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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은혜

LNCK 2012. 8. 9. 07:48

◈침묵의 은혜            눅16:27-31, 약3:2            출처  이중표 목사님 설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불평등한 것을 눈으로 보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부요하게 태어나서 일생동안 편안하게 살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고난 가운데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하며 살다가 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평생 부자로 살고, 어떤 사람은 평생 절대 빈곤 속에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운명적 조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하는 생각을 갖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은혜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탄식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슬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 유일한 모델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고통, 불행한 요소를

한 몸에 다 지니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신분으로 말하자면 가장 천대받는 거지요,

그가 먹는 양식은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요,

삶의 거처는 부자의 대문간이었습니다.

 

그는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온 몸은 상처투성이 이었습니다.

그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유일한 친구 하나를 꼽는다면

가끔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아준 개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날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먹고, 마시면서 연락했습니다.

 

두 사람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대조적인 환경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나사로는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분의 고난, 건강의 고난, 거처의 고난, 식량의 고난,

인간적으로 어느 것 하나 내놓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자기 처지에 대해서 탄식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불행하다고 슬퍼하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사로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는 침묵의 은혜입니다.  ←설교 주제

 

우리는 일생동안 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입을 열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기에 일생동안 말하고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말이 과연 하나님의 심정을 지니고 하는 말인지,

또 평화를 창조하는 말인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옛 선조들과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사람들의 심성이 악해졌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옛 선조들도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그 화풀이로 자녀들에게 살기 찬 말이나

욕설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과 같이 독소를 품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전자 매체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문자로 표출되는 언어를 보십시오.

한 사람을 죽이고, 헐뜯고, 상처내고, 매도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단 1분도 안 걸립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총탄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인간의 말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잠잠히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침묵하라!"

침묵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말을 절제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침묵하는 사람을 은혜의 사람, 도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통하고 나면,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한국 교회사에 존경받는 이용도 목사님의 한 일화입니다.

옛날에는 부흥집회를 하면 일주일씩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회를 인도하고 나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날도 이용도 목사님이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강단에 서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려 3시간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수많은 청중이 통곡을 했습니다.

 

그가 외치는 말씀 선포는 없었지만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주님의 심정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주님과 교통하는 그 마음의 소리를 듣는 청중은 시종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우리는 '침묵' 하면 일반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침묵에도 외적인 침묵과 내적인 침묵이 있습니다.

 

외적인 침묵은 겉으로는 자기 마음을 억제하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속에서는 계속 소리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며느리의 침묵, 부하직원의 침묵입니다.

 

내적인 침묵은 모든 것을 차단하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상태,

마음까지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유명한 영성학자인 토마스 머튼은

"외적인 침묵은 교만의 침묵이고, 내적인 침묵은 겸손의 침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의 침묵은 세상을 향하여 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때문에 고통의 침묵이요,

겸손의 침묵은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기쁨의 침묵입니다.

 

저는 지난 번 미국 선교집회 갔을 때 아틀란타에 있는 목사님에게 부탁해서

아틀란타에서 가장 큰 교회와 천주교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아틀란타에서 가장 큰 교회는 찰스 스탠리 목사가 시무하는 제일침례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대지가 2만 5천평이었고, 건물의 좌우 거리는 200m쯤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교회를 다 돌아본 후에, 상당한 거리를 달려서 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니까 입구에 "여기를 들어오는 순간부터 입을 다무십시오.

여기는 말로 은혜 받는 곳이 아니라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로 말하는 기도를 많이 하지만

진짜 깊은 은혜는 침묵기도를 통해서 받습니다.

 

어린 아이를 돌보는 부모는 아이가 전혀 말하지 않아도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디가 불편한지 다 압니다.

 

제가 며칠 전에 교회 앞에서 한 자매를 만났는데 맹인이었습니다.

"자매님,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마흔입니다."

저는 마흔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얼굴이 20대처럼 젊어보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이가 마흔이나 되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20대 같이 젊습니까?"라고 했더니

옆에 있던 분이 "이 분은 보는 것이 없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서 젊어 보이는 겁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다섯 가지 침묵을 얘기했습니다.

입의 침묵, 마음의 침묵, 눈의 침묵, 귀의 침묵, 정신의 침묵을 얘기했습니다.

 

입의 침묵은 비록 세상이 악하고, 부조리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함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침묵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 것입니다.

