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 롬1:18~32 옥한흠 목사님 설교 스크랩, 출처보기
+내용 요약+
오늘날, <하나님의 진노>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같은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주 드물게만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에 대해서 좀 빨리빨리 진노하시면,
우리들이 더 잘 믿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어떤 죄인들은 즉시로 심판하시지만 (이것은 아주 드문 예이고)
하나님은, 대부분 죄인들을, 그냥 놔두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김정일도 오래도록 잘 살았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럼 하나님은, 진노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란 성경말씀이, 오늘날에는 적용되지 않습니까? 성경이 잘못된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성경의 증언을,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맹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나타나는 중입니다. 3가지로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이 하고 싶은 대로,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롬1:18, 24, 26, 28 (27분~)
2. 하나님의 진노는.. 심판 때까지 악을 계속 쌓아두시는 것입니다. 롬2:5 (30분50초~)
당장 심판하지 않더라도, 벼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3.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까지 유예하시는 것. 롬2:16 (33분20초~)
끝까지 가만 두시는 것은, 그를 영원한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롬5:9 (36분20초~)
그것은 예수 믿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관련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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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 롬1:18~32 위 설교 전문 녹취
◑본문 해석
▶저는 이 시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봉독한 롬1:18절 처음 말씀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그렇게 듣기에 썩 좋지 않은 말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읽으시면 항상 기억해 두셔야할 사실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1장 18절부터 로마서의 본론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지금 이제 본격적으로 말씀을 하기 시작하는 서두에서,
첫마디부터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나온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생은 복음을 받기 전에
자기의 처지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처지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지금 받고 있다...
이런 처지를 처음부터 인식할 때
비로소 복음이 가슴에 들어올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롬1:18절의 서두를, 말미의 말씀하고 연결하면, 즉 18절을 함축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을 쫓아 나타난다.’ 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 진노하고 계시고
그 진노가 이 땅에 사는 사람에게 계속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하면, 항상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연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을 우리는 즐겨 고백하고 마음에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진노’, 화를 내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접근하기가 싫은, 약간의 거부감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얄팍한 심리를 이용해서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처음부터 부정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부정하느냐 하면, ‘사랑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그것은 말자체가 벌써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사랑이면 사랑이지, 진노면 진노지.. 어떻게 사랑이면서 진노이냐?
그러니까 말자체가 벌써 모순을 일으키는 용어이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을 붙여야지 진노를 붙이면 안 된다.. 하여서
아예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인정 안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나님이 진노 때문에 죄인을 심판하시려고 준비하신
지옥까지도 부정해버립니다.
지옥은.. 성경이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 했던 간에
그것은 죄를 짓는 자를 경고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이지
실제적으로 지옥이 없다는 이야기고
만약에 지옥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은 며칠 동안 가두어서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에는 풀어주는 곳이지
영원히 가두어 두는 곳은 아니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굉장히 듣기 좋죠? 그랬으면 좋겠죠.
사실 ‘진노’라는 말은 사전에 찾아보면 손해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할 때 생기는
불쾌하고 강한 적대감정이라고..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놓고 볼 때,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손해를 보는 일이 있나요? 모욕을 당하는 일이 있나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인데, 뭐 그렇게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화를 버럭 버럭 내는 그런 분으로 생각할 수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말을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말은 항상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 사랑 아닌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사람이 쓰는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죠.
그것이 바로 ‘진노’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정리를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격상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진노가 뭐냐? 인간이 화를 내는 것과는 틀리다고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것이냐?
두 가지를 잘 정리해 놓으십시오.
▶1.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의 거룩한 품성으로 인해서 나타난 죄에 대한 반응이 진노입니다.
죄를 보시고 죄인을 보시고 다루시는 그의 완전한 거룩의 다른 일면이
진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 거룩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를 하려면, 그 거룩은 죄를 전혀 용납 못합니다.
죄란 것을 절 때 가까이 두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가까이 온다던지 눈앞에 죄인이 볼 때는
자연적으로 그 거룩은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 반응이 뭐라구요? 진노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거룩하지 아니하시면, 진노라는 말은 따라오질 못합니다.
