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qaHwAQKd8Ro
◈새벽별, 계명성 사14:12, 계2:19~29 설교 일부 녹취, 출처
◑계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제 이름이 ‘효성’인데, ‘새벽 별’이란 뜻입니다. (새벽 효, 별 성)
그래서 위 말씀은, 제 평생에 특별히 각인되는 요절입니다.
제 할아버지가 목사님이셨는데, 제 어머니가 저의 해산이 가까웠을 때,
할아버지께서 새벽기도를 가시다가, 그날따라 너무너무 어두운 밤에
새벽별이 빛을 환히 비춰주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동쪽 하늘을 보시면, 유난히 밝은 별을 볼 수 있습니다.
금성입니다. 초저녁에도 밝게 보입니다.
그 금성이 밝게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시고, 제 할아버지께서는
손자가 태어나면 ‘효성’으로, 이름을 짓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제 성씨가 ‘전’全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새벽 별’이 됩니다.
그렇게 살기로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런 이름을 지으신 것입니다.
손자가 아들일 경우, 목회자로 드리기로, 할아버지는 벌써 소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위 본문 말씀을 보면, 저는 굉장히 두렵습니다.
▲위 본문에,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들, 남은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새벽별’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사야서에 보면 이 ‘새벽별’은 ‘계명성’으로 나오는데,
거기서는 ‘사탄’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사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천사장이 처음에는 찬양으로 주님을 지근거리에서 섬기다가
교만으로 타락해서 ‘계명성’(루시퍼)이 되었듯이,
(킹 제임스 성경이 '계명성'을 루시퍼 Lucifer로 번역했죠.
히브리어는 '헤이렐' , 빛나는 것, 모닝 스타, 새벽별이란 뜻입니다.)
*한자가 어려운데, 啓 열 개, 밝을 명, 별 성 입니다. 새벽을 여는 별, 새벽별 이란 뜻이군요
같은 ‘새벽별 (계명성)’이지만,
이사야서에 나오는 <루시퍼>가 될 수도 있고 .. 사14:12
계시록에 나오는 <선한 새벽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계2:28, 22:16
'또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계2:28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새벽별>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계22:16
그러니까 이름이 ‘효성’(새벽별)인 저는,
정말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새벽 별’이 될 수도 있고,
자칫 잘못하면 교만해서 타락한 사14장의 ‘계명성’(새벽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새벽별(금성)은, 어두운 밤길에, 나그네들에게
동쪽이 어디인지 가르쳐주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나그네들은, 모닥불 곁에서 쉬면서도, 어두운 밤을 밝히는 새벽별을 바라보면서,
자기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가늠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벽별의 역할은 2가지입니다.
1. 어두운 밤을 환히 밝혀주는 것과
2.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같은 성경에 똑같은 ‘새벽 별’이
이사야서에서는 ‘사탄’을 지칭하고,
계시록에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참 성도’ 또는 ‘예수님’을 지칭할까?
어떻게 이렇게 성경을 기록할 수 있을까? .. 하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같은 새벽별이지만, 사탄의 역할을 하는 ‘계명성’이 될 수도 있고,
참 성도 역할을 하는 ‘새벽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눅6: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한 목회자가,
참 하나님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자칫 잘못해서 타락하면, 사탄의 사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계명성과 새벽별의 차이는, 열매의 결과로 구분됩니다. 태생적 차이보다는...
이름이 ‘새벽별’(효성)인 제가, 또는 모든 성도 각자가,
거짓선지자도 될 수 있고, 사탄의 사자인 계명성이 될 수 있다는
그런 경각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제 자신의 영광, 제 자신의 물질적 부유함,
제 자신의 욕심과 높아짐을 추구한다면,
저는 새벽별이 아니라, 계명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밝은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는 새벽별처럼,
오직 예수님만 높이고, 자신의 낮아짐을 추구하는 사람은,
온전한 새벽별이며, ‘광명한 새벽별’이 떠오를 때.. 스스로 사라지기 원합니다.
'광명한 새벽별'이신 예수님의 삶 또한 그러하셨습니다. 계22:16
세상에서 자기를 높이지 않고, 십자가 위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현재 그의 열매를 봐서, 그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경각심을 갖자는 것입니다.
