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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노예 John MacArthur 3870

LNCK 2012. 11. 7. 10:54

◈주인과 노예           눅6:46, 요15:14,      


존 맥아더 목사님의 설교 대강 번역, 출처보기



◑서론 : 오늘날 기독교가 약화된 원인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무자비한 핍박을 받은 주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황제는 주Lord다’라고 말하며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세시대에 존 후스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당시 중세를 지배하던 교권으로부터 무자비하게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화형까지 당한 것은..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의 핍박과 비슷하지요)


초대교회 때나, 중세교회 때나,

저들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그것을 부인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자비한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는 순교까지 했던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또 다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미국인의 대다수는, 자기를 크리스천으로 여깁니다. 이민자 제외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당신에게 어떤 점을 의미합니까?’

‘네 그것은, 제 죄가 용서 받았고, 제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미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릭 워렌의 질문에 존 맥케인 후보가 대답한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 신자들이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와 비슷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관념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런 관념이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에게 누군가 ‘당신의 크리스천 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Jesus is Lord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시다’라는 표현보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다’ 라는 표현이 훨씬 더 빈번하게 나오고,

또한 더 강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매일을 살아갈 때,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나는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종이다’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나는 용서 받았고,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시다’라는 사실만 염두에 두고 살아갈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고, 지금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사실은, 강단에서, 또한 목회자들도 꼭 유념해야할 신학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칫 자기가 교회의 머리요,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되면, 그건 불행한 일입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날 우리가 잘 쓰는 표현은 ‘예수는 나의 개인적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personal Savior


(아마 집단/단체적 구원이 아니라, 개인적 인격적 만남과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personal Savior 라는 말을 널리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구세주로서만,

어쩌면 모호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 실생활에는, 예수님이 아무 상관이 없으십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이 모양이 된 것이, 저는 ‘구세주 신학’ 때문이라고 봅니다.


좀 심하게 말씀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personal relationship


저는 ‘개인적 관계’라는 표현보다,

‘주님과 종의 관계’라는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개인적 관계’라는 말을, 오해하면,

마귀도 주님과 ‘개인적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개인적 관계’라는 말이,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것을 뜻하니까요.


성경에, 예수님이 오실 때, 마귀가 예수님께 다가와 ‘우리를 멸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한 것도 ‘개인적 관계’가 아닙니까?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났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살았던 죄인들, 또한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죄인들도

다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다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서도 ‘개인적 관계’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이 얼마든지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고, 그 분과 ‘개인적 관계’는 갖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자기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멋대로 살고, 주님께 계속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주님과 개인적 관계’가 있으므로,

그런 제 멋대로의 삶을, 별로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개인적 관계’라는 말을 쓸 때,

원래는 그게 ‘주님과 개인적 친밀한 교제 관계를 가지라’는 것을 뜻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개인의 소원(야망)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이 응답해 주시는’

그런 개인 기복적 신앙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주장은 ‘개인적 관계’라는 모호한 표현은, 이제 그만 말하고,

대신에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주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오늘날 우리가 강력히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예수는 ‘주님’이시다.


다른 말로, 예수는 왕, 통치자, 나와 주님과는 ‘주인-종’의 관계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네 개인적 소원을 아뢰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볼 때,

‘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모든 것을 바치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과격한 요구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Lord으로 나를 섬겨라’는 것입니다.

‘너는 철저히 종이다’라는 것입니다.

‘네 삶에, 네 개인적 주권은 없고, 오직 내가 주로서, 너를 주권적으로 주관한다’입니다. 

(주님과 개인적 관계를 강조하다 보면, 이런 면들이 희석되는 것입니다.)


요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라고 하시면서,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고 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의 권위가 손상되거나, 희석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더 높아지지요.


요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제가 친구가 여럿 있는데, ‘내가 명령하는 대로 너희가 다 그대로 행하면,

너희는 곧 내 친구다’라고 말한다면, 친구들이 다 멀리 도망 가버릴 것입니다.

이런 것은 친구관계가 아니고, 독재 군주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구절에서 배우는 점은,

‘예수님과 친구관계는, 보통 사람들 사이의 친구관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친구관계는

철저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고 나를 주님의 종slave으로 여기고

그래서 주님이 명하시는 것을 철저히 순종할 때.. 비로소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관계가 되려면,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 말씀을 꼭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명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과 친구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주’는 헬라어로 퀴리오스입니다.

그 의미는 힘과, 소유권과, 명령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power, ownership, absolute right to command

신약성경에 7백회 이상 나옵니다. 신약의 모든 성경에 굉장히 빈번히 나옵니다.


이 ‘주’와 비슷한 말이 또 있는데, ‘주재’라는 말입니다.

유다서4절,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주재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인데,

영어로는, Master 또는 Sovereign 으로 번역했습니다. 한글로는 주재.

‘주재’라는 말은, 완전히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를 뜻합니다.

이 단어가 쓰인 용례는 오른쪽을 클릭해서 보십시오. ☞클릭


어쨌든 퀴리오스 또는 데스포테스 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는 주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위엄 있으시고, 다스리시고, 모든 주권을 가지신 엄위로우신 분으로서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지금 약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기독교 신앙의 침체와 약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에 보면

‘주’라는 말은, 92회나 나오는데              *Lord, 퀴리오스

‘구세주’라는 말은 단 2회만 나옵니다.  *Savior, 쏘테르

행5:31, 13:23에만 2번 나옵니다.


