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죄의 두려움이여! 계2:18~29 출처보기
*끝까지 다 들어보시면 좋습니다.
*중세 교회사와 두아디라 교회를 연결시키는 해석은, 여러 해석들 중의 하나입니다.
◈아 죄의 두려움이여! (두아디라 교회) 계2:18~29 전효성 목사
◑순수함을 잃어버려서, 심판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사랑은 중요합니다. 기독교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과 섬김, 그리고 끝가지 참고 견디는 성도의 인내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 믿음 <섬김> 그리고 <인내>가
처음 행위보다 나중에 더 많아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현재 더 주님을 사랑하고,
어제보다는 오늘 우리의 신앙이 더 증진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암만 믿음이 좋아도 오늘 미끄러질 수도 있고, 오늘 우리가 후퇴하게 된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기뻐하시는 그런 신앙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요 본문의 이 두아디라 교회가
처음에는 사랑도 있었고, 믿음도 있었고, 행위도 있었고, 인내도 있었고,
섬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었어요.
과거보다 현재가 낫다고, 이전보다 지금이 낫다고
주님께서 그렇게 칭찬을 했던 교회입니다.
아니 이 정도면, 정말 꿈의 교회가 아닙니까?
사랑도 있어요, 믿음도 있어요, 행위도 있어요, 인내도 있어요, 섬김도 있어요,
그리고 신앙이 날로 날로 증진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끝난 일이 아닙니까? 아니 이 정도라면, 드림처치 정말 꿈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바라는 모든 목표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교회가 예수님께서 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 중에서
가장 혹독하게 심판을 했던 교회입니다.
‘너희 자녀를 죽여버리겠다’고 해요. 환란에 더 큰 환란을 넘기겠다고 해요.
그리고 침상에 너희를 쓰러뜨리겠다.’ :22~23
아주 너무너무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고 분노하시고
그렇게 참담한 심판을 정말로 했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아니 그렇게 부흥하고 인내도 있고 사랑도 있고
믿음도 있고 행복도 있고 인내도 있고 섬기기도 하고
뭐가 부족하다고 여러분 이렇게 큰 심판을 불러왔던 이유는
교회가 순순함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끝장입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 있어서 순수함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런 꿈같은 교회가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다된거 아닌가요?
이렇게 엄청난 성전과 신앙 부흥을 이룬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최대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꿈같은 교회가 가장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교회로 가장 큰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시록 7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3번이나 <회개>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회개의 기회를 더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치 아니하므로 침상에 던져졌고, 큰 환란가운데 던져졌으며
그들의 자녀까지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아 정말 두렵습니다. 심판 중에 가장 큰 심판은, 자신의 자녀들이 죽는 심판입니다.
도대체 사랑의 예수님이 이렇게 진노하시며 심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가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장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함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내어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전한 성도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운동이든지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다원주의 신앙이든지
-기복적인 신앙으로 세상에 축복을 추구하는 교회가
바로 이 세대를 용납하여 엄청난 심판을 초래한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만 강조하며, 쉽게 타협하고 쉽게 죄를 짓고,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을 말씀하시면서 회개하라고 오늘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이와 같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건축이 잘 지어진 교회를 보면
저 어렸을 때는 ‘이야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운 교회에서 예배드릴 성도가 부러웠어요.
그러나 지금은 잘 지어진 교회 으리으리한 ‘일부’ 교회를 보면 가슴이 무너집니다.
‘얼만큼 교인들에게 성금을 강요해가지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지었을까?
이런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불쌍하다.’ 이런 염려가 간혹 듭니다.
요즘은요 큰 교회가 이제는 더 이상 흐ant하게 하는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마음을 씁쓸하게 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왜 건물은 잘 지어놨는데, 마음이 씁쓸해질까요? 왜 그럴까요?
주님 오실 날이 머지않았는데, 사람들은 군대처럼 모이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많이들 타협했어요...
동성애를 지지하는 교단 여러분 한번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동성연애를 지지하는 교단'하고 쳤는데, 저는 깜작 놀랐어요.
