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서 일어난 사건 막7:24~30 출처보기
본문 막7:24~30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침 받는 사건입니다.
본문은 24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식사하셨다는 직접적 언급이 없지만,
식사를 하셨다는 정황은,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식탁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식탁에 담겨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막8장에서는
7개의 떡과 작은 생선 2-3마리로 사천명을 먹이시고
7광주리가 남게 하시는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 <7병2어의 기적>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기억나시죠?
본문 전에 나오는, <5병 2어의 기적>입니다. 막6:30-44
그러니까, 일부 신학자들은, 본문이
두 사건을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고 분석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의 사건을 그냥 얼핏 보면 엇비슷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5병 2어는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베풀어주신 기적이지만
7병 2어는 이방 땅에서 이방인들을 위하여 베풀어주신 기적입니다.
그 중간에 연결 역할을 본문이 하는데,
이방여인을 고쳐주시는 사건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은 ‘수로보니게 여인’ 사건은
두로, 시돈, 데가볼리의 지역인 이방 사람의 땅에서 벌어진 이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사람 취급은커녕 개 취급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방사람들에게 식탁의 축복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스라엘의 관습을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7병2어, 수로보니게 여인)에는 공통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모두 먹는 것, 식사의 축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먹는 자리에서 먹는 음식을 통하여
많은 기적과 위대한 기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7병2어의 기적도,
귀신들인 딸을 데리고 온 수로보니게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도
둘 다 식탁의 자리였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도
역시 음식을 통한 역사였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의 여동생들이 예수님만 오시면
최고의 것으로 대접했던 기적이 나온 후에 나사로를 살리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의 사건들을 열거하자면 하루 종일 해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기적을 많이 베풀어 주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위대한 교훈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는 것을 보세요.
씨앗을 먹습니다.
한 알의 해바라기 씨앗이 땅 속에 뿌려진 후에 떡잎이 나오고
대가 자라나고 넓은 잎사귀가 자라나고 커다란 해님 같은 얼굴 속에
깨소금 같은 알들이 알알이 박혀 있고 해를 따라서 움직이며
결국은 다시 자그마한 씨앗으로 자라나는 그 과정은 한마디로 신비입니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이것도 신비요 예술이죠.
음식의 재료들이 그 모습이 변하면서 요리가 되어지는 과정을 보면
이건 예술이라기보다 요술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식하고 아름다운 음식도 먹어야만 제 역할을 다하는 거죠.
그 음식들이 입 속에 들어가 보셔집니다.
모양이 이리 저리 갈기 갈기 찢겨나가면서 사람에게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것도
그래야만 사람이 살 수 있고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는 것은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리적 변화 → 화학적 변화 → 사람의 생존. 이거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온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는 중에 이 여인이 나타납니다.
사실 식사는 대화를 곁들이면서 식사를 해야 제 맛이 나지
옛날 우리나라처럼 아무소리도 못하게 하고 밥을 먹는다면 이거 소화가 안 되죠.
그래서 뭐 놓고는 밥 먹어도 미운 사람하고는, 같이 식사를 안 한다고 하죠.
왜냐하면 식사는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식사는 동질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나의 상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동질성의 의미를 가진 아주 중요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인이 주인과 식탁을 같이할 수 없었습니다.
옛날에 양반은 생선을 뒤집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생선을 뒤집으면 배가 뒤집힌다고 해서 생선을 뒤집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양반들이 생선을 뒤집어서 먹지 않은 이유는
양반이 먹고 난 다음에 하인들이 그 식탁을 물려 받아서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양반이 생선 앞과 뒤를 돌려가며 다 먹어 버리면
하인들이 먹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때 그 일이 생각나십니까?
옛날에는 식탁을 3개 차렸죠.
맨 아랫목 자리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장손이 앉고
윗목에는 유산을 별로 받을 수 없는 둘째, 셋째, 넷째 손자들이 앉고
세 번째 상에는 어머니
그리고 며느리들은 식탁을 차리지도 않고
부엌에서 바가지에다가 물 말아먹던 시절,
이것은 엄격하게 밥을 같이 먹는 다는 것은 사회적 동질성을 나타내주는 일이었습니다.
