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감동된 사람 행21:1~6 출처보기
◑성경에 나오는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
▲지금 우리는 안타깝게도, 감동이 없는 사회, 감동을 찾아보기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여러분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란다.
누가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가?
기업인들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가?
교수나 선생님들이 감동을 시키고 있는가?
우리 사회에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가? (물론 내 책임도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다.
“요즈음 당신을 감동시킨 일이 무엇인가요?”
“글쎄요! 월드컵 4강 신화의 감동” *2004년경 설교임
그렇다!
우리 국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감동은 월드컵 4강 신화의 감동이다.
온 국민이 하나 되어 - ‘오, 필승코리아’ ‘대~한민국’의 함성을 지르며,
함께 응원하며, 함께 웃고, 울던 광경이 아직도 우리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든 감동은 다 사라졌다.
우리 국민 가운데 “월드컵 4강 신화 때 느꼈던 감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감동이 없는 시대이다.
감동이 없다는 것은 기쁨도, 행복도, 하나 됨도 없다는 것이다.
감동이 없다는 것은 환호성도 없고, 축제도 없고, 희망도 없다는 것이다.
감동이 없는 세상은 거친 광야처럼 황폐해지고 만다.
감동이 없는 인생은 사막과도 같은 삭막한 인생이 된다.
감동이 없는 삶은 관심도 없고, 기쁨도 없고, 열기도 없는 무미 건조한 삶을 살게 한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 감동은커녕, 탄식과 한숨만 늘어가고 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걱정과 근심만 깊어가고 있다.
정말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감동이 없는 사회에서, 감동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나는 날마다 감동한다”
자기 목 아래로 전신이 마비된 가스펠싱어 “리네 본디”의 아름다운 고백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붙잡고 계시는 한 절망은 없다고 외치는 그녀는
날마다 감동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정말 우리는 “린네본디”처럼 날마다 감동하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인가?
▲성경에는 성령의 감동된 사람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감동“이라는 말이, 약 30회가 나타나 있다.
감동이라는 말씀이 이렇게 많이 기록된 것은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요셉)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창41:3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민27:18
그 외에도 - 삼손, 사울, 다윗, 삼십인의 두목, 여호사밧, 스갸라, 고레스,
에스겔, 시므온, 사도요한 등, 성경에 기록된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었다.
신구약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은 아무나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 곧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여러분! 성령에 감동된 사람으로 살아가자.
성령의 감동된 사람은 그 인생이 달라진다.
성령의 감동된 사람은
-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
- 어떤 대적도 다 물리치고 승리하여 약속의 축복을 받는다.
-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구원역사를 이룬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범죄한 뒤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시이다.
다윗이 회개하면서 한 가지 간구하는 중요한 것이 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51:11
왜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기도했는가?
주의 성신을 거두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 왕의 모습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았다.
사울은, 한 때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된 사람이었다.
밭에서 소를 몰고 오던 사울은 암몬 왕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 온 백성이 소리 높여 우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사울을 감동하였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울은
나아가 싸워 암몬과 불레셋을 물리치고 승리하였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사울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신이 떠나자 악신이 들어왔다.
악신에 들려 번뇌하며 고통스러워할 때 다윗이 가서 수금을 타 주었다.
수금을 타면 일시적으로 상쾌하고 시원해졌지만 악신은 떠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던 사람이, 주의 신이 떠나자 악신이 들려
번뇌하며 고통당할 뿐 아니라,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었다.
그렇다!
주의 성신이 떠나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없다.
주의 성신이 떠난 사람은 하나님께 버린 받은 사람이 된다.
주의 성신이 떠나면, 악신이 들어와서
시기와 질투와 분노를 갖게 하고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직접 체험한 다윗은,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우리 성도들은 이미 주의 성신을 받은 성도들이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믿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기도가 바로 우리들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성신이 떠나시면.. 더 이상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로 살아갈 수가 없다.
성령에 감동된 자로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들은 사울이나 다윗처럼 얼마든지 범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주의 성신이 떠나지 않도록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하여 성령 충만 받고 날마다 성령의 감동된 자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본문 설명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다.
행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를 .. 주목하자.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언제 어떻게 성령의 감동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지금 성령의 감동된 행동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을 모신 것이나,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유하는 모든 행동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한 것이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의 삶을 볼 때, 정말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두로에 있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오늘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나그네를 대접한다.
