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회복 눅8:26~39 2012-03-04 설교스크랩
▶예수님의 말씀만을 보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처럼 급진적인 분이 없습니다.
섣불리 ‘나는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렵습니다. 이해하기만 어려운 게 아니고, 실천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은,
어쩌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에 평강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번민을 얻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중의 일반적인 염려와 관심사에 대해서
예수님은 일괄적으로 부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너희가 왜 이방인처럼 염려하느냐?’,
예수님은 직장이라든가 돈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자녀라든가 진로라든가
사업이라든가 심지어 정치 문제에 대해서 이런 주제에 대해서
거의 말씀하신 적이 없고, 관심을 아예 갖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찾아가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을 꺼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독신으로 사셨고, 무소유로 사셨고, 자녀를 두지 않았고 직업이 없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일반인들의 관심사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보살집이라든가 점보는 집에 가면 대문에 써 붙인 제목들이 있지 않습니까.
작명, 운수, 결혼, 재물..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일들입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이러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목사님, 그게 다입니까? 너무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것은 설교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만 봐서는 안 되고 두 가지를 더 봐야 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표적을 봐야 되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삶을 봐야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삶을 보도록 하십시다. 예수님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고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은
잘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낮추어서 십자가에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를 따르려거든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된다고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붙잡히셔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때
예수님의 제자나 추종자 중에 어느 누구도 같이 붙잡힌다거나
같이 수난을 당하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았으니 이 사람들은 놓아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나 가족이나 모친 마리아나 동생이나 막달라 마리아나
어떤 사람들 중에도 함께 화를 당하거나 함께 수난을 당하지 않고
그들은 모두 살아남았고 모두 무사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나중에 거의 다 순교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같이 고난을 당해야 되리라고 말씀하신 분에 비교했을 때
굉장히 너그러우신 것이었습니다. 옛날 고대시대에는 임금이 죽으면
아내와 신하들도 같이 묻었지요. 혼자 가기 서럽기 때문에.
히틀러가 자살할 때 자기 아내 에바 브라운도 같이 자살했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히틀러는 자기의 몰락할 때, 독일 전체가 같이 몰락하기를 원했습니다.
많은 이단 교주들은 자기가 죽을 때 추종자들이 같이 따라 죽을 것을 요구합니다.
짐 존스가 죽을 때 존스타운의 신도 수백 명이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 장희빈을 보면
우리는 살아도 같이 죽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요.
오늘날도 어머니 중에 자식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어머니가 죽을 때 아이들도 같이 자살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이처럼 세상 사람들 중에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자기와 운명을 같이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실 때 어느 누구도 따라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나를 찾았으니 이 사람들은 가게 하라’고 제자들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가족, 제자, 추종자 모두 안전했습니다.
가룟 유다만 빼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엄격함만을 보고
예수님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엄격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아주 너그러웠습니다.
거룩함을 요구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만을 보고 예수님을 판단할 수 없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봐야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표적을 봐야 됩니다.
예수님의 표적이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신 것을 말합니다.
석가모니나 모하멧이나 공자 같은 인물은 병자를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석가모니에게 병자를 고쳐주는 것은 그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목적은 인생을 번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인데
병자를 고치려고 한다는 것은 병에서 낫고자 하는 또 하나의 번민을 더해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병을 차라리 그냥 받아들일지언정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교적인 사상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민중의 일반적인 염려나 관심사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실 때는 지나치지 않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을 주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돈 문제, 자녀 문제, 미래 문제, 먹는 문제,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
이런 인간의 염려에 대하여는 이건 이방인들이나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가 왜 염려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셨을 때는
예수님이 먼저 가서 그들을 고쳐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애착,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인간을 회복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도,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신 다음에
그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고 했습니다.
38절에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는데, 예수께서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그를 집으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이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였느냐면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일으켜주신 다음에는 그 아들을 어미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신 다음에는 아비에게 도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다음에는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여기에 하나의 패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때로는 집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소유도 버리고 이와 같은 헌신을 요구하실 때가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켜주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얼마나 슬픕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서 어머니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아들을 그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돌려주었어요.
예수님이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본문에 나온 귀신 들린 사람도 귀신을 쫓아낸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도 남편이고 아버지고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들려 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역할도 할 수 없고
아버지의 역할, 아들의 역할을 할 수 없는데
예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신 다음에 아내에게 돌려보내고
자녀에게, 부모에게 돌려보낸 것입니다.
그의 원래 삶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을 부모에게 돌려보내고 남편을 아내에게 돌려보내고
아버지를 가족에게 돌려보내고
모르긴 몰라도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을 낫게 하실 때에는
그 여인이 남편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하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인생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깊은 애정, 사람들 고치고자 하는, 회복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고쳐주었으니 이제부터 너는 내 것이다. 나를 따르라.
내 말을 들어야 된다.’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아팠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던, 할 수 없었던, 잃어버렸던,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다시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한문에서 좋다는 뜻을 가진 좋을 好자는
엄마와 자식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의 원래 가정의 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것은 어떻게 됐다는 것이냐.
그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회복된 이후에 얼마든지 기회가 있습니다.
준비가 된 사람을 위한, 그런 마음의 준비와 소원이 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후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당신의 제자가 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귀신 들린 사람이 나은 다음에 함께 있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먼저 집으로 가서 거기서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고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너로 인하여 기쁨을 얻고
너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고
너로 인하여 위로를 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은 좋은 마음이지만
그러나 이후에 하나님이 그런 기회를 주실 수 있겠지만
먼저 너는 네가 속한 집으로 돌아가
그동안 하지 못했던 남편의 역할, 아들의 역할, 아버지 역할을 하라.
그래서 네가 원래 하고 싶었고 해야 했지만
이 병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을 마저 하라.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고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고치신 후에 어떠한 결과를 얻기 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병든 인간, 무너진 인생, 망가진 삶, 잃어버린 꿈, 잃어버린 기쁨, 잃어버린 행복,
이것을 예수님은 좋은 것으로 보지 않으셨어요.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발생한 질고, 아픔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것이 삶의 현장에 그 위력을 실감하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요구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무리한 요구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엄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감당할만한 것 이외에 그에게 임한 것이 없다고 하셨고
사람이 시험을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그것을 넉넉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언뜻 들으면, 엄하고 어렵게 들리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행적을 함께 보아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께서 얼마나 인간을 이해하시고 위하시고 사랑하셨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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