동성연애를 지지하는 교단이 개신교안에 더 많습니다.
개신교 교단안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단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교단이 더 많아요.
더 놀라운 사실은요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톨릭과 모슬렘입니다. 모슬렘은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은 돌로 처 죽입니다.
그런데 정통파라고 하는 기독교의 성경을 따라,
세워진 이 개신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아세요? 개신교의 5대 교단이 있습니다.
여러분 한국장로교회가 가장 많이 속해있는 PCUSA,
그런데요 PCUSA는 동성애자가 목사가 되고
동성애자가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결혼식을 하고 지지를 합니다.
여러분 성공회 들어보셨습니까? 그들은 동성애를 지지합니다.
루터교, 미주 루터교가 동성애를 지지합니다.
연합그리스도교회도 동성애를 지지합니다.
여러분 UMC(연합 감리교) 라고 들어보셨습니까?
UMC 교회가 작년에 덴버에서 연회(총회)를 모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꼭 동성애가 통과될 것이다 라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내다봤는데
통과가 부결됬어요. 통과가 안됬습니다. 몇 표 차이로 거부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있습니까?
아프리카에서 온 감리교 감독들이 단에 올라가서
지금 아프리카가 동성애가 팽배했습니다.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만약에 UMC가 동성애를 찬성을 하게 된다면
아프리카에서는 이제는 교회는 문을 닫습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제발 아프리카를 살려 주십시오.
그들이 애원을 하며 울면서 그들이 설득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UMC에서 동성애가 통과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단들은 동성애를 반대하고
정말 동성애가 이 땅을 멸망하게 하는 길이라고, 그렇게 호소하고 있는데
오히려 개신교회, 정말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가, 동성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성경을 무시해도 이렇게 무시할수 있냐고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요, 두아디라 교회는 부흥을 했어요.
사람들은 군대처럼 모여들었어요.
그런데 이것들을 용납한 것 때문에, 순수한 것을 잃은 거 하나 때문에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진멸해 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심각하게 오늘 이 말씀을 들어야 되요.
사람 많이 모인다고.. 큰 교회라고..
한국교회가 지금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고
얼마나 많은 선교헌금들을 하고 있으며, 우리가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습니까?
그런데요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너무 심각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교회는, 주님의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두 번째로 오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의인을 부르러 오세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되요.
초림 예수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것이 은혜다. 사랑이다. 구원이요, 용서다.
그것만 계속 바라보면서, 거기에 우리가 너무나 세뇌되어 있습니다.
아니에요. 거룩하게 살아야 되요.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모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정결한 신부로 정결한 하나님의 신도로 구별 될 때, 우리를 이곳에 세워주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과 짝하고, 세상 것 그대로 교회에 들어오고
세상의 오염이 그대로 들어와 가지고,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정말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되요.
아니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순수함을 지켜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아니면,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고
정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에
발버둥 치면서 의롭게 살기위해서 발버둥 치면서
우리가 주님이 오실 때 죄짓다가 주님 앞에 설수 없잖아요.
아직도 세상에 관심과, 세상 것을 구하면서, 세상의 온통 그것만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맞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정말 이제 말세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정말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정말 여러분 믿으십니까?
여러분 제자리에서 일어나야 되요.
정말 회개하고, 주님 정말 주님 오시는데,
저희가 순수하게 주님을 맞아들이길 원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 몸에 흠이 없는가, 내 언어에 나의 생각에 흠이 없는가?
그래서 제자리이면 우리는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우리가
정말 그렇게 신실한 성도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세움을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중세 교회의 예 : 하이라이트
▲중세시대를 우리는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가 중세시대의 암흑시대와 너무너무 흡사합니다.
중세 이전에, 기독교가 그동안 너무나 박해를 받았어요.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이 되고
유럽 온 지방에는 전부 교회가 세워집니다.
엄청난 돈과 그 유럽에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대 부흥을 맞이하게 됩니다.