4절,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바울은 두로에서 이레를 머물렀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려고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 급한 일인지라
자신이 3년 동안이나 피와 땀과 눈물로 목회했던 에베소를 들르지 못하였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하여 말씀을 전할 정도로
일정이 매우 바쁜 바울이, 왜 두로에서 일주일이나 머물렀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 배를 기다리다보니 7일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견해와
-두로까지 타고 온 배가 그 곳에서 짐을 내리는데 7일이 걸렸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쨌든 7일을 머물기 위해서, 제자들을 찾았다는 것이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기점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은 사람들이다.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베니게를 방문하였을 때 만났던 사람들로, 바울은 그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여러분! 성령의 감동된 사람은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사람이다.
복음전도자를 대접하는 사람이다.
바울이 일주일을 머물기 위해서 두로의 제자들을 찾아갔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사랑이 많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사람인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어떤 사람이 손 대접을 잘하는가?
- 성령의 감동된 사람이다.
성령은 보혜사 곧 위로의 영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 가난하고 병든 자,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된 사람은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로
약한 자를 위로하고 도와주고 대접하는 삶을 살게 된다.
두로의 제자들처럼 성령에 감동되어
주의 종과 나그네를 영접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2. 성령의 감동된 사람은 되어질 일을 안다.
4절b,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왜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을까?
- 단순히 바울을 좀더 오래 모시고 대접하기 위해서인가?
-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배우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당할 고난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
반면에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보면 대단히 모순된 것 같다.
똑같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해도 가겠다고 하고,
한 사람은 가지 말라고 하고 있으니..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둘 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가야한다는 입장이고,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지 말라는 것이다.
동일한 성령의 감동이지만, 서로 입장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기에 가야하고,
제자들은 바울을 사랑하므로 가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둘 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장차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장차 되어질 일을 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요셉도 꿈을 통해서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았고,
7년 동안 풍년이 들 때 장차 올 흉년을 대비하여 양식을 준비할 수가 있었다.
다윗은 천 년 전에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할 수가 있었다.
성령의 감동된 시므온은 성전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있었다.
성령의 감동된 사도 요한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할 수가 있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성령께서 장차 하시는 일을 알 수가 있다.
성령에 감동되어 장차 이루어질 일을 알고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자.
▲3. 성령의 감동된 사람은 온 가족이 함께 한다.
5절,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여러 날이 지난 후 바울이 떠나고자 하였다.
바울의 일행이 떠나고자 할 때, 전송하는 제자들이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제자들이 모두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제자들 중 대표 한 사람만 배웅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남자들만 나와서 배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그런데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처자식까지 다 나와서 배웅하고 전송하는 모습은
얼마나 가정들이 행복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두로의 제자들은, 3년 동안 같이 지냈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처럼,
정이 들거나 돈독한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몇 년 전에 잠깐 만난 적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일주일 정도 같이 지낸 것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3년 지낸 에베소 교인들보다
더 따뜻하게 배웅을 하고 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성령의 감동된 사람은 온 식구가 하나가 된 가정이다.
남편과 아내, 자식들이 제각기 놀지 않는다.
온 가족이 하나 되어 대접을 하고,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 전송한다.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 함께 기도한다.
온 가족이 모든 일에 함께 하는 모습!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가?
성령에 감동되어 온 교회가 다 함께 움직이고
온 가정이 함께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한 부인이 기독교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하루는 한 남자가 보리밭을 밟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자세히 내려다보았더니, 그는 다름 아닌 그 병원의 원장이었다.
그때 내심 크게 놀란 그녀는, 평소에 말이 적은 원장이
말 잘하는 웅변가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병원 원장이, 정원사들이나 하는 보리밭을 밟고 있는 성실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극히 적은 일에 최선을 다했던 그 원장이 바로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의사요, 음악가인 슈바이처 박사였던 것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슈바이처에게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 라고 질문하자,
그는 ‘나는 말로는 사람을 더 이상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말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왜 의사가 되고, 왜 사업가가 되고, 왜 직장인이 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나의 삶, 나의 하는 일을 통해서 감동을 주는 성도가 되자.
어떤 사람이 “감동이 없는 일에 성공은 없다”고 하였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 무엇을 하든지, 그 일에 감동이 되어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성령의 감동되어 -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
성령에 감동되어 - 남을 대접하는 일에 감동이 있고,
미래를 알고 예비하는 일에 감동이 있고,
모든 일을 온 가족이 함께 하므로, 감동이 있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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