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을 앙망하며 살아가지 않고서는 살 수없는 존재입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우러러 볼 仰 바랄 望)
무엇을 우러러 보고 의지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계십니까?
이사야 1장부터~ 39장까지 하나님이 강조하신 말씀은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세상 세력을 의지하였고, 그 결과,
이사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약100년 후,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 받았습니다.
40장부터 66장 끝장까지는 시대를 뛰어넘어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야로 인한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39장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지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40장부터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되라는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앙망하며 의지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본 장을 이중예언으로 볼 때,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으로 인한 회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인한 회복>을 둘 다 나타냅니다.
◑1. 위로하시는 하나님 사40:1~2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사람들은,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절,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 위로하라’
무대는 바벨론 포로시대로서
이제 ‘그 시대의 종결’의 임박성을 연상케 하는, 표현(위로하라)이 두 번 반복됩니다.
‘내 백성’
본 절 앞부분의 ‘너희 하나님’ 상호 연관성을 지닙니다. (렘31:33, 호1:9, 10).
이 둘은 언약적 용어인데, 여기서 이 용어가 사용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슴 아픈 사건(바벨론 포로 사건)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맺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파기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2절,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위로의 메시지의 핵심은 ‘죄값이 지불되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사해졌다는 것입니다. 주1)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도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처벌punishment이 아니라, 연단discipline(징계) 때문입니다.
즉, 교정하고, 더 잘 되라고.. 하나님은 죄값을 받게 하십니다.
◑2.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40:3~11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도 큰 일이지만
더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이 땅에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림 예수가 오실 때, 누가 그 길을 예비하였습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그러나 이제 초림 예수는 오셨으므로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재림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본문에 의거, 5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광야에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3절)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주2)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초림 예수를 기다리며 “회개하라” 고 외쳤습니다.
재림 예수 또한 광야에서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때에는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였습니다. (마24:16) 산은 광야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광야라고 해서, 문자적으로 허허 들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광야 같은 신앙을 가지며 재림 예수를 기다리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 같은 삶을 살았던 자였습니다.
제사장 사가랴의 외아들로서 30세에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권세 다 버리고
광야에서 예수님만 전하며 기다린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상 속에 빠져서 부귀, 영화. 권세, 명예, 돈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자는
절대로 재림 예수님을 준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광야 같은 신앙을 가진 자만이
재림 예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4-5절)
▶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무엇으로 삭막한 사막 같은 세상을 평탄케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세상을 평탄케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높은 산과 골짜기들, 험한 곳들은.. 세상이 자랑하는 것들로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아니하면
세상의 높은 산들과 험한 것들 앞에, 오히려 미혹당하고 말 것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두 날 가진 검이 내 안에 있을 때,
우리를 미혹시키기 위해 수없이 밀려오는 세상의 것들을
찔러 쪼개며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나의 연약함을 깨달아라. (6-8절)
▶6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아름다움’은 ‘하스도’인데, 그 원형은 ‘헤세드’(은혜, 사랑)입니다.
야보고와 베드로는 둘 다 이것을 ‘영광’(독사)으로 번역했는데, (약1:10, 11, 벧전1:24, 25)
‘영광’이란 어떤 사람을 아름답게, 힘 있어 보이게 하는 건강, 기력, 미, 재능, 지혜 등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모든 자랑거리와 아름다움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함을 뜻합니다.
▶7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본 절의 이미지는, 사막의 열풍(동풍)이 불어올 때
봄에 피어난 꽃들이, 갑작스럽게 시들어버리는 현상에서 취해졌습니다.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본문의 의미는 말씀의 영원성과 불변성뿐만 아니라
유효성, 곧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리라’로 번역된 말(야쿰)이, 바로 ‘반드시 실현된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결코 강한 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지 아니하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재림 예수를 온전히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운이
즉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는 강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예수를 떠나서 큰소리치며 자랑하며 사는 자들은 풀같은 존재이며
안개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큰 권세와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풀과 안개와 같은 자들이 재림 예수의 길을 예비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자랑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만이 나의 전부'인 자를 통해
하나님은 다시 오실 예수의 길을 예비케 하실 것입니다.
넷째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라. (9-10절)
▶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높은 산에 오르라’
이는 적군의 침입을 알리기 위하여, 파수대 같은 높은 곳에 머물렀던 파수꾼이나, (52:8)
자기 부대의 도착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앞서 파송되어 높은 지대로 오르곤 하였던
전령(삼상31:9, 삼하18:19~21)의 모습에서 착안한 표현입니다.
