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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과 모래

LNCK 2012. 6. 27. 10:01

◈반석과 모래           마7:21~27         출처보기

 

☞두 종류의 행함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

 

 

◑다시 생각해 보는 ‘행함’

 

예수님은 ‘행함’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것,

둘로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물론 불법을 행하는 자가 천국에 간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법을 행하는 자’를

평소 많은 사람들이 

귀신 쫓음, 또는 권능을 행하는 것과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 쫓음, 권능을 행하는 것 말고도, '불법'은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것’은

행함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고,

주일에 놀러가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행함 자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주일에 놀러가는 것이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행함 자체를 두고서, 거룩한 행함과, 세속적인 행함으로 구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행함 자체를..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별하여 접근하게 되면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사람에게 ‘불법을 행한 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는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는 행위를

   거룩한 믿음의 행함으로 여기지만

   그러한 행함도 불법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기초가 되어 행할 때..

    똑같이 불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 자체만을 기준해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도구로 존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화와, 자기 이름의 확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피조물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위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위해 사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 ‘불법을 행한 자’로 불리는 것도

그 일들을 자기 자랑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일을 나열하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사람인 것을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함(공로)으로

자신이 예수님의 사람이며,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가 담긴 행함은 모두가,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규정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행함이 제 아무리 거룩하게 보인다고 해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삶이 육신적으로 고달프고 힘들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에

‘좁은 문’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과 영화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좁은 문’(예수 그리스도의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넓은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문,

즉, 인간의 뜻이, 하나님의 뜻을 점령해 버린 길입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고 일하시는, 다른 신을 믿는 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불법을 행하는 길임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집이 아니라, 기초의 문제


예수님은 또 다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24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잘 기억하고 계신다면

예수님이 말씀한 ‘행함’이

우리의 상식에서 나오는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산상수훈 마5~7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부지런히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힘내어 헌금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며, 구제하라는 것이었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면.. 우리는 분명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예수님께 의로운 자로 여김 받을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김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함으로도, 이미 실패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행함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해도,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구제, 금식 모든 것도.. 자신을 위해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구제와 금식 등을 통해서, 자신의 의와 믿음이 인정받는 것이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을, 

귀신 쫓아내고, 권능 행하는 것 말고도 헌금, 봉사 등 모든 것을,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규정하셨음을, 이미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2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위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집을 세운 기초에 대해 언급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집을 얼마나 크고 튼튼하게 짓느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집이든 큰 집이든 상관없이, 그 기초가 반석이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집을 짓는다고 해도 기초가 반석이 아니라

26절의 말씀처럼 모래라면 그 집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히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집을 같은 재료로 사용해서 같은 크기로 지었다고 해도

그 기초가 무엇인가에 따라 집의 운명이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떤 바보가 모래 위에 집을 짓겠습니까?

또한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면 굳이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짓는 도중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사막의 모래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누구도 온통 모래뿐인 땅 위에 집을 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너질 것을 뻔히 알면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주1)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느냐가 아니라

신자의 신앙생활에서의 모든 행함이, 바른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바른 기초,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바르지 못한 기초, 모래땅은.. 즉, 자기 자신, 자신의 공로입니다.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진 집이냐는 것은, 겉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즉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과 같은 행함으로는, 그 기초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초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이 불어오게 되면, 모든 기초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단단한 땅이었는데, 결국 모래땅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에 있어서 지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반석이고, 무엇이 모래인가를 분별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반석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모래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반석으로 여기고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모래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래는 바로 행함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행함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고,

행함을 통해서 자신이 지은 집이 크고 튼튼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이것이

모래 위에 자신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행함 위에 자신을 세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이지 우리의 행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함이 마치 단단한 땅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 더 읽으실 분 .....................


▲마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과, 서기관의 가르침이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율법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또한 의롭게 되고 구원 받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쉽게 말해서 행함이 곧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히 믿음이 없는 자로 간주되고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서기관이 말하는 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를 말씀합니다.

인간의 행함에 의한 의로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고,

심판의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감을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곧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행함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온 세상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심판의 바람에서도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할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반석이신 그리스도께로 끌어갑니다.

하지만 거짓선지자의 말은 행함으로 끌고 갑니다.


행함에서 자기 의를 보게 하고, 자신의 의에 만족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신앙의 기초로 삼게 해 버립니다.

하지만 결과는 심판의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초 위에 있습니까?

물론 자신이 모래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신앙생활을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반석위에 서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초는 성령이 오심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인간의 행함이 의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기초가 인간의 선과 행함이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참된 반석이심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에 자기의 모든 것을 얹어 두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눈을 뜬 신자가, 의인으로 새롭게 창조된 새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인간의 행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오직 예수님의 의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힘입게 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압니다.


그래서 생명이 되는 예수님의 의만을 증거하게 되고,

무엇을 행한다고 해도 자신은 무익한 종일뿐임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죄인된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을 사랑이 나타나는 도구일 뿐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증거되는 도구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기관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고,

또한 거짓선지자의 가르침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여러분 자신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인해서 바뀐 신분과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죄인이라는 인간의 자리에서 진심으로 주님을 보는 신자만이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


주1)

이것은 팔레스타인 땅의 지형과 기후를 알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와디’라고 해서, 평소에서 말라서 단단하기 때문에 교통로로 사용하지만

우리가 되어서 비가오고 홍수가 나면, 강이 되어 버리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땅에다 집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본문 ‘모래’의 원어적 의미는 ‘sandy ground’입니다.


따라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

모두 기초도 단단하게 보이고 집 모양도 똑 같아

외양으로는 어느 집이 더 견고한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폭우가 내리면 그 기초가 어떠한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집이 문제가 아니라, 기초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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