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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주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

LNCK 2012. 11. 20. 10:14

◈이 시대에 주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     요4:23~24         설교녹취

 

 

 

 


여러분, 지금 학교 안에서 기독교를 향한, 크리스천을 향한

엄청난 핍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전에 없었던 반대와 도전이라는 뜻입니다.

즉, 학생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학교 안에서 기독교 모임을 여는 것을 반대하는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너무 거부하고 대항하려고만 하지 말고,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어떠한 한 교역자, 어떠한 한 리더로 통해서,

하나님은, 그 모임이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 리더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고요, 하나님의 더 깊은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한 교역자가, 그 학교 안에 계속 서 있는 한

정말 더 깊숙한 곳으로, 복음이 더 침투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학생들 자체가, 한 사람의 예배자로, 각 학교에서 세워질 때,

거기에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또 학교에 등교했습니다.

주님의 성령과 동행하는 모습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고,

제가 만나고 교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게 하시사,

그들이 저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제가 그런 도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 각자가,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학생에게까지

학생 대 학생으로 부담감 없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학교에서 학생들의 기도모임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까지 그 기도모임을 진행해 왔던 목회자가 더 이상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회자는 아웃사이더에서 도와줄 수는 있겠지요.


목회자가 서 있으면, 그것은 공식적인 학내 기도모임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그 기도모임을 인도하면,

아마 중고등 학생들이 부르신 곳에서 두 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여서,

‘하나님, 저희가 이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서 축복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학교를 중보기도로 섬기기 원합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서 있으면,

복음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 더 깊은 곳으로

잃어버린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왕따 당하는 학생, 불량배들, 왕따 시키는 학생들까지

복음이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핍박을 당해서 뿔뿔이 흩어지고,

복음이 깊숙이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학교 안에 탄압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대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흩으시는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모여 있어서는, 핍박이 없어서는,

복음이 확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각자가,

하나님이 여시고 닫으시는 것에 민감하게 따라가는 축복이

우리 학생들 안에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닫힌 문, 열 필요 없고,

열린 문, 닫을 필요 없습니다.

여시고 닫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 학내 모임을 닫으시면,

이제 두 세 사람이라도, 모여서, 학생들 스스로 기도모임을 가지면 됩니다.


그렇게 자체적으로 스스로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이,

이 시대에 주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늘 교역자에게 의존하는 신앙생활만 하다보면,

나중에 대학교 진학해서, 타 도시에 가서, 혼자 외톨이로 떨어져 있을 때,

신앙을 떠나는 학생들이 꽤 많습니다.

물론 교역자의 지도가 필요하지만, 자기 스스로 서는 연습도 병행해야 합니다.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면 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자요, 교회요, 선교라고 봅니다.

누구 인도자 한 사람이 떠나면, 와해되어버리는 모임이 아니라,

누구 인도자 한 사람이 떠나도, 그 모임이 더욱 활성화되고 부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한 중국인 동역자가 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출퇴근을 합니다.

자기 리어카에 중국제 물건을 가득 싣고서, 북한의 장터에 가서 팝니다.

그런 와중에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사람의 실수에 의해

그가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다가 국경에서 잡혔습니다.

그래서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후에 풀려났는데, 그 분은, 그것을 오히려 기회로 여겼다고 합니다.

더 깊은 데로 들어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장터가 아니라, 수용소 안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수용소 관계자들에게는, 그가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용소에서 제일 힘들다는, 가로 세로 높이가 1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독방에 감금했습니다.


그 독방에서 3개월이나 계셨습니다.

3개월 만에 풀려나서, 또 다시 3개월 동안 심문을 당하신 후에

결국 6개월 만에 완전히 풀려나서 중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많이 힘드셨죠?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어떻게 거기 좁은 독방에서 3개월이나 견디셨어요?’


여러분, 보통 사람은, 그 작은 상자 안에서 48시간을 못 버틴다고 합니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1주일을 못 견딥니다.

그런데 그 분은 3개월이나 버티셨습니다. 너무나 멀쩡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도 신기해서 여쭈어 본 것입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마시고 있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제 안에 계시는 생명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장터에서 수용소로!

수용소에서, 독방 안으로!


지금은 사방이 막히고, 내일이 보이지 않고, 하루종일 컴컴한 가운데

아무런 희망이 없이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깥에 있어도 내 안에 계신 그 분,

독방 안에 있어도 내 안에 계신 그 분,

본질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바뀔 수 있었지만, 예배의 대상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어디서든지 진정한 예배자로 서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날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학교에서 탄압이 있다고 당황하지 마시고,

언제든지 진정한 예배자로 서 있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사는 것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사는 상황이 바뀌면 내 인생은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부르신 그 곳에서

기묘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만을 신뢰하고 자기 사명을 감당하며 산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영광 돌리며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혼자 대학교 가도, 믿음 지킵니다.


지금 한국에 80% 이상의 청소년 신자들이,

고3까지는 막 찬양하며 은혜 받는 것 같았는데,

고3을 마치면서 대학을 진학하면, 믿음이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에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교회 안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기 교회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 가 보니까..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기 안에, 진정한 신앙의 본질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굳게 세워져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이전에 자기 교회에서 드리던, 익숙했던 예배 형식이 없어지자,

자기 안에 본질인 예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 안에서, 교회처럼, 목사님 모시고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드렸던 예배, 학교에서도 똑같이 드리면,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학생들 자체적으로 두 세 사람이라도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드린다면,

거기서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가 된다면,

그 학교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그곳으로 여기고,

낙심하고 좌절한 친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따뜻한 미소와 격려를 건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기묘자이신 하나님, 정말 그 분과 동행하며

예배자로서, 주님이 부르신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우리 찬양 드리겠습니다.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주 은혜로 이 곳에 서 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그 어느 것도, 나 필요 없네. 주님만 경배해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예배가 오늘도 드려지고 있고

수많은 프로그램 속에서, 수많은 찬양이 오늘도 드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건물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우리의 모임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기존의 예배 형태가 우리 가운데 없어지고, 음악이 멈춰지는 그 때

그때 과연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지, 예배자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지..


핍박과, 고통과, 아픔과, 미혹들이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지, 더 쉬워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까지는 우리가 세상이, 환경이

나에게 맞춰주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오히려 환경이 더 열악해져도

나는 여전히 주님을 예배하겠습니다.


이 환란이 변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예배자로 서 있겠습니다.

이 현실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나는 계속 주님을 예배하겠습니다.


기묘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와 섭리와 사랑으로

판단하셔서, 

가장 적합한 환경을 내게 주신줄 믿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크시고 깊으시고 정확하신 뜻을 내가 알고 의지하기에

내 인생은 실수가 아니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요, 사고도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이오니,


나를 부르신 이곳에서,

이곳이 비록 아픔의 현장이요,

산산 조각난 가정이요,

가난과 빈곤의 현장이라도,

사방이 막힌 숨 막히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곳이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예배의 처소라면,

주님을 사랑하기에, 제가 살아드리겠습니다.


주님 때문에 견뎌 드리겠습니다.

주님 때문에 인내하겠습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제가 주님께 드릴 예배입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우리는 완전한 조건이 갖춰진 예배의 자리를 기도해 왔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그리심 산에서도.. 이제는 예배드릴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부르신 곳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기묘자되신 주님을 신뢰하기에

저를 부르신 이곳에서, 주님을 예배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