하박국 1장 13절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심으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신다... 바로 이것이, 바로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까 보지 못하는 반응이 나올 거 아닙니까? 그 반응이 진노라는 말입니다.
▶2. 둘째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2번째 의미를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 혹은 자기 자녀를 징계하시는 사랑의 일면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화냅니다. 사랑하면 징계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에 진노를 제일 많이 받은 백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백성인가요? 앗수르 족속인가요?
우상숭배를 많이 한 블레셋 족속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에게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인가요? 누구에요?
이스라엘 백성이에요.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할 백성이, 제일 많이 두들겨 맞았단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너무 사랑하시는 자녀라,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때리는 것입니다.
그 때리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 3장 12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자녀 기뻐하시는 자녀, 아들을 징계하는 것 같이 하신다. 이랬습니다.
이것이 진노입니다. 사랑의 다른 면이에요.
▶그래서 칼 브라이트 라는 신학자는 유명한 말을 한마디 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다.> 이해하실 분만 이해하세요.
그런데 좀 더 쉽게 더 멋있게 말을 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에밀 브루느라는 신학자인데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한테 등을 돌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 앞에 등을 돌리고 떠나는 자녀에게 진노하시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이렇게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의 일면이요 사랑의 일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거룩하심 못지않게 진노하시는 분이여야하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시는 것 못지않게 진노하시는 분이여야 합니다.
악을 아무리 범해도, 무감각 하고 반응이 없는 분이 하나님이라고는 우리는 생각을 할 수가 없고,
죄인을 보고도 심판하실 생각 하지도 않고 먼 산 쳐다보고 계시는 분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경배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결단코 빼 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중요한 품성의 일면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18절을 조금 더 검토해보고 넘어 갑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라고 했습니다.
우선 먼저 하나님은 왜 진노하시는가요?
그 이유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때문에 진노한다고 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
여기서 불의라는 말은 원문 상으로 조사하면 복잡하게 우리가 해석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단순히 ‘죄’라는 말로 대치를 해도 됩니다.
죄를 가지고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또 반항하고, 또 대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아요.
이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지 않으실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의적으로 반대하고 비판하는 자가 한 두 명 입니까?
하나님이 이리해라 하면 저리하고, 모든 것을 거꾸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리를 분명히 보여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와는 반대되게 생각하고,
반대되는 방향으로 항상 따라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대부분 전부지요. 우리가 과거에 그런 사람들이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가요?
성경에 보면,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은 것>,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뭐에요?
<불의> 이 두 가지에 대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건치 않다> 하는 이 죄는
1:19~25절까지 나오는 종교적인 죄를 의미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행위, 하나님에 대한 대적행위의 죄를 말합니다.
다음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지만, 이것은 죄 중의 죄입니다.
경건치 않다는 것이 무엇이냐? .. 하나님을 향해서 공공연히 도전 하는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를 퍼 붇고 계시고...
또 하나 여기서 <불의>라고 하는 것은
1:26~32절까지 나오는 인간을 공격하는 죄 들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도덕적인 죄를 말합니다.
각각이 더러운 생각에서 시작해서 이웃을 해치는 모든 잘못된 행위
이 하나하나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언제 진노하시나?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
이 말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부터 나타나나니 라는 말은 현재 진행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진노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언제 진노하시느냐 라고 묻는 다면
‘날마다 진노하신다. 지금 진노하신다. 계속 진노하시고 계신다.’
우리가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7편 11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매일 분노하신다.. 그러므로 언제냐 하고 물으면
지금 당장, 날마다, 죄에 대해서 죄인에 대해서
경건치 못한 자에 대해서,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18절을 이렇게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면서
참 다시 한 번 우리자신을 돌이켜보고 반성해야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거부하시는 거룩한 분인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을 하는 버릇이 있어요.
예수 믿고 나서 이 버릇이 더 많이 생겼어요.
물론 그렇게 생각 할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원칙상 ‘하나님의 진노’,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는 두려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시는가.
