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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좁은 길

LNCK 2012. 6. 22. 21:18

◈좁은 문, 좁은 길              마7:13~14              출처보기

 

 

※성경에 <문>이란 표현이 종종 등장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요10:7

천국(새 예루살렘 성)에도 12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계21:12

 

<문>은.. 성도가 그 문을 통해서, 천국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어떤 <소통의 통로, 교제의 통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요14:6의 <내가 곧 이요> 만 잘 알고 있는데,

      '길'뿐만 아니라, 같은 의미로

      요10:7 <나는 양의 이다>라는 '문'도 있습니다.

      '길'이든지, '문'이든지..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잘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아래 설교문은, <좁은 문>을

<양의 문>처럼, 구원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읽고 이해하기에 쉬운 성경 본문'을

너무 어렵게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였습니다만... 

 

1.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양의 문>이, '예수님을 통하는 구원의 통로'를 의미한다면,

본문의 <좁은 문>도 그런 맥락의 뜻이며.. 다같은 <문>이니까요!

 

2. '좁은 문'을 지나면 '좁은 길'이 나옵니다.

마7:14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이 협착하여..> 즉, 좁은 문, 좁은 길이며.. 

     But small is the gate and narrow the road that leads to life 

 

이런 표현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요14:6

요14:6, 마7:14의 두  구절 다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3. 문맥을 보면, 

본문 직후인 마7:15절부터 '거짓선지자를 삼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문맥의 연결을 볼 때, 본문 마7:13~14절의 <좁은 문>을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진의가 될 수 있습니다.

문맥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 마7:14의 <좁은 문, 좁은 길>을

요10:7절 <양의 문>과 연결지어 보고,

요14:6의 <내가 곧 길이요>와 연계해서 볼 때,

<좁은 문, 좁은 길>을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편.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원칙에 의거하면, 맞는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여러 고수님들의 가르침을 검색하면서, 앞으로 계속 연구해 보겠습니다.

 

...............................

 


◑생명의 길은 막혀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취하신 조치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생명나무의 접근을

그룹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이 스스로 생명나무로 나아가 영생(생명)을 취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깨달았다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포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자기 구원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만들어

그 길을 감으로써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에 의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구원과 행복, 여기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들 나름대로 구원을 얻고, 인생의 행복도 얻을 수 있는 길로 고안한 결과가

종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안에 각기 나름대로 법칙과 규범을 만들어,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하면서

그 법칙과 규범에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목적하는 바를, 신의 도움과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렸지만,

인간은 구원의 길을 스스로 고안해 내어

자신들이 만들어 세운 법칙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주일성수, 십일조, 봉사, 헌신 등등의 종교생활입니다.


종교생활을 성실히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 결과로 구원에 이르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과 복이 ‘인간하기 나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나름대로 선과 악을 구분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하는 선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고,

   악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종교생활을 선한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종교 생활이 곧 구원과 연결된다고 생각하기에, 종교생활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 종교생활에 게으른 것은, 믿음이 아닌 악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복을 받지도 못하며

설령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운 구원이고,

하늘에서의 상도 없다는 성경과 상관없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자체가, 악이 된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합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는 사실에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면

막았던 길을 열어 주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어떤 길이나 수단, 방법을 고안해 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그 모든 것은

오히려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의 내용입니다.


◑좁은 문이란 무엇인가요?


앞에서 <종교는, 인간의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에 의한 산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말은, 인간에게는 자기 구원에 대한 욕망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이 욕망은, 성경을 읽을 때도 반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도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보게 되면

열심히 자기 구원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이루어주신다.. 는 의미로 해석하게 됩니다.


본문(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의 눈으로 보게 되면,

구원을 받으려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보기 십상입니다.


즉 ‘좁은 문’이라는 것을, 구원을 받기 위해 들어가야 할 문으로 바라보게 되고,

나름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고안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생하고/ 절제하면서/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본문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육신의 편안함과 연관하여 생각합니다.


즉 ‘자기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복 받고 잘살려는 의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여기고,


반대로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육신적으로 고생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복 받고 잘 살려는 의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기준으로

좁은 문과 크고 넓은 문을 구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진리/구원은, 육신의 고생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고생한다고 해서, 진리를 따라 산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좁은 문’과 ‘넓은 문’을 육신과 연관하여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말씀하셨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인간이 고안하고 만들어 내는 의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위 마5:20절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는데,

이 설교문은, 그와 반대로, ‘그건 불가능하다’하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의가 아닌, 다른 의로만 가능한 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자신들이 고안한 선을 가지고 생명을 얻으려고 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그 길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의를 뜻합니다.


결국 그 의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질 뿐이고,

그 의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롬3:21-22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의가 되시는 분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법은 더 이상 없음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떤 실천이 의가 된다거나,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서 복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선악을 알게 된 인간에게 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선과 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기에

이 믿음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실천하기가 힘들어서 좁은 문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는 길이기에 좁은 문인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여러분 가운데는 신자가 선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은 신자다운 것이고 구원의 증거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이라는 지식’에 붙들린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면,

결국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면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곧 하나님의 뜻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 거의 모든 교인들이 생각하는 믿음이고

또한 선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신자는 주일성수를 해야 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주일성수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주일에 신자가 함께 모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인데,

이것을 ‘주일성수’라고 이름 붙여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지킴으로써 믿음의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좁은 문>이 아니라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의 일례가 됩니다.

왜냐하면 ‘주일성수’라는 것이, 인간이 원하고 생각하는 것과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따라서 주일 성수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 인간의 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믿음의 길이기 때문에, 크고 넓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의 없음을 고백하며, 찔림을 받고 상한 심령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51:17절에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분명히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선행을 하는 사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는 말씀처럼,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인간의 선행이 의가 된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만 의가 되고,

예수님의 의로 구원에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선악 지식에 의해서 고안된 다른 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선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인간은 반발합니다.

믿음을 받았다면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이 선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찾는 자가 적은 것은, 자신이 포기되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찾는 자가 많은 길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인간의 욕망과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지게 하시면서,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참된 진리와 생명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복된 자인 것입니다.


.....................................

 

 

 ※그런데 ‘오직 믿음’, ‘이신칭의’ 만을 주장하며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가르치면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철저한 "내적변화" 없이도


자칫 신자들이 머리나 지식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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