한편, 높은 산에 올라 전할 ‘아름다운 소식’이란
1차적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 소식이며,
더 나아가서는 성육신하여 오실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10절,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상급.. 보응’
전투의 승리자가 본국으로 귀환할 때 가져오는 노획물 혹은 공물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강한 능력을 동반하고 오실 텐데
그때에는 여호와를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흑암의 세력들이 패퇴당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라는 두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9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입니까? 복음이죠.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이죠.
신랑 예수가 가까이 오고 계시니 영접할 기름 준비하라는 것이죠.
이런 복음을 힘껏 외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말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장차 만왕의 왕이 오실 것이고 그분이 세상을 통치하실 것을 외쳐야 합니다. 주3)
다섯째로 하나님은 나를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11절)
▶11절,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본 절은, 앞 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강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얻은 대가는
‘양떼, 어린 양, 젖먹이는 암양’ 곧 새롭게 회복된 백성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신약에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내다보게 합니다(요10:11~15).
본 절에서 “먹이시며” “안으시며” “인도하시로다”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많은 세상 종말론자들은, 환난이 오면 먹을 양식이 걱정되어
온갖 방법과 지식을 동원해 양식을 비축해두고 있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자들은 걱정 안 해도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누가 주는 양식을 먹으며 지냈습니까?
또한 안아주실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찾아볼 수 없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자들은 품 안에 안고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43:1-2)
(계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러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먹여주시고, 안아주시고, 인도하심을 받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위대하신 하나님 사40:12~26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가 되며
더 나아가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됩니다.
또한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앙망하여,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인간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위대하신 하나님>의 논증을 통해, 이사야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어찌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겠습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주적 차원에서 강력한 논증을 선포합니다.
첫째,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크시고 위대하십니다.
▶12절,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손바닥, 뼘, 되, 접시저울, 막대저울’
이들은 모두 당시의 측량 도구를 가리키는데,
본 절에서 이것들을 가지고 달고 재어보는 대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당시보다 오늘날은 측량 도구가 더 발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것이든 오늘날의 것이든 간에,
그것들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이 위대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둘째,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크시고, 위대하십니다.
▶13절,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모사’란 문자적인 뜻으로 ‘조언의 사람’입니다.
본문은 당시 군왕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정치 전문가들에 의존하였던 사실을 연상시킵니다.
본 절은 하나님을 조언할 책략가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自己充足性)과 초월성을 가르칩니다.
▶14절,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하나님의 피조 세계조차 헤아릴 자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에 통달하고, 하나님의 초월성 및 무한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세상 존재와 구별되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세상 열방에 대해서도 초월적인 위대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 때, 우리가 앙망하게 됩니다.
▶15절,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저울의 적은 티끌’
원문은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입니다.
물동이의 물 한 방울,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 등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눈에 보이는 가시적 물리 집단인 당시의 고대국가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표면상으로 본 절은, 하나님이 비교할 상대가 없는 위대한 분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셔야 합니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 유명한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이나, 짐승들로도 (레바논은 백향목으로 유명합니다.)
그분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기에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땔감용 나무와, 희생 제사용 짐승이 필요하였습니다.
▶17절,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아무것도 아니라, 없는 것, 빈 것’
이 표현은 우상과 관련한 묘사에서, 성경에 자주 언급됩니다. (41:24, 29, 44:9~11, 46:1, 2).
물론 여기서는 제 힘만 믿고,
제국주의적 야심에 불탔던 열방들에 대한 풍자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주권 앞에서
그들의 존재란 무기력하고 미미하기 짝이 없다는 점에서
허탄하고 허무한 우상(18절 이하 참조)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다.
(강대국 열방은.. 우상과 같이 허무하고 빈 것이라는 뜻)
여러분!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전율이 느껴지십니까?
이렇게 위대하신 분을 우리가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 것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무지한 것인지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18~26절까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계속 선포하고 있습니다.
