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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주목 말고, 성령님을 주목하시라 / 프란시스 챈

LNCK 2012. 11. 6. 11:21

www.youtube.com/watch?v=ZT_tMjbmfGY

◈자신을 주목 말고, 성령님을 주목하시라    행4:29~35       English       번역, 

프란시스 챈  Francis Chan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초대교회의 놀라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본문 행4:29~35절을 읽으면서,

이 초대교회의 상황을, 오늘날 21세기의 교회와 비교해 볼 때,

3가지 생각이 제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1.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예 근본적으로 그 가능성을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초대교회이고, 오늘날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결코 초대교회의 상황과 같을 수 없다고 여기면서,

이런 분문을 대할 때, 아예 지구 밖 이야기처럼 여기는 자세입니다.

 

2. <이것은 우리들의 교회가 바라는 상황입니다> 라고 여기는 자세입니다.

지금 우리는 심히 연약하지만, 그래서 감히 초대교회와 비교할 처지는 못 되지만,

우리도 성숙하면, 언젠가는 초대교회와 같이 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1번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부인입니다.

그러나 ‘부인’이라는 점에서는, 1번과 차이가 없습니다.

 

3. <이 모습은 잘 하면 우리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저는 본문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도 이 모습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2번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 예루살렘교회처럼 되어야 한다고 바른 생각은 갖고 있지만,

사실상 그 마음에,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면서,

또 신자로서의 마땅한 의무도 감당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가끔씩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도 하면서도,

 

본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래디컬하게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자기의 몸을 슬쩍 빼버립니다.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대다수는

‘오늘날 상황에서, 정말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가능하겠습니까?’

자기는 그것을 정말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가능하리라고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가 초대교회를 원치 않으니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실제로 자기가 초대교회를 원하면서도, 어떤 현실적인 패배주의로 인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다 2번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문화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2천년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우리가 꼭 빼 닮을 수는 없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꼭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 본질적인 성령의 역사는, 꼭 같다는 것입니다.

 

3번입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우리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꼭 같을 수 있으며,

그것을 우리가 소원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이 사도행전 4장을 읽으실 때,

‘이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상황은 아니야’ 하지 마시고,

‘이것은 아름다운 모습이긴 하지만, 오늘날에는 불가능해’ 라고도 하지 마시고,

‘오늘날 우리도 이런 모습의 교회를 가질 수 있어!’ 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히13:8

 

물론 이 말은,

성령님이 매 시대마다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더라도,

각 시대, 각 장소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신 방식(현상)은, 다양하게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 속 본질은, 똑같은 성령의 역사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똑같은 성령님이, 2천 년 전과 똑같이 역사하십니다.

다만, 그 현상은, 2천 년 전을 복사판처럼 꼭 그대로 재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성령님은, 오늘날의 상황은, 오늘날에 맞게,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오늘날 상황에 맞는 성령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은, 지금 21세기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고, 감소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오늘날 사도행전을 읽어볼 때,

어쩌면 도리어 사기가 꺾일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했는데, :31

오늘날 우리는 왜 이렇게 밋밋하지?’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여서 함께 기도하면, 땅이 진동했다고 했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모여서 기도하면, 왜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물론 본문에 보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한 것은,

‘복음을 전할 때, 담대함을 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인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제목은,

‘각자 자기 개인 기도제목’을 갖고 와서 함께 기도합니다.

재정문제라든지, 건강문제라든지요..

 

제 생각에는, 그런 원인이

우리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델’을 갖고 있지 않거나,

‘그건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불가능해’ 라고 여기는 선입견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니면, ‘우리 속 내면이, 그것을 근본적으로 원치 않거나’ 일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모여서,

‘주여,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담대하게 해 주옵소서.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라고 기도하면,

모인 곳이 진동하고,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겠습니까? :31

이렇게 초대 예루살렘 성도들은 ‘사명’에, 자기 신앙의 초점을 두고 살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가지는 의문은,

‘초대교회 모습이 옳다는 것은 알겠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다분히 부정적인 생각을, 우리가 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도 여러분과 비슷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며,

자기 가족중심적인 가치관이 상상을 초월하는 시대입니다.