 

눈의 침묵은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 등급을 매기고 평가하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귀의 침묵은 들어도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정신의 침묵은 자기를 비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침묵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사로는 눈만 뜨면 부자의 인간적 교만, 몰인정, 타락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것을 보면서도 거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기르는 개한테는 좋은 음식을 먹여주면서

헌데를 앓으며 대문간에서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나사로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부자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미국에 가면 개가 최고로 대접을 받습니다.

비싼 고기 먹여주고, 품에 안아주고, 좋은 옷 입혀주고, 좋은 침대 위에서 재워주고,

병이 들었을 때는 고급 주사를 맞춰서 치료해 줍니다.

 

개에게는 모든 좋은 것을 다 해 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는 인색합니다.

개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개를 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부요해지면서 개를 상전 대하듯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를 품에 안고 살면서도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자비의 손길도 펴지 않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나사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왜 침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가난과 부요를 모두 초월한 경지에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과 부요를 초월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자족할 수 있고, 부요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한가지를 알았습니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22:2).

 

자기는 비록 낮은 곳에 있고 부자는 높은 곳에 있어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똑같다는 사실을

나사로는 믿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에 대해서 전혀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혀 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습니다.

나사로는 자기의 운명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난할 때 은혜를 못 받으면.. ‘가난 독’이 들어옵니다.

고생하면서 은혜를 못 받으면.. ‘고생 독’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독종이 됩니다.

 

시어머니한테 시달리면서 은혜를 못 받으면.. ‘시어머니 독’이 들어옵니다.

며느리에게 시달리는 시어머니는.. ‘며느리 독’이 들어옵니다.

 

병들어 고생하면 ‘병 독’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나쁜 독이 들어오지 않으려면..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나사로는 가난 속에서도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무슨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침묵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침묵의 은혜를 받으셔야 됩니다.

 

욥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자기의 고통을 항변하다가,

나중에 침묵의 은혜를 받고,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40: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거지 나사로는,

    아예 처음부터,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린 사람이었습니다.

 

중세기에 한 수도사가 고난주간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설교를 하지 않고 촛불을 켜더니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의 성상으로 가서 못 박힌 손자국을 비춰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못박힌 발자국을 비춰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옆구리 창 찔린 곳을 비춰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시관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할 때 주님은 뭘 하고 계셨을까요? 나와 함께 가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주님은 뭘 하고 계셨을까요? 내 안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주님은 뭘 하고 계셨을까요? 나와 함께 슬퍼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침묵의 은혜입니다.

 

나사로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부자의 대문간에서 헌데를 앓으면서

고통스러워할 때.. 하나님도 자기와 함께 고통스러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사로는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가 불꽃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눈을 들어 보니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부자가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 아버지의 집에 형제 다섯이 있으니 나사로를 보내어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아직도 속을 못차리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옛날 자기집 대문간의 거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은 바꾸어졌고,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자요,

천사의 시중을 받고 있는 자인데.. 아직도 거지 나사로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심부름 시키라’고 두 번이나 요청합니다.

 

제가 만약 나사로라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주여, 아직도 저 자가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따끔하게 더 혼내주어야 됩니다."라고 한마디 할 만도 한데

나사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자기가 간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로,

내가 할 일은 내 일로, 하면 됩니다.

 

복수는 아버지의 일입니다.

성경에 한 번도, 복수를 사람의 일로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보복은, 아버지께 맡기십시오!

 

부자의 장례식은 호화롭게 치러졌습니다. 수많은 문상객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비싼 관에 덮여 양지바른 곳에 묻혔습니다. 좋은 비석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 하나가 없었습니다. 천국에서 문상 온 천사가 없었습니다.

(아마 지옥에서 마중 나온, 마귀는 있었겠지요.)

 

이에 반해 나사로는 문상객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한 몸 누울 관도 없어서, 거적에 돌돌 말려 공동묘지에 버려졌습니다.

만약에 문상객이 있었다면 그의 상처를 핥아주었던 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부자에게 없는 하나가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파송된 천사는, 나사로를 ‘받들어 모셔서’, 천국으로 인도했습니다.

 

눅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우리는 한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내가 비록 가난해도.. 나를 따르는 천사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실패해서 아무도 나를 찾아오는 이 없어도..

천국에서 파송한 천사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 확신을 갖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탄식하지 않습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역사할 때

환란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침묵> 관련글 모음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우심이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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