내가 비록 예수 믿는 사람일지라도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나쁜 생각 하나 하나에 대해서
얼마나 하나님은 진노하시는가..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하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평범하게 봐준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또한 사랑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악에 대해서는 진노하시고
사랑하는 자가 잘못됐을 때 진노하시는분 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진노하는 하나님을 가볍게 다루는 버릇을 가지면 안 됩니다. 두려워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2장 5절에 말씀하신 대로,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됩니다.
‘내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은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그 분을 두려워하라.’
왜 지옥에 던져 넣습니까? 진노하시는 분이니까 던져놓지요.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버릇없는 손자처럼, 할아버지가 사랑만 하시는 줄 알고,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두려워할 줄 모르면, 할아버지 수염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릇없는 손자처럼 섬기기 쉬워요.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돼요.
진노하시는 하나님! 자 이 사실을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검토를 했는데..
◑정말 하나님은 ‘오늘도’ 진노하고 계시는가?
▶제가 여러분에게 솔직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저자신의 질문이고 우리 모두의 질문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날마다 이렇게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진노하시고 계신다면
오늘도 진노하시고 계시나?
정말 진노하시는 분인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향해 정말 진노하시고 계시나?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정말로 진노를 퍼 붇고 계시는 분인가 진노하고 계신다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한번 묻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말 진노하시는 것 같은 증거가 별로 안보여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안 느끼세요? 오늘 현실을 볼 때 말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를 정말 심판 하고 계시나? 하고 물을 때
가만히 내버려 두지 심판하는 것 같이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려고 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날마다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정말로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시는가?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가끔 실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하고 있다면, 절대로 무사할 수 없는 자가
왜 저렇게 건재한가?
수십만 수백만의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한 독재자가
왜 다른 나라에 돈을 싸 짊어지고 가서 앉아서 20년 30년 건재하면서
생을 향락할 수 있는가? 정말 하나님은 진노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그릇되게 가르쳐 수많은 영혼을 낚시질 하는 사냥하는 이단들이
왜 오래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하도록 용납하는가?
과연 하나님은 진노하시는가?
많은 사람들을 살인하면서도, 아직도 붙잡히지 않고 세상을 자신 있게 살고 있는 자들,
불의에 재산을 축재해서 많은 이웃을 해친 사람들,
심지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힌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건재할 수 있는가? 정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가?
가끔 우리주변에는 천재지변이 많이 일어납니다.
지진, 홍수, 또 기근, 가뭄.. 이런 재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도 가만히 보면 꼭 일어났으면 하는 나라가 있지요.
꼭 저 나라에 이런 일이 있어야 되는데
뭐 내가 꼬집으면 곤란하고 그런 데가 있지요.
그런데 그런 나라에는 잘 안 일어나고, 일어나도 천재지변이 쪼금 일어나고,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죄가 없어 보이는 나라는
너무너무 지긋지긋하게 일어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데 세상을 잘못 보셨나...?’ 이런 생각도 날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같은 경우는, 사하라 사막 이하에 아프리카 나라는
거의 40%정도가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오랫동안 가뭄으로 고생을 하고,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가..
하나님 왜 저렇습니까?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정말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시는가?
스스로 물을 때, 우리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회의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악을 범한 사람이나 나라를
사정없이 현장에서 진노하시는 증거로 심판하는 예가 가끔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디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지요.
그런데 오늘날 소돔 고모라같이 진노를 받는 도시나 나라가 있습니까?
없단 말이에요. 잘 안 보인다는 말입니다.
또 개인에 대해서도 정말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심판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해치우는 일이
가끔 성경에는 있지요? 헤롯왕 같은 사람입니다.
몸에 충이 먹어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인체 하다가 그냥 하루도 못 넘기고 죽었지요.
그런 일들이 지금 있느냐? .. 별로 없는 것 같단 말입니다. 물론 가끔은 있어요.
가끔은 있어도 너무 없어요. 너무 희소해요.
▶좋지 않은 말이니까 우리나라 예를 들 필요는 없고, 먼 나라 예를 들어 봅시다.
어느 부부가 25년간 결혼생활 참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글에 ‘이상적인 결혼 생활은 아니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이었다.’고 그랬어요.
