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LNCK 2012. 11. 15. 16: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2:1~22,  마9:16~17       12.03.04.설교스크랩


막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저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관해서, 항상 '제도적인 개혁'적인 측면에서, 주로 설교를 들었는데,

   아래 설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크랩 했습니다/편.


◑서론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실 때 은유법을 사용하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참 포도나무라”

“나는 생명의 떡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자신을 새 포도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새 포도주는 막 담은 포도주로서 발효를 시작하면 가스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포도주 담그는 법에 보니까, 용기에 포도를 6-70%만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포도를 너무 많이 채우면 발효 중에 용기가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윗부분을 비닐로 밀봉한 다음에, 이쑤시개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탈지면으로 막으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숨구멍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스가 얼마나 강력하게 분출되는지, 마개가 폭발을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를 보면서 새 포도주의 팽창력, 폭발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로서

그 안에서 품어져 나오는 영적 파워가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영적권세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귀신도 견디질 못하고 쫓겨가고,

열병, 나병까지 날려 버리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죄의 세력도 몰아내고 깨끗케 하는

권세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권세, 영적 팽창력과 폭발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 부대처럼 부들부들 유연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선한 능력, 새로운 영적 권세를 체험하기 위해서

낡은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심령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새 포도주가 되십니까?


◑1.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기 때문에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히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먼저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지붕을 뜯었습니다. 구멍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중풍병자의 침대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정말 새 부대적인 발상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안 된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그들은 된다고 생각하고 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행동을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서로 스피릿이 통했습니다.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외적인 행위만 보면 너무 거칠고, 공중도덕도 없고, 버르장머리가 없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믿음,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드는 믿음.

그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너무 소극적으로, 샌님처럼, 신사적으로 믿기 보다는

좀 적극적으로, 저돌적으로 믿기 원하십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고,

장애물이 있으면 장애물을 뚫고 주님께 나아오기 원하십니다.


이요셉 목자님은 어찌하든지 신입생 양을 얻고자 길거리에서 핏싱을 하셨습니다.

신입생처럼 보이는 학생에게 길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더니,

그 학생이 스마트 폰까지 꺼내서 자세히 안내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을 소개하셨는데 중앙대에 입학한 신입생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여기 학생 아니네’ 하고 포기하잖습니까?

그런데 목자님은 중앙센터까지 전화를 하셔서 그 양을 목자에게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지난 주 스텝 미팅에 갔더니, 그 센터 스텝목자님이

자기들에게 좋은 양을 소개시켜 주어서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도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히10:38~39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믿음을 가진 새 부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상황을 탓하고, 40대도 되지 않았는데 나이를 탓하는 사람은 다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올해는 우리가 지붕을 뜯는 믿음으로 도전해서, 주님의 큰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이 중풍병자를 어떻게 축복해 주셨습니까?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는 이 사람이 중풍병 때문에 나왔으니

“이 사람아, 너의 중풍병이 나았느니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보실 때 이 사람이 불행한 더 본질적인 이유는 중풍병 보다 죄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인생이 불행한 이유가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돈이 없어서, 외모가 받혀주지 못하기 때문에, 머리가 좋지 못해서,

출신배경이 좋지 못해서 등등. 외적인 이유를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낡은 부대적인 발상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건강하고, 부자고,

잘 생기고, 머리 좋고, 배경 좋으면 만사 OK, 마냥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있을 것 다 있고, 갖출 것 다 갖추었어도, 내면에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인생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부와 명성, 인기와 낭만을 다 얻었지만

자살로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끊어지고 필라멘트가 나간 전구와 같이 고독하다”


요즘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은 집안 사람들이 형제간에 고소하고

싸우는 것을 봅니다. 형은 동생을 고소하고, 동생은 조카를 미행하고.

뭐가 부족해서 그럴까요?


인간의 문제는 단지 외적인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 우리 인생들을 못 쓰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고,

추하고 더럽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죄문제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것,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고, 자기영광과 세상욕심,

육신의 쾌락과 정욕을 추구하며 사는 것. 이 모든 것이 죄입니다.


이런 죄들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고 추하고 더럽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결코 인생의 참된 행복과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풍병자가 잘못 일어나면 세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중풍병을 치료해 주어도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더 큰 불행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죄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모든 문제의 뿌리를 뽑아 주시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듣고 있던 서기관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7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의 이 말은 맞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구도 감히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려 하노라”


그러면 이 사람이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11절에서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중풍병이 완전히 치료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실제적인 삶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고질병이 치료 됩니다. 무기력한 사람이 열정적인 사람으로,

매사에 어둡고 부정적이던 사람이 밝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열등감, 패배감으로 드러눕던 사람이 일어나 개척하고 도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김 준 목동은 심한 아토피로 인해 한 쪽 눈이 거의 안보이게 되자

인생을 비관하고 중풍병자와 같이 지냈습니다. 집에서 잘 나오지도 않고,

운명을 탓하며, 담배로 자신의 인생을 태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다윗 목자님과의 말씀공부를 통해

그의 근본문제가 육체의 질병과 인간조건 문제이기 이전에, 죄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혈기와 감정대로 살아 온 죄, 부모 탓, 건강 탓하며

젊음을 낭비하고 방탕하게 살아온 죄문제가 그의 본질적인 문제였습니다.


그가 여름수양회 때 예수님께 나아가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게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운명과 패배의식의 자리에서 일어나 자립적으로 인생을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서 장차 사회복지사의 비전가운데 열심히 공부하고

장학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옆에만 가면 담배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지금은 담배도 끊고

파트모임 메시지도 전하는 말씀의 종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아토피도 많이 치료되고 피부도 몰라보게 좋아졌습니다.