얼마나 큰 부흥을 맞이했는지 몰라요. 여러분 성경을 한번 보겠습니다.
19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이 처음보다 더 많도다.’
아니 이러면 된 거 아니에요? 아니 이정도면 됐지요.
사랑도 있고, 믿음도 있고, 봉사도 있고, 참 믿음, 참 행위도 있고, 인내도 있고,
어제보다 오늘의 신앙이 더욱 부흥하고 발전하는 이 놀라운 일들 얼마나 좋습니까!
▲여기서 보면 말이에요, 화려했던 중세 문화를 보면,
지금 베드로 사원, 바티칸 그 궁전들 뿐만 아니라
유럽에 그 으리으리한 교회들이 다 이 중세시대에 세운 성당들입니다.
넓은 땅에 엄청난 성전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큰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도 짓고, 고아원도 세우고, 정말 놀라운 일들을 했어요.
그런데요 이세벨을 용납합니다. 이세벨이 뭡니까?
20절에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타락했던 중세 문화를 보면요, 성상들을 만들어 냅니다.
베드로 우상을 만들어놓고 예배 드리기 전에 베드로 발에다가
입맞춤으로 경의를 표하면서 그 우상 앞에서 기도를 해요. 성상 우상숭배를 합니다.
또한 마리아 상을 만들어 놓고, 예수에게 기도해야 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데,
마리아 앞에 촛불 켜놓고 빌고, 기도하는 우상숭배를 합니다.
즉 우상과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그 일이.. 중세에 벌어졌습니다.
▲21절에 보면요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아니 어떻게 우상을 만들어 놓고 아니 어떻게 동상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 거기서 기도를 하느냐,
십계명에 1계명 2계명에 나와 있는 우상을 만들지 말고 경배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러분 로마 가톨릭의 십계명을 보셨습니까?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빼버렸어요.
그렇게 십계명까지 변경해 가면서 그들이 동상을 만들고, 마리아 상을 만들고,
성 어거스틴이며, 성 베드로며, 성 바울이며,
아니 바울이 그걸 보면요 정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거에요.
자기 동상을 만들어 놓고 기도를 하니
아니 바울 같은 사람이 가슴을 치고 있을 거에요.
‘이런 미련한 놈이 다 있나, 내가 무슨 신이라고 내 앞에서 기도를 해?’
아니 정말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분노를 표출 하세요.
너희들이 암만 으리으리한 성전을 짓고, 성당을 짓고,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고
산위에다 수도원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한테 음식을 배부하더라도
암만 그리하더라도 거기에 우상성배가 있어. 우상 제물을 먹게 해?
▲너무 아름다운 부인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요리도 잘해, 애도 잘 낳아줘.
그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돈도 잘 버는 능력도 있고, 서비스도 만점이고,
그런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귄다? 바람을 핀다? 그러면 그 남자는 못 견뎌요.
그런 여자라면 당장 이혼하고 당장 보따리 싸서 쫓아 보내죠.
두아디라 교회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를 자녀삼아주신 그분만을 구원하고 따라야 되는데
세상 것을 따른다? 다른 남자를 따른다?
그러면요 예수님이 오늘 본문 말씀대로 회개하라고 기회를 줘요. :21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침상에 던지고
그 자녀들을 죽여 버리고, 그리고 큰 환란가운데 넘겨버립니다. 무섭죠?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신부에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던지
얼마나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던지, 내가 얼마나 많은 미모를 능력을 재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모두 헛것이 됩니다.
그만큼 교회는 순수함이 중요한 거에요.
신랑 되신 예수님만 바라봐야지, 신랑 되신 예수님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 라는 고백가운데 예수님만을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이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 자리에 목사가 들어서가지고 대접 다 받고
목사가 통치하고 예수님이 해야 할 그 자리에 목사가 앉아가지고 다 주무르고
통치하는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아니하는 우리가 정말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 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아니 회개를 기회를 주면요 회개해야지..
여기서 우리에게 준 너무너무 귀한 교훈이 있어요.
