하나님 같이 되는 놀라운 결과가 주어진다는 말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말씀을 벗어나,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좇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거짓선지자가 주장하는 것은, 사단의 미혹과 다르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라고 해서, ‘예수를 믿지 말라’는 말로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말로 접근한다면, 그가 가짜라는 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거짓 선지자도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나아가 ‘주의 이름으로 신기한 이적도 행합니다.’
누가 봐도 능력 있는 선지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서, 거짓선지자의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과 복음이 아닌 것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고,
믿음과 믿음이 아닌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 분별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간창조 이유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인간을 위해서입니까?’
만약 인간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인간을 위해 역사되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도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신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여러 가지 재난으로부터 구해 주시는 하나님도 맞고,
복을 받고 잘살게 하시는 하나님도, 일부 맞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라서, 자녀에게 좋은 것 주시기 원하신다는 논리도.. 일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인간의 창조목적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목적도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로 인간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라면
인간이 거주하는 에덴동산의 환경부터 완벽하게 정비를 하셨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땅에 존재하고 있던 사단부터 제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이 사단의 미혹을 받고 죄를 범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에덴에서 쫓겨나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 고통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진심으로 인간을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간창조는,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의 위치에 있게 하심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증거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피조물의 위치에 있기를 기뻐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물의 본분을 망각하게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좇도록 하는 것이 사단의 미혹입니다.
거짓선지자가 아무리 주의 이름을 외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복음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예수로, 인간을 위한 십자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을 위해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부터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사조에 실존주의라고 있는데, 근대에 시작되어, 현대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기독교 진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질문합니다. ‘그 진리라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성경과 기독교가 진리라고 칩시다.
그러나 그게 내 현실에 상관(유익)이 있어야 있을 때.. 비로소 내가 인정하는 진리이지,
아무리 성경과 기독교가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게 내 현실에 크게 상관이 없다면.. 진리이든지/말든지.. 내게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실존주의적 사고, 가치관이.. 세상에 워낙 유행하다 보니까,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도.. 자기도 모르게 ‘실존주의적으로’ 믿습니다.
쉽게 말하면 ‘실용주의적으로’ 믿습니다. 기독교가 자기 현실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믿습니다.
문제는, 기독교가 원래는 하나님을 위한 종교인데
인간을 위하는 종교로 위치 이동을 시켜버렸다는 점입니다.
대다수 우리는, 그런 현대 사조에 물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기독교를, 인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원래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인데.. 말입니다.
◑복음에는 걸림돌이 있다
▶복음이 갖고 있는 걸림돌이 바로 이것입니다.
참된 복음을 복음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위해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신자임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누구나 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를 위한다’는 것의 범위를,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합니다.
모든 일을 주께서 벌이신다는 것보다는
자기 상식에 맞는, 주의 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 모든 것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자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신자가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면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참된 믿음으로 여겼던 것들이, 믿음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 믿음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면
당혹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알고 있는 것을, 믿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혹감을 느끼면서 반발이 생기게 되고, 결국 참된 복음을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복음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선지자들의 말이 마음에 들고 귀가 즐거워지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복음은 모두가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인간에게 복을 주는 예수,
-그 어떤 주장도, 인간의 뜻/소원/행복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거짓선지자가 외치는 복음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예수를 믿자는 것이고,
그에 따른 모든 열심히 결국 자신의 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힘을 다해 믿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행함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의 이름을 부르다고 해서, 모두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평생토록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종국에는 천국과 상관이 없는 자로 전락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중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착각에서 깨어나
생명이 되는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행함을 구분하는 말씀입니다.
23절을 보면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행함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구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분하시는 행함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거짓선지자의 미혹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고,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고 할 때
대부분의 신자는 그 근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단지 거룩하고 착하고 의롭고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을
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착하고 선한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면,
자연히 불법을 행하는 것은, 악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분리됩니다.
물론 이러한 분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의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의 시각에서의 선과 악이 다르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은, 윤리와 도덕적 행함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불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 자체가 불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난 일들이라면 불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그들은
종교적인 열심과 실력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전심을 다해 주의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른 목적이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 가신 길을 가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병들고 죽어 가는 자리에서
다만 예수님으로 기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위해였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큰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주의 이름을 불렀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이처럼 누구든 자신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여건과 환경을 바꿈으로써 좀 더 평안한 삶을 살고자 하고,
그러한 삶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욕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난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과 환경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여건이고, 환경인 것입니다.
어떤 여건과 환경에서도, 오직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했지만,
예수님이 그 같은 일을 하신 목적은, 인간의 육신을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일생을 편히 살도록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가를 알고,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을 깨닫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에 매료될 뿐이었습니다.
육신의 병 고침만을 원했을 뿐입니다.
다만 자기 육신을 이롭게 하는 기적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예수님을 좇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으심(아버지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십자가도 내 구원을 위해서 믿어야 한다면, 믿어주겠다는 식이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각기 주어진 분량이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대로, 즉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서
주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해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현재 주어진 환경이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인식과 감사가 없이, 자기 환경을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여건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좀 더 나은 여건과 환경에 대한 꿈과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게 될 뿐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는, 오히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반드시고 이루신다는 거짓된 말을 일삼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처럼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오기 전에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곧 피조물의 본래적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서도 벗어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악이고, 이 악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그것이 멸망의 자리에서 구출 받은 새창조된 신자의 본분인 것입니다.
성령을 모신 신자는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바라는 것은 죽든지 살든지 나의 죄를 덮어주신
예수님의 용서만을 증거하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분류 없음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려 (0) | 2012.07.03 |
---|---|
반석과 모래 (0) | 2012.06.27 |
좁은 문, 좁은 길 (0) | 2012.06.22 |
멸망의 시작, 아하스 왕 (0) | 2012.05.11 |
아버지를 본받은 아들, 요담 (0) | 2012.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