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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LNCK 2012. 7. 3. 22:45

◈염려                 마6:28~34            출처보기, 정리


 

◑서론/ 염려를 지고 사는 인간


▲하나님은 어떠하든지 별로 관심 없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

오늘날 대부분 신자들은, 하나님의 계획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가 원하는 계획만 있을 뿐이고,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을 성사시켜주는 능력을 가진 신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자기가 잘해서 좋은 성과를 올리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래서 <좋은 성과>를 올리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어서 좋고,    

자기 명예에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성과를 올리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당신에게 다른 것은 요구하지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나의 뜻과 내 계획만 잘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평생토록 당신을 나의 신으로 섬겨주겠습니다.

거기에다 나 죽거든 그동안 당신을 믿은 공로를 봐서 천국에 가게 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인공(주님)이 아니라, 자신을 주인공(주님)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나

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규례대로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또한 지금의 우리가 매 주일 예배당을 찾아서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믿음은..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현대사조인 인본주의, 실존주의, 실용주의, 공리주의, 다원주의

이러한 모든 현대 사상의 공통점은 ‘나 중심’, ‘내가 소중하다’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마저도 ‘나를 위해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앙이 평생 그 수준에서만 머물 때는.. 틀린 게 됩니다.

아마 구원 못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신자는

늘 염려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나 중심적 신앙은.. 염려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라고

말씀하시지만, 과연 신자들 중에 몇 %나, 염려를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염려로 시작하여 염려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까지 염려를 지고 사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염려에서 벗어나 평안을 찾기 위해, 절대자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도움을 받아서, 염려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지나치게 우상으로 섬길 때’는

아무리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도.. 염려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은 나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가난하든 부하든 그 모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자기 노력도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은 작은 그림이고,

내 인생의 큰 그림은, 가난과 부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로 결정됩니다.)


내가 주인이 된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내 인생을 살고 있는 신자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큰 그림, 그 주권/작정/섭리/예정을 늘 염두에 둡니다.

염려는.. 이런 믿음 안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이라도, 나에게 불리한 것이라면.. 외면해 버립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에 붙들려 있는 인간이기에

미래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불안감이 있게 되고, 염려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본론/ 1.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나은 백합화


마6:28~30,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나님이 돌봐 주시면.. 솔로몬의 영화보다 낫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솔로몬의 영광입니다.

솔로몬의 영광과 같은 영광을 덧입은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그토록 갈급해 하는 것이고,

주어지지 않으면 염려하면서 자기 인생을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참으로 찬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을 생각한다면

누구든 솔로몬과 같은 인생을 살아보기를 꿈꿀 것입니다.


세상의 귀하고 좋은 것은 모두 마음대로 누리고 사는 인생이야 말로

모든 인간이 소망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솔로몬의 영광을

들의 백합화 하나보다 못하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눈에 들의 백합화는 그냥 하찮은 꽃에 지나지 않습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우리의 눈에는 그냥 꽃일 뿐이지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으로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영광과 같은 영광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영광이 아닙니다.


세상은 겉에 입혀진 것의 가치를 판단해서, 사람을 구별하고 대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세상의 좋은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영광’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의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낫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들의 백합화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그 꽃 또한 하나님이 입혀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상태로 존재하는

그것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나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나은 영광으로 말씀한 들풀은

내일 당장 아궁이에 던져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늘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보물은 하늘이 아니라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이 높이는 것은, 세상의 보물을 가진 자입니다.

그들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참된 영광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자의 영광은, 세상의 것으로 주어지지 않고,

하늘의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것이란.. 하나님이 돌봐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은혜로 돌봐주시는 사람은.. 영원히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영화(세상 부귀영화)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돌봐주심을 입은 (나사로 같은) 거지나 걸인도,

솔로몬의 영화를 입은 세상 군주보다 더 나은 것은,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면, 여실히 증명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영원의 세계’를 보면서 말씀하시고,

우리들은 항상 ‘현실의 세계’만 보면서 이해하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오늘 하나님이 돌봐주고 (임재하시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 군왕보다 나은 영광(=영화)을 입고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


여러분, 세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과시켜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이 말씀은,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을 말씀하기도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영적 옷’을 복선으로 깔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적 시각에서 ‘옷’을 바라보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시각에서 ‘옷’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영원/영생의 시각에서 말씀하십니다. 거의 모든 경우에)


그럴 때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귀한 것은,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들의 백합화를 흰옷으로 입히시는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보다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흰옷, 의의 옷으로 입히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의 옷을 입은 신자야 말로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뛰어난 영광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이라면.. 세상 염려는 자연히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본문 말씀은 여러분께 염려하지 말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 아니라,

염려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와 그 나라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3. 염려의 차원이 다릅니다.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서두에 ‘나 중심적 신앙’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신앙은, 교회에 30년을 다녀도.. 어쩌면 구원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진정 회심만 성도는,

결코 ‘나 중심적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세상 염려는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염려의 시험에 빠질 때가 잠깐 있어도, 금방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1분간은 염려할 수 있어도, 곧바로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4. 내일 일을 믿는 믿음


3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염려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결국 불안은 ‘나는 내일에도 보란 듯이 살아야 한다’는 자기 우상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일 일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는다’ ..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내일 일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게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보니,

‘내일 일은, 항상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미래도 ‘내일 일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절)는 말씀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돌봐 주시기 때문이고,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의 흰옷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들은.. 있어도 rich 그만, 없어도 poor 그만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됩니다.

내가 우상이 되어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받고자 한다면

그 욕심은, 우리를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문제'를

항상 먼저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염려는.. 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


▲일화/ 어느 간호사의 만족                     

의사였다가 기독교 작가로 변신한 크로닌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광산촌에서 계속 의사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산촌에 한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좌천되어 오지로 온데다가,

월급마저 아주 적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감사하며 일했습니다.


그리고 병원 진료시간이 끝났는데도,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더 하곤 했습니다.


그런 간호사의 모습을 본 크로닌 박사는 안쓰러워서

간호사에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진 가치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실 텐데 말이야.."


크로닌 박사가 이 말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간호사의 억울한 사정을 아실 텐데

어째서 이 간호사를 이렇게 비참한 곳에 그대로 버려두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간호사는 크로닌 박사의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의 참 만족은,

‘내가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이 성도의 가장 큰 특권이요, 가장 큰 만족입니다.


보수의 문제, 환경의 문제, 처우의 문제.. 그건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처우와 환경이 좋아도

‘내가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마음이 없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엉뚱한 일을 하면서, 자기 인생을 낭비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반대로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 확신과 만족이 있는 성도는,

가장 큰 보상과 축복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보수와 환경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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