꼭 깨달아야할 것이 무엇이냐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줘요>
그런데 회개에는 내 몫입니다.
하나님이 내안에 들어와서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서 강권적인 역사로
내 죄를 깨닫고 내 죄를 본다고 하는데요..
천만에요! 성경에 보면, 회개의 기회는 주님이 주세요.
그러나 회개는 내 몫입니다.
그것까지 하나님이 하신다는 식으로 칼빈주의를 들이대면 안 됩니다.
이 회개할 기회를 줬는데 회개치 않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이 회개치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하는 거에요.
회개까지도 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넘겨버리면
지옥 갈사람 천국갈사람 다 정해져 있다면
하나님이 심판 하시면 이거 언어도단이지요.
▲성경에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회개의 기회는 하나님이 주세요.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나의 몫입니다.
이 회개 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나에게 의지 선택권을 주었어요. 회개할 것이냐/ 말 것이냐.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생명의 길이 있고, 멸망의 길이 있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결코 생명의 길을 예비하고, 거기로 보내는 사람이 예정되어 있고
지옥 갈 사람을 예정했다는 것은 비 성경적인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회개의 기회를 주세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회개하라고 성경에 써 주셨어요.
▲여러분 ‘아 주의 두려움이여!’ 오늘 설교의 제목이 그것입니다.
저가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회개해야 되고, 여러분도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죄인이에요.
정말 이 말씀을 듣고,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하면서 주 앞에 고꾸라지고 회개하는
그러한 은혜가 그런 축복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22절에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회개하면 축복이고 회개 안하면 환난 가운데에 던져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실제적으로 이 중세 로마 가톨릭은 성상을 만들고 마리아 성상을 경배하면서
십계명까지도 변경시켜 버리고 그들은 지금도 우상을 섬깁니다. 아시죠?
한국에 가톨릭이 들어와서 제사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가톨릭에서 제사를 허용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세벨을 용납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세의 그대들에게 엄청난 심판을 실제적으로 행한 것을
여러분에게 기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22절에 보면 ‘그를 침상에 던진다’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이 말씀대로, 중세시대에 그들 2500만 유럽의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죽습니다.
유럽 전 인구의 1/3이 떼죽음을 합니다.
영국과 같은 나라는요 인구의 반이 죽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하는데 엄청난 숫자가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성당을 짓고 하나님을 믿었지만,
단지 하나 우상을 만든 것 하나 때문에 하나님이 쓸어 버린거에요, 아시겠어요?
2500만명, 그당시에 유럽의 1/3의 인구가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22절에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큰 환난이라고 나와 있어요.
여러분 중세 암흑시대, 그토록 성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대신할 우상을 섬기고, 마리아여 복을 주소서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그리고 고해를 하고 면죄부를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에게 돈주고 팔아먹고 하는 등
최악의 종교의 비즈니스를 하고 있던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줬어요.
바로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세요?
흑사병blackdeath으로 침상(침대)에서 인구 1/3을 죽이면서 2500만명이 떼죽음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아요. 그래서 두 번째 큰 환난을 던져줍니다.
13세기 때 칭기즈칸 몽골이 유럽을 점령해 들어와서
유럽의 인구를 1/3을 쓸어버립니다. 역사적인 기록이에요.
(흑사병과 칭기즈칸의 침공 연대는 서로 겹칠 수도 있습니다.)
그 몽골의 말 타는 기마민족들이 많이도 안 데리고 왔어요. 딱 10만 명 왔어요.
그런데 그 10만 명 가지고, 동유럽에 그 모든 성전문을 다 깨뜨려 버리고
오죽했으면 이 교황까지도 도망갔을까요.
이 몽골은요 ‘항복해라 내일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이 성을 불 질러 버리겠다.’
그래놓고 씨를 말려버립니다. 몽골이 그런 전략으로 유럽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제국은 바로 이 칭기즈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방에 있는 한 민족을 통해서 막대기로 유럽을 때린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았어요.
▲마지막 재앙입니다. 어린아이를 죽이는 거에요. 23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여기서 보면요 사망으로 자식을 죽인다니요?