식사를 거부하는 것은, 곧 사회적 축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식탁에 수로보니게 여인이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식탁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방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수천명과 함께 말이죠.
또 죄인과 세리들과도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지역의 경계를 다 무너뜨리셨다는 것입니다.
인종의 경계선을 철거하신 것입니다.
남성, 여성의 경계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이방사람이니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을 텐데 종교의 경계도 넘으신 것이었습니다.
문화의 경계도 뛰어넘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를 기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집 개는 없고 오직 들개만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개는 ‘들개’를 상징하신 것인데
이방사람들은 집에서 개를 길렀습니다.
이방여인이 말한 개는 들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개’를 의미하였기에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의 '개'와, 여인이 말한 ‘개’라는 단어의 헬라어가 틀립니다.
그러나 단어는 틀리지만, 본질적으로 ‘모멸감’의 의미는 똑같다고 봅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먹는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과도 대화를 나누시는 문화의 경계를 넘으셨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예수님 안에서는 인종, 남성, 여성, 심지어 이방사람까지도 경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나뉘어질 수 없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17장에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이듯
너희들도 하나가 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말세는 뭐예요. 사람들이 서로 갈라지고 싸움하고 무자비해지는 것이 말세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지연, 학연, 혈연 하면서 사람을 가리는 것이 깨끗하게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쳐있는 그 흉한 철조망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이 식탁에서 예수님이 평소에 안하시던 행동을 보입니다.
그건 바로 여인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예수님의 이런 태도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왜요? 사람보고 개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니 이 모독을 당한 여인의 당돌한 태도는 더욱 놀랍습니다.
그 당시 이방여인은 이스라엘 사람이 있는 곁에도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이스라엘 사람이 그것도 남자가 이야기하는데
거기다 대고 말을 대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바로 이 여인의 태도에 예수님의 태도가 비취시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여인이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라는 말입니다.
이 여인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그 당시 헬라인이라면 지식이나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30절을 보면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었다"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는, 침대생활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이방 사람이긴 했어도
지식적으로도 경제적으로 괜찮은 여인이었습니다.
딸 문제만 없었다면 예수님을 우습게 여길 수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모성애는 모욕을 이겨낸다"고 해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이렇게 놀라운 사건을 베풀어 주셨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나라에는 잔치하는 곳임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잔치란 뭐예요.
기쁨입니다. 행복입니다. 나눔입니다. 덕담이 오고 가는 곳입니다.
뭐니뭐니해도 맛있는 것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식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식탁은 행복하십니까?
식탁의 행복을 신문이나 TV 앞에서 다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식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식탁을 통해서 다가올 종말의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사람의 차별이 없는 곳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잔치에는 죄인도 왔고 세리도 이방여인도 왔고 지역의 경계, 인족의 경계,
성의 경계, 종교의 경계가 다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지연, 혈연을 앞세우면서도 뭐 피가 땡긴다니
그래도 피가 섞여서 다르다고 그래도 동향인지 최고지
그래도 동문이 나 동문이야 하면서 그런 생각에 잡혀 산다면
그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주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 한 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가리
주님 우리 안에 함께 하시니 형제, 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네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 그 분 기뻐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가 으스러지면서 (생명의 떡, 십자가) 제 맛을 내는 음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육적 수준이나, 경제적 수준으로 볼 때, 예수님에게 나올 필요가 없었던 여인이지만
자기의 모습이 으스러지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 여인의 불변적인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온 몸이 으스러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
목이 잘려져 나가는 으깨지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도바울!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사랑하시렵니까?
조금만 아파도 조금만 내 성질 건드려도 조금만 비위 상해도
오늘 점심을 드시면서 내 모습을 그려보십시다.
으짜 짜작 깨어지는 깍두기의 모습 속에서 으깨지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천국의 식탁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박세종 목사 (울산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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