과기원 한 양을 얻고자 캠퍼스를 누비는 목자요, 성경선생이 되었습니다.


누가 그의 인생을 그처럼 일으켜 세우고 변화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십니다.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고 맛나게 해 주십니다.


과거의 수치스런 죄, 슬픈 기억들은 다 녹여 버리십니다.

운명과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뛰고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게 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심정이 부글부글 끓게 하십니다.

전도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예배드리고 싶고, 주의 전에 거하고 싶고,

주의 일에 동참하고 싶은 영적 소원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부풀어 오른 포도주 비닐을 건드리면 빵 터지듯이

구원의 감격과 열정으로 인해 누가 건드리면, 터져 버릴 것 같은 감동으로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2012학번 양들이 캠퍼스에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와 보라” “come and see”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 감격과 열정이 있으면 그 사람은 ‘새 부대’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격도 기대도 상한심정도 없고, 만사가 귀찮고 부담스러우면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여러분은 새부대입니까? 낡은 가죽부대입니까?

우리 모두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새부대가 됩시다.


◑2. 둘째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당시 세리는 유대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던 공인된 죄인이요, 기피인물 제 1 호였습니다.

동족들에게 부당하게 세금을 물려서 로마에게 상납하고, 자기도 뒷돈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가득이나 로마가 미운데, 그 로마에게 빌붙어서 피를 빨아 자기 배를 챙기는

매국노 세리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아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레위 옆을 지나갔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쳐다보았다면 정죄하는 눈빛, 저주하는 눈빛으로 째려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레위가 세리라고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눈여겨보셨습니다.

정죄하는 눈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소망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가 돈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있지만

장차 방향을 잘 잡으면, 위대한 사도요, 하나님의 큰 종이 될 것이라는 비전을 보셨습니다.


특히 매사에 꼼꼼히 기록을 잘 하는 그가

나중에 위대한 성경저자가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실제로 세리 레위는 후에 마태복음을 저술한 성마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적극적으로 그를 초청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Follow me!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세리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의 소망스런 초청에 레위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소망 가운데 불러주시자, 큰 감동을 받고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레위에 집에 들어가, 다른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전국에 ‘내로라’ 하는 세리들은 다 모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깡패, 술주정뱅이, 각종 죄인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또 트집을 잡았습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들이 볼 때 세리와 죄인은 사회에 암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철저히 잘라내야 하는데 예수님은 왜 그들을 받아주고, 그들과 함께 식사까지 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파격적인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정말 새 포도주이십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건강하고 의롭기 때문에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만 상대한다는 자기 의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보다 훨씬 의로운 분이시지만,

건강한 사람, 의인들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병든 사람, 죄인들을 불러서 치료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자신이 어떤 오해를 받던, 어떤 희생을 치르던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병들고 추하게 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까?


오늘날 세상은 갈수록 잘나고 똑똑한 자만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 키 크고 잘 생기고 배경 좋고,

스펙이 화려한 자들에게만 이목이 집중됩니다.


소위 상위 5%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회,

1%의 엘리트들이 99%를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죄 많고, 내세울 것 없고, 부족한 자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점점 소외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만약에 흠이 없는 사람, 의로운 사람만 골라서 그들만 상대하시고,

친구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감히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자꾸만 주눅이 들어서, 슬슬 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을 뽑으러 오시지 않고,

병든 죄인들을 치료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추한 죄인들을 자신의 보혈로 씻고 닦아서 정결케 하기 위해 왔다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진정한 구주요,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교도소 선교회를 만든 찰스 콜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주1)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의인들 표창하러 오시지 않고, 죄인들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죄인된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세리 같은 모습 그대로, 사마리아 여인 같은 모습 그대로,

중풍병자 같은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서 죄씻음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 사람이 새부대입니다.


괜히 바리새인들처럼 의인인 체, 거룩한 체, 죄 없는 체 하면

낡은 가죽부대, 헌부대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새 포도주 예수님이 임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아뢰고 죄사함 받고,

내면의 병이 치료함으로 받아서 새롭게 되는 축복이 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죄로 병든 한 영혼을 품고 사랑함으로써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새 부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주1)

미국에서 최초로 교도소 선교회를 만든 찰스 콜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체험을 고백한 <백악관에서 감옥까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미국 37대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의 핵심참모로 백악관에 들어가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닉슨 대통령의 재선이 어려워 보이자

야당당사에 도청장치를 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추악한 사건으로 분류됩니다.

찰스 콜슨이 그 사건에 핵심 브레인이었습니다.


그전까지 그는 대통령의 핵심참모로서, 잘 나가던 인물이었습니다.

명문대학 출신에, 대통령을 두 번이나 당선시킨 일등공신으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샀습니다.


그런 그가 야당당사에 도청장치를 한 추악한 범죄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온갖 여론의 비난을 받으며 죄수복을 입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것으로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과거 자기와 같은 엘리트가 아니라,

추한 범죄자, 죄인을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에 은혜를 받고 복음을 영접하고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나도 동료 재소자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나는 이들 모두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엘리트만이 아니라 자기같이 추악한 범죄자를 형제로 불러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자신도 다른 재소자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그들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사랑을 베푸는 재소자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도소에 수감 중에 기도모임을 만들고, 출소한 후에는

‘교도소 선교회’를 만들어서 재소자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찰스 콜슨이 승승장구하며 백악관에 입성하고 잘 나갈 때

그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추악한 스캔들의 주범으로 감옥에 갔을 때,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며, 비난받고 매도당할 때, 인생의 깊은 수렁 가운데 있을 때,

죄인되었을 때에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의 구주요, 친구가 되어 주시고,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그 교만한 자를 변하여 재소자들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찰스 콜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회개하고 변화되어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