‘새벽별’이, ‘계명성(루시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성도님들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의 일을 하고 있는데,
저도 어느 순간에 주님이 ‘내가 너를 모른다’고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비참하고, 실패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 저는 세상에서 제 이름이 나타나고,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온전히 나타나고 드러나고,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제가 깨어지고 부서져서
그래서 저를 통해 주님의 영광만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도록.. 저를 도우소서!’
하는 것이 제 기도입니다.
여러분, 두아디라 교회도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
◑계2:19, 내가 내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참으로 예수님께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교회에는 사역도 활발했습니다. 내 사업과..
그들에게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었습니다. 원문에 ‘아가페’로 되어 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
거기에다 섬김과 인내도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어제 보다 오늘 신앙이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어제보다 오늘 신앙이 더 좋은 것.. 이거 보통 수준이 아닙니다.
보통은, 어제보다, 오늘 신앙이 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 이유는, 이세벨을 용납하고, 행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종교적인 타협과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한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무려 3번씩이나 ‘회개’를 언급하십니다. 21절에 2번, 22절에 1번입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을 때, 엄청난 재난이(징계가) 있을 것을 예고하십니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오늘날의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처럼,
사역이 많고, 아가페 사랑(구제)이 넘치고 해도,
신앙의 순수성을 타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다원주의, 동성애, 자유주의 신학 등이 교회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무신론’교가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무슬림 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임을 하지 않고, 애는 생기는 대로 다 낳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무슬림이 세계 최대 종교가 된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감소하는 반면에, 무슬림이 증가한다면,
그렇게 뒤바뀌는 현상은, 불 보듯 뻔합니다.
물론 숫자가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속히 성경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서,
무너져 내리는 기독교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벽별은, 동쪽이 어디인지를 가리켜주는,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신앙적 타협이 넘쳐나는 시대에,
정말 ‘새벽별’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표준이다, 이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오늘날 꼭 필요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무조건 ‘아멘, 옳습니다’ 하고 따라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만약에 지도자가 ‘새벽별’이 되지 못하는데도, 즉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도
무조건 ‘아멘, 아멘’하면서, 지도자를 따라가다가는, 주님의 책망을 듣기 때문입니다.
새벽별(계명성)은 아침 해가 떠오르면,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목회자는 새벽별이 될 수도 있고, 이사야서의 계명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등장하실 때, 자기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분은.. 새벽별이고,
예수님의 등장에 관계없이, 자기의 존재로 밤하늘을 지배하겠다고 발버둥치는 분,
즉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분은.. 계명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열매를 보고서, 그를 알 수 있습니다.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매 시대마다 그랬지만,
마지막 때에도, 교회에는 참 성도가 소수만 남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남은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
☞두아디라 교회의 남은 자들
저는 우리 교회에, 또한 세상 곳곳에 ‘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천’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외로운 길을 가는 중에서도,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뒤집어 보면 상당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두아디라 교회가 사역, 사랑, 인내, 섬김이 많은 활발한 교회였지만,
‘이세벨의 교훈을 받은’ 사람들이 주류이고, (바알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교훈)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그 교훈을 받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말세에는, 그렇게 신앙적 타협이 많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24
‘안다’는 뜻은 ‘동침하듯이 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2:24절에 ‘사탄의 깊은 것을 안다’는 뜻은
그와 동침하여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본문은, ‘남은 자들이,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일부(아니, 주류) 성도들은
사탄의 깊은 것을, 속속들이 아주 피부로 실감하며 알았다는 뜻이 유추되겠습니다.
교회로, 예수 이름으로 모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사탄의 가르침을, 실감하며 용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세벨은, 열왕기상에 보면, 이스라엘에 바알우상을 유행시킨 자로서,
다시 말하면, 풍요와 현세주의 우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는 우상숭배의 일환인 성적 타락도 포함되겠습니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4
이미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그것이
핍박이요, 고난의 영광이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은, 그 남은 자들에게 다른 짐으로 지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고,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면,
이 세상에 살 때, 사탄의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이라는 소리도 듣고, 여러 가지로 삶의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넘어지면 안 됩니다.
끝까지 말씀을 붙잡고 승리해야 될 줄 믿습니다.