 

다들 영적으로 축 늘어져 있는 영적 침체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성도들을 규합해서, 복음전파에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건 정말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각자는 ‘자기 생존’의 문제에도 급급한 형편입니다.

영적으로 자기 혼자 바로 서기도 힘들어서, 쩔쩔 매는 그러한 상황에서,

뭐 우리가 남들 상황을 돌아본다고요?

교회 지체들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고, 물질적 곤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초대교회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이.. 정말 21세기에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 우리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한다면.. 그건 가능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까.

정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아직도 썩어질 육체의 것들을 추구하며

계속 우리 삶을 낭비하며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시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12제자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적 관점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완벽한 세계 복음화 실현 계획을 수립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 미미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입혀졌을 때, 그들은 성령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몇몇 이웃들을 불러다 놓고,

여러분이 가정교회 사역을 시작한다고 칩시다.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 그거 장난 같은 일 아니냐?’라고

여러분을 보고, 코웃음 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고작 12명 제자들 데리고 다니시면서 하신 일..

그게 코웃음 칠 일처럼 보였겠지만, 정말 그게 코웃음 칠 일이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12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더 기가 막힙니다.

‘나는 너희들이 온 세상에, 땅 끝까지 이 메시지를 가지고 나가서,

내 제자를 삼고, 내 증인이 되라.’

 

그 당시는 온 세상을 접근할 만한 인터넷도 없던 시대입니다.

어떻게 무학인 일자무식한 제자들이, 온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그런 명령을 내리시는 예수님이, 제정신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만약에 12제자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안전하게 대안(플랜B)을 마련해 놓고서,

예수님이 큰 소리 치신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예수님이, 마치 큰 소리 치시듯이

그 시대에 뛰어나게 앞서가지도 않던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에게

당당하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던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그들 속에 내주하시겠으니,

너희들은 아무 염려 말고, 땅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성공이었습니다.

전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그 대업을,

그 부족한 제자들이, 결국 해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성령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현실을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12명이, 모여서 같이 기도하고,

땅 끝은 아니더라도, 우리 동네 근처의 12블럭 정도는,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그 일도 못 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도.. 냉소적입니다.

‘저렇게 해가지고, 뭐가 되겠나?’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아예 그런 ‘복음 전파적 삶’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철저히 1번2번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너무 깊이 쳐다보면서,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낮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설교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설득을 당하고, 그럼 그렇게 해야지.. 라고 하면서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 현실입니다.

 

여러분 중에 일부는, 크리스천이 된지 10년이나 지났습니다.

보니까 여기 앉으신 분들 중에, 대부분이 믿은 지 10년이 지나셨네요.

 

그런데 여러분은, 여전히 ‘아직 나는 준비되지 못했다 unequipped’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나는 배워야할 게 더 있다.. 라고 여깁니다.

 

여러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여러분은,

아마 2천년 전 제자들, 땅 끝까지 복음 전한 분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 더 공부해야지, 더 준비해야지..’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로, 여러분이 예수 믿은 것이 맞습니까?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시키신 것이 맞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자기 스스로를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습니다.

자기의 약점들을 쳐다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또 자기 약한 점을 쳐다봅니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나 자신을 쳐다보지 말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유능해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주목하고,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의지할 때,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역사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 성령님이, 오늘날의 성령님과 똑같습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령이 나타나는 현상은 달라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성령의 역사’라는 본질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일단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고.. 착수하십시오.

불가능해 보이는 일, 내가 감당하기에는 도저히 어려워 보이는 일도,

성령님이 여러분께 감동을 주시고, 마음에 자꾸 부담을 주신다면,

그 일을 향해 일단 발걸음을 떼십시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전도하면, 능력은 생긴다’고요.

가만히 있으면, 절대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능력을 쓸 데가 없으니까 안 주십니다.

 

그러나 일단 전도/사역/사명/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부담 주시는 그 일에

내가 투신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내 발자국을 떼기 시작하면,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 내 사역의 현장에서도,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