저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황이 꾀를 낸 거에요.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십자군 운동을 일으킵니다.
예루살렘이 터키 모슬렘들이 잡고 있는데
이 예루살렘을 우리가 탈환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군대를 일으킵니다.
십자군들이 군인들이 정예부대가 각 국가에서 차출한 정예부대가
예루살렘을 뺏기 위해서 함락을 하기위해서 공격을 합니다.
1차 2차 3차 4차 5차 6차 원정 등 대부분 다 실패를 해요.
나중에는 보니깐 유럽이 단합해가지고 그 쪼그만 터키(투르크)국가 하나
그 예루살렘을 갖고 있는 그 쪼그만 나라를 함락을 못 시킨다는 것이 자존심의 문제잖아나요.
정예부대가 온 유럽의 장정들이 함께 합세해서 함락을 시키려고 공격을 하는데
못 뺏는 거에요.
못 뺏은 이유는, 이방인들의 때가 끝날 때 까지 못 뺏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말씀인데 그것을 거역하니 뺏을 수 있나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것 봐라, 우리가 이렇게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온 유럽을 동원해가지고 공격을 하는데도 왜 성을 하나 못 뺏을까?’
그러면서 ‘이거 우리가 군인들이 너무 타락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러면 우리 군인이 아닌 농부를 한번 보내보자.
그래서 목동들이 농사짓는 사람들이 마지막 6차는 그런 평민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는 군병같으니’ 하고 행진하고
곡괭이 들고 낫들고 창칼을 무장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들고 전진해 간 거에요.
갔다가 완전히 몰살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한 목동의 아이가 환상을 하나를 봐요.
(여러분, 환상보는 거 조심하셔야 되요. 꿈꾸는 것 조심하셔야 되요)
예수님이 나타나서, ‘너희들 십자군이 왜 계속 망하는 것인줄 아냐?
죄가 많아서 그렇단다. 죄가 없는 어린아이들을 모아서 어린아이 들이 가게 되면
그 성은 여리고성 무너지듯이 무너뜨릴 것이다.’
이런 환상을 본 아이가, 신문 쓰는 사람(신부)에게 찾아가서
‘내가 양치다가 이런 계시를 보고 환상을 봤는데
정말 어린아이들이 가면 뺏을 수 있데요.’
그러니깐 이 신부가 나서가지고 어린아이를 모으기 시작한 거에요.
유럽에서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어요.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시작해가지고
언니오빠 등에 업혀가지고 아이들이 온 거에요.
왜냐하면 이러한 순수한 아이들이 진군해 가면은
여리고성 함락시키듯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할 수 있다고
순수한 믿음으로 어린아이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십자가를 들고
그 애들은 무기도 안 가져 갔습니다. 십자가를 들고 전진해 갔는데
예루살렘 성에서 이교들이 보니까,
아이들이 어정어정 걸어오는 것을 보니깐, 여러분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그 아이들을 다 사로잡아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반항하는 아이들은 죽이기도 하며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사망으로 어린아이들을 죽이리라’ 이 말씀이 이루어 졌습니다. 2:23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큰 경각심을 받아야 되요.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세요. 그 이야기가 23절에 나와요.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여러분 지금 중세시대에 일어났던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흑사병으로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몽골의 칭기즈칸이 쳐들어와서 또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십자군을 동원해가지고 그 예루살렘을 뺏겟다고 나섰다가
거기서 또 남자들 장정들이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어린아이 까지 나섰다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교회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이 일을 행했다는 거에요.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23
이 말씀이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라고 얘기해요.
이것이 하나의 모두 중세시대에 있었던 그 하나의 모형이 아니고
이 모든 교훈은 모든 교회가 들어야 한다는 거에요.
모든 교회가 다 간증을 가지고
이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이 말씀을 받으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 설교가 ‘아 죄의 무서움이여!’ 라고 잡은 것은,
바로 이 본문 말씀에서 제가 도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23절에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니라!’