◑2:25절,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저는 ‘너희에게 있는 것’이란 2:19절에 나오는 내용인줄 알았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19
그런데 제가 성경을 더 연구하면서,
여기서 ‘있는 것’이란, 19절의 내용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란 뜻인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리킴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what you have 또는 ye have already 인데,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뜻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고 봅니다.
즉, 25절은, <말씀을 계속 지켜나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생명의 말씀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굳게 붙잡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역사를 보면,
말씀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교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가운데,
암흑기가 있었던 것을 봅니다.
‘말씀의 권위’가 살아있으면, ‘영적인 교권’이 세워지지만,
‘말씀의 권위’가 약화되면, ‘세속적 교권’이 강화되어 집니다.
그래서 세상 조직적 권위, 교회 조직의 권위가 강화되면서,
어떤 공동체든지, 국가든지.. 다시 암흑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미 그것이 지금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요,
섬김의 권위요, 낮아짐의 권위요, 의로움의 권위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 조직과 똑같은, 서열상 권위, 직제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가 약화되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락의 시작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거짓선지자로, 거짓제사장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령충만하고,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다가,
그래서 거기에 맞는 존경과 지도력을 얻게 되지만,
점점 자기도 모르게 변질되면서, ‘새벽별’이 차츰 ‘계명성’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25절,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5
이 25절 말씀을, 자기 일생에 충성스럽고 굳게 붙잡은 사람이,
프랑스 리용에서 피터 왈도 라는 사람입니다. 주1)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각주를 꼭 참조하세요.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여기서 ‘이기는 자’는 victory가 아니라, overcome입니다.
무력의 힘으로 남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극복overcome하고, 자기 교만과 세속성을 ‘이기고’
높아지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시고, 극복하신 방법은
칼과 창을 사용하고, 군사력을 동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말없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이기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논쟁을 해서, 상대방을 논리로 굴복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기 뜻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 원합니다’ 하면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의 모든 죄를 ‘이기시고’,
그들의 죄(십자가에 못 박음)를 통해,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자마다
십자가에 자기가 죽는 그 길이, 바로 승리요, ‘이기는’ 길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게 ‘이기는’ 길입니다.
물론 자살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어떤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에는, 내가 죽으면.. 그게 승리입니다.
물론 진리를 수호하되.. 그 이기는 방식은.. 내가 죽고, 패배하는 길입니다.
내가 승리하고, 내가 쟁취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것은 실제로는 패배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길임을 잊지 맙시다.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계2:26
모든 목회 사역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일’ 곧 주님의 일입니다.
그런 개념을 우리가 꼭 기억합시다.
주님의 일을 내가 너무 욕심내는 것은, 어쩌면 그것을 자기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진정 인식하는 자는.. 겸허해 집니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니까요.
자기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만, 개인적 욕심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
주1) 피터 왈도 1140 ~ 1218
<피터 왈도에 관한 내용만 추출>
독일에서는 ‘페트루스 발두스(Petrus Waldus)’라고 하며, ‘피터 왈도(Peter Waldo)’
‘피터 발도(Peter Valdo)’ ‘피에르 보데(Pierre Vaudès)’ ‘피에르드보(Pierre de Vaux)’ 라고도 한다.
프랑스 리옹에서 고리대금업으로 부유한 상인이 되었고
1160년경 갑자기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고 전해지는데, 부동산은 아내에게 모두 주고
나머지 재산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준 뒤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이후 거리에서 검소와 빈약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하며 교육에 전념하였다.
1170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은 당시 ‘리옹의 빈자’ ‘롬바르디의 빈자’ ‘신의 빈자들’ 등으로 불렸다.
1179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알렉산더 3세와 교황청과 대면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설명하였으나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후 프랑스 리옹에서 쫓겨나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었고
프랑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교활동을 계속하였다.
로마교회에서는 발도파가 연옥을 인정하지 않고 속죄를 위한 보속, 서약이나 유혈을
거부하는 등 로마교회와 다른 주장을 펴자 1184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후 발도파는 로마교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다가
종교개혁운동 때 칼뱅주의나 신교의 개혁파(Reformed churches)에 흡수되었다.
보름스 루터광장의 루터동상 주변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두산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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