92회와 2회는 무려 46배 차이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은 주시다’는 사실을 주로 강조했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는 사실을 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46배나 더 강조된 내용은, 거의 잊어버리고,

‘죄에서 구원자’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 삶에 ‘자기가 주재’가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는 믿고 따르지만, ‘주님 예수’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나의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고 따라야 하지만,

만약 하나만 말할 때는 ‘예수는 나의 주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는 나의 구세주’라고 말하기보다)

그래서 예수 믿음이란, 그 주님께 나의 모든 주권과 통치를 다 맡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발 교회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십시다.

오늘날의 교회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평소에 ‘예수는 구세주’라는 신앙만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2.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주님’(퀴리오스)일 때, 그와 상응해서 우리는 ‘종’(둘로스)이 됩니다.


눅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유를, ‘성경 번역상의 문제’가, 그 큰 이유라고 여깁니다.


‘둘로스’는 .. ‘노예’입니다. 영어로 slave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설교자에 의하면

그런데 영어성경은 이 말을 보통 servant 라고 번역합니다.


종servant은.. 주인과 의논이 가능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고용인입니다.

그런데 노예slave는 .. 주인의 소유입니다. 소나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둘로스 라는 말은, servant가 아니라, slave입니다.

그래서 둘로스를 ‘종’으로 번역하지 말고, ‘노예’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은, 이 둘로스 라는 단어를, 거의 다 servan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개념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성도를 ‘둘로스’라고 무려 130회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빈번히 기록한 것은, 성도는 반드시 ‘둘로스’가 맞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노예(둘로스)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둘로스’를 slave로 계속 일관적으로 번역한 영어성경은

20개 번역판 중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단 1개 성경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영어성경은 노예(둘로스)를

servant로 번역하니까,

우리가 이 개념을 좀 혼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servant라는 단어의 어감은, 그래도 인격적 사람대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로스(노예)에게는, 인격적 대접이란 없습니다.

퀴리오스(주인)에게, 오직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설교자의 주장은 맞습니다만, 각론으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주인-노예 관계는, 항상 같이 갑니다.

자기 소유인 노예가 없는 주는.. 주가 아니며,

자기가 섬길 주가 없는 노예도.. 노예가 아닙니다.


노예는 반드시 자기를 재산처럼 소유하고 있는, 주가 있으며,

그 주는 두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노예는 반드시 한 사람에게만 속합니다.


노예(둘로스)에게는, 법적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주인의 소유물일 뿐입니다.

자기 뜻이란, 애당초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자기의 잘/잘못에 따라서, 주인에게 상이나 벌을 받을 뿐입니다.


어쩌면 초신자는, ‘우리가 주님의 노예이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날같이 민주주의 사회에 ‘누구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은,

끔찍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만약 servant이라면, 주인과 상의하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slave(노예)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종과 노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성경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노예’라고 가르치는데,

영어성경 번역이 잘못되어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과 노예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다가,

마치 자기를 ‘종 servant’으로 생각합니다. 노예 slave가 아니라!

(그나마 그것이라도 다행인지 모르지만)


※그런데 종과 노예의 어감을.. 오늘날 우리가 똑같이 생각한다면,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어쨌든 설교자는, slave와 servant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헬라어 성경의 둘로스는 slave이지, servant가 아닌데,

영어성경은 대부분 servant로 번역하고 있어서, 그 의미가 약화되었다는 주장입니다.


한글에도 노예 사이의 어감의 차이가 똑같이 적용될 수 있겠습니다.


마6:24에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사람’이란, <노예>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뒤따라 나오는 ‘주인’이 ‘퀴리오스’이니까요.


여러분, 한 노예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소 한 마리가 김서방네, 박서방네 두 집을 왔다갔다 하지 못합니다.


물론 오늘날 직장인들은,

투 잡을 뛸 때도 있고, 직장에도 상사가 여럿인 경우도 있지만,

과거에 ‘노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오직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둘로스’인 성도들의 정체성입니다.

노예에게는 한 주인,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우리의 주가 될 수 없습니다.

노예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노예로서, 한 주인을 섬기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 제자로서의 비용(cost)을 지불하고,

자기 자율권을 완전히 포기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축복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개념이 ‘예수는 나의 구세주’라는 개념입니다.


물론 그 말은 맞지만, 신약성경은, 그 개념보다는,

‘예수는 나의 주님, 나는 그 분의 노예’라는 개념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주님의 노예다’라는 개념을 갖고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나는 주님의 노예다’라는 개념을 갖고 있으면,

성경의 대부분 중요 사상이 다 쉽게 이해됩니다.


우리가 만세전에 ‘선택된 자’라면, 그것은 ‘노예로서 선택된 것’입니다.

우리가 ‘값을 치르고 산 자’ 라면, 그것은 ‘노예로서 구매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라면,

(성경에 이렇게 you are chosen, bought, called, owned 라는 표현이 종종 나오지요?)

그것은 ‘노예로서 소유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반대)개념도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은 지금 내용과는 다른 각도의, 다른 주제의 내용임.


물론 주님이 나를 노예로

선택하시고/값을 치러서 사시고/자신의 소유로 삼아주시고.. 하신 모든 것은,

내게 오히려 행복입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쓸 것과, 필요와, 사명과, 할 일을 다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풍성함을 따라서요. 빌4:19

주님이 그 노예들을 보호하시고, 훈육discipline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노예의 삶’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퍼뜩 보면,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우리를 속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직 그 안에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아실 것입니다.                        <주 되심 Loadship> 관련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