여러분 이 본문 말씀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울어야 돼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아세요?
▲18절에 소개를 보시면,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의 눈이 불꽃같고 불꽃같은 눈으로 눈이 새파랗게 살아계셔서
여러분이 죄를 짓고 범죄하고 여러분이 우상숭배하고
여러분이 이 세상을 따라가는 것을 눈이 시퍼래갔고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생각과 우리의 뜻 가지도 다 아십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 사람들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본데요.
우리의 생각을 꿰뚫어 본데요.
그런 주님 앞에 그런 하나님의 인자하심 앞에 우리가 무엇을 숨길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세벨을 용납하고 음행을 했다고 하자나요.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눈이 시퍼래가지고(불꽃같이) 떠있는 주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 알고 계시는데
내가 여자하고 잠자리하고 있고 깜깜한 밤 은밀하게 아주
그러나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게 재미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요?
하나님이 인지하셔서 ‘이놈!’ 하고 있는데 그것이 재미있어요?
재미있는 사람은 하세요. 여러분 하나님 두려워서 그런 짓 못해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되요.
▲여기에 십자가가 있지요. 오늘날 신자들이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사탕발린 얘기만 해요.
그러나 동전의 양면이 있습니다.
한쪽 면은 물론 사랑 은혜지요.
그러나 동전의 뒷면을 보면 독생자의 죽음이 있습니다. 피를 흘려야 했었습니다.
엄청난 희생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왜 그것은 얘기를 안 하나요?
왜 앞에 싸구려 구원만 그 은혜만 값비싼 은혜만 얘기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다. 죄인들을 오라 그런다. 우리를 오라신다.
창녀도 구원해주시고 죄인도 구원해주시고 정말 죄인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
그것은 초림이지요 그것은 초림입니다.
그러나 재림은 안 그렇습니다. 재림은요 하나님은요 공의의 하나님이에요.
심판자이십니다. 그의 발은 빛나는 주석같다고 얘기합니다.
이 발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아세요? 구약성경에 보면 다스림을 얘기합니다.
통치를 얘기합니다. 이 발로 이방을 짓밞으리라. 이 발이 심판의 발입니다.
▲여러분 18절에 보면 불꽃같은 눈이라고 얘기해요.
그리고 예수님의 발을 부각시키는데 빛나는 주석이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빛난 주석을 볼 수 있어야 되요. 예수님의 그 발을 보아야 되요.
내가 까불고 말 안듣고 불순종하면 짓밞아 버려요. 공의의 하나님을 알아야 되요.
심판자로 오신 주님을 알아야 되요.
어디까지나 그냥 겉에 사탕발린 말 은혜다. 사랑이다. 용서해준다.
누구든지 오라 그것은 한쪽면만 본거에요.
뒷면을 보면요, 거기에는 누군가가 나의 죄를 위해 죽어야 되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희생이 있어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죽음이 있다는 거에요.
이 본문 말씀 23절 마지막에 뭐라고 얘기합니까?
‘모든 교회는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감찰하는 자임을 알지니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을 알아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숨을 데가 없어요.
하나님의 인자 앞에서 하늘에 올라가도 계시고 땅에 숨어도 있고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 앞에 우리는 도망갈 수 없어요.
정말 불꽃같은 눈으로 하나님이 나를 지켜본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죄를 지어요?
어떻게 죄와 타협을 하냐고요, 어떻게 돈을 따라가요?
어떻게 우리가 범죄하고 또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그렇게 살수 있냐고요?
▲여러분 최근에 나온 기사를 봤는데요.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깜작 놀랐어요.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을 비교 했습니다. 그런데요 한국사람이 일본사람들 보다
430배 위증이 거짓말이 많다는 거에요. 430배.
그리고 한국 사람이 일본사람들 보다 540배 무고죄로 사람을 험담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거짓말 하고 살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요
거짓말 안하고 살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살아야 되요?