넷째,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18~20절)
▶18절,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인간은, 경험한 세계를 토대로 경험치 못한 세계를 상상합니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기능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피조 세계에
보이는 어떤 사물이나 인간을 연관시키는 목적에 사용할 때는
우상 숭배라고 하는 극악한 죄에 빠지게 되는데, 바로 이점을, 본 절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19절,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본 절은, <우상이 인간의 고안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열국을 말하고
본 절에서 나란히 우상을 말하는 까닭은
고대 세계에서 ‘한 나라와 우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을 단지 전쟁 당사국간의 싸움이 아니라
나라마다 섬기던 신들 간의 싸움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싸움 후, 진 편의 신은, 없어지든지,
이긴 편의 신에게 종속적 존재가 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당시 이방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바벨론의 마르둑(Marduk) 신에 의한 하나님의 패배로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8절에서부터, 저자는,
우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물건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0절,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우상을 세운 사람이 그 마음대로 옮기거나 고정시킬 수 있음을 암시함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분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우상 숭배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똑같이 사람들의 삶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거짓 신들의 초월적인 능력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어서 금으로 입혔다고 하였습니다.
부자들은 금이나 은을 사용하여 우상을 만들고
가난한 자들은 썩지 않는 나무들로 만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은 인간의 손에 의해
얼마든지 제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과 하나님과 비교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시115:4-8) 주4)
다섯째, 하나님은, 세상의 권세자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21~24절)
그래서 하나님은, 크시고 위대하십니다.
▶21절,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이스라엘은 어려서부터 만물의 기원을 배웠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와 초월해 계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의문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2절,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커텐)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23절,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인간의 눈에 방백이나 재판관(사사)들은 힘 있는 자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권세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제든지 그 권세를 폐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4절,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마른 풀) 같도다.
37:31과 뚜렷이 대조되는 구절입니다.
견고하게 뿌리내려 과실을 맺는 의인과는 반대로,
악인은 열매는커녕,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는 식물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세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권세가 없다고 불평 원망 할 것도 없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물질이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고 불평 원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교회가 작다고 낙심하며 좌절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가진 바에 만족하고 있는 곳에서 감사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앙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25-26절)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25
그리고 하늘의 만상 곧 별들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 속에서
모든 피조 세계가 제 자리를 지키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만상도 돌보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 지으신
택하신 자들을 어찌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보라” :26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눈을 높이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육안으로는 이 위대하심을 볼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5절,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유일무이성이, 이번엔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써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그리고 이하에서는 이러한 강조의 근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6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25절까지는 ‘땅의 영역’을 살펴보았습니다만,
본 절에서는, ‘하늘 영역’을 보라고 말합니다.
하늘 영역에까지 확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 완전성, 절대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4. 위대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라 사40:27~31
▶27절,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본 절에서는, 야곱, 곧 이스라엘이 자신은 정당한데
그 정당한 사정이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다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2절부터 계속해서 하나님의 절대성, 초월성, 무한성이 강조된 것을 보아왔는데
본 절의 '원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본 절은, 원망하는 자들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28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정이 외면당했다고 생각하여 절망,
좌절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영원하신 분,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 그리고 한번 시작한 일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일관성 있는 분,
신실한 분, 아무도 깨달을 수 없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29절,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계속해서 본 절에서,
오히려 사람이 피곤하고, 힘이 없는 것은(무능한 자)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 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피곤하고 지친 자에게는 힘을 주신다고.
무기력하기 쉬운 우리 삶에, 힘과 능력을 얻는 길은,
오직 여호와를 간절히 앙망하는 것입니다. :31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은, 기도에 집중하고, 말씀 붙들고 씨름하는 길 뿐입니다.
▶30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장정’(바후림)의 문자적인 뜻은 ‘선발된 자’인데
이들은 긴박한 사업, 위험한 일 등을 수행하기 위하여 피택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이들이 특별히 뽑힌 장정들이라고 할지라도
질병이나 피로, 사고 등에 의하여, 그 힘이 쇠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의존적 존재이므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강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사1장은 이스라엘의 당면된 현실을 바라보면, 소망이 없음을 강변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과 가능성을 조금씩 비치기 시작하는데
그 절정은 53장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설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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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망했고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하는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죄사함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심판도, 궁극적 의미의 심판은 아니었습니다.
궁극적 심판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 신실성으로 말미암아
본문과 같은 약속을 받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주2) ‘외치는 자의 소리여’
히브리어 원문 ‘콜 코레’는
- ‘한 음성이 외친다’,
- ‘외치는 음성’
- ‘외치는 자의 음성’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본 구절을 인용한 마3:3과 본서에서의 용례를 고려할 때
‘외치는 자의 소리여’가 가장 좋다.
주3)
그런데 이런 복음을 외치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소식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것처럼 아름다운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죄를 담당하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식입니까?
“그 예수가 이제 죄가 없는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식입니까?
내가 아름다운 보석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를 왜 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전하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4)
시115:4~8,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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