그 무신론자 일본보다도 기독교가 미친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죄와 거짓말 속에서 범벅이 되어 살수 있냐고요? 회개 해야되요.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본다면 내가 어떻게 범죄를 할수 있냐고요?
▲어떻게 주님을 두려워서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23절의 마지막입니다.
‘내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여러분이 죄 지은 것에 대해서 꼭 물으셔야 되요.
여러분이 범죄한 것에 대해 꼭 찾아서 갚아야 되요.
요즘 교회에서 이런 얘기해요?
싸구려 부흥만 얘기하지 그런데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에요.
저가 다윗의 얘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다윗이요 성문을 걷다가 달밤에 목욕하고 있는 우리야의 아내를 보게 됩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유혹을 받아요.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자기가 목동이었을 때, 하나님의 기름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그 사울왕을 피해 도망을 통해서, 정말 광야 생활을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편의 절반을 그가 썼습니다.
그러던 그가 한순간에 무너졌어요. 밧세바와 동침을 했어요.
밧세바와 동침을 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물으셨는데 세 아들이 죽습니다.
밧세바와 동침해서 나은 한 살배기, 이름도 안 지어진 아이가 죽어요.
암놈이라고 하는 아들이 죽습니다. 그리고 압살롬도 죽어요.
다윗이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가 죽었어야 되는데
네가 죽어야할 그 자리에 내가 죽었어야 되는데..’
여러분 저는 아직까지 저의 자녀의 죽음을 못 봤어요.
그런데 제가 범죄하면 제 자녀를 죽이신답니다. 그런데도 범죄하겠어요?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되요.
저도 죄를 지으려고하다가 내 아들을 데려가시면 어떻해?
자녀가 죽는 것은 사실 애비가 죽는 것보다 더 아픔이에요.
내가 죽으면 더 좋지, 차라리 내가 죽으면 좋죠.
차라리 내가 죽고 내 아들은 살려 주십시오.
이 다윗이 그렇게 부르짖잖아요; ‘압살롬아, 압살롬아! ...’
정말 아들이 죽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하룻밤의 향락이 내 세 아들을 죽였구나.
여러분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아 죄의 두려움이여, 죄의 무서움이여’
▲그런데요 성경에서는요,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죽었어요.
그분이 죽었어요. 정말 하나님도 얼마나 더 애절하셨을까요!
차라리 내(아버지)가 죽는 것이 나은데, 독생자께서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데도 여러분 죄짓고 싶으세요?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또 예수님을 못 박겠냐구요!
또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이겠냐고요!
저는 못하겠어요. 내 아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아픈 하나님 아들이 죽었는데요!
▲오늘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 나를 위하여 죽어주신 주님 십자가에 오르실 때는
나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발에 못이 박히고 양손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오르셨던 그 발.. 그것은 초림 예수님의 발이였습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발은 빛난 주석이라고 얘기해요.
이것은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발이에요.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오시는 발이에요.
우리가 그 주님 앞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 내가 주님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나를 구원해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가 또 죄를 지어요?
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용서해주겠지.. 하면서 또 넘어져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요
큰 희생을 안사람은요,
동면의 양면처럼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를 받아주신 그 부분을 안 사람은요
그 뒤에 있는 희생을 봐요. 어떤 희생을 치르고 나를 구원해 주셨는지
정말 어떤 죽음을 통하여 나를 구원해 주셨는지
주님 내 범죄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 독생자 예수를 죽였나이다.
이 본문 말씀에 우리가 함께 도전을 받습니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에 행위대로 갚으리라’
오늘 주님이 헛말 하고 계실까요? 역사적으로 실제로 했어요.
중세 로마 가톨릭 시대에 흑사병으로 1/3을 죽였어요.
칭기즈칸을 통해서 1/3을 죽였어요.
어린아이들 죄없는 어린아이들 까지 십자군 6차 이후부터 7차 8차는
어린아이만 갔어요. 그 어린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죄가 무섭습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야 돼요.
예수님까지 죽였습니다. 아니 내가 범죄하면 내 자녀까지 죽이신대요..
그런데도 범죄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 일어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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