25년 동안 그저 결혼생활 잘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행복했고, 자녀들 셋이 잘 자라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유복해서
이제는 노후에 좀 더 편한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집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호숫가에 그림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멋진 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한 곳을 찾았어요. 너무 좋은 집입니다.
그 집에 주인하고 거래가 시작되었는데, 그 집주인은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지,
이혼을 해서 나가버렸는지 모르겠지만 홀아비가 사는 집이에요.
홀아비가 집을 팔려고 내놨어요.
그래서 부부가 그 집을 사기로 계약하고 몇 달 동안 왔다갔다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나고 나서 느닷없이 갑자기 부인이 남편에게 하는 말이
‘나는 당신과 이혼해야겠습니다.’
남편이 기가 막혀가지고 왜 갑자기 이혼을 하려고 달려드는지 남편이 말을 잃었어요.
"당신 왜 그래요?" 하니까 말을 잘 안하고 있어요.
"하여튼 나는 이혼을 해서 떠날거요” “그럼 애들은 어떻게 할거요?”
“애들은 당신이 맡으시오. 아빠가 맡으시오. 나는 이집을 나가겠소.”
하룻밤을 지나고 그 다음날 아침, 남편은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나오면서
자 이제는 헤어져야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힙니다.
부인을 보고 “마지막이군요!” 하니 부인이 손가방 몇 개를 들고 나오면서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굿바이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어디를 갔나 하면, 호숫가에 있는 그 집주인하고 만나러 간 거에요.
그 홀아비하고 눈이 맞아가지고, 같이 살기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에요?
우리는 기가 막힌 이야기지만, 미국같은 경우는 예사인 이야기입니다.
그랬는데 그 여자가 가서 새 살림을 꾸미고
호숫가에서 그야말로 꿈을 꾸면서 사는 생활이 2주 지나갔어요.
2주 지나 갔는데, 갑자기 그 홀아비 남자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었어요.
누가 진노하신거요?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진노하시는데 어떻게 하셨어요? 즉각적으로 진노하셨지요.
왜 남자를 죽였는지 모르겠어요. 여자를 죽였으면 좋겠는데...
가끔 세상에 보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여유를 주지 않고 당장 심판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이 진노의 표지요.
그런데 그것은 아주 희소합니다. 아주 희소하고 우리 눈에는 잘 안보여요.
그럼 그것보다 더 심한 악을 범한 사람도, 얼마나 잘 사는지
어떤 여우는 보니까 여우인지 늑대인지 모르겠지만, 8번 9번 결혼해도 잘만 살더라고요.
이제는 늙어가니까 30살인 젊은 남자하고 마지막 결혼이다 하고 살더라고요.
(미국 여배우, 지금은 죽었지요? 설교할 당시는 살아있었음)
그런데도 얼마나 건강하고 팔자가 늘어나 보이는지
왜 하나님은 가만히 두는 건가? 그런 거 보면 이해가 안 돼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삽비라와 아나니아
헌금 잘 못 해가지고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진노’앞에 그 자리에서 당장 죽었어요.
오늘날 이런 일이 있습니까?
밴스 헤브느 라는 나이든 어떤 미국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요즘도 교회 안에서 삽비라와 아나니아처럼 잘못한 사람들을
계속 심판하신다면, 교회마다 지하실에 영안실을 만들어 두어야 할 것이다.’
안 그러겠어요? 영안실을 만들어야겠지요.
계속해서 거기로 내려갈 거니까. 잘못하면 목사도 내려 갈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진노를 금방금방 하시면서 심판을 하느냐?
그렇게 안하신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정말 진노하시는 분인가에 대에서는
의심이 조금 갑니다.
전 어떤 때는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과연 하나님이 가만히 안두고 심판을 하셨구나.’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한번 본때를 보여주면, 이 세상이 더 밝아질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세요.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말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
거짓말 아니냐?
그것은 괜히 겁주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된 말에 지나지 않지 않느냐?
우리가 그렇게 마음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 의구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사람이 많으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는 것처럼 오해할 수가 있는데
그 오해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성격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3가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성격을 가졌느냐?
첫째 성격은 하고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롬1:24절을 잘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에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욕대로 하고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겁니다. 그것이 진노입니다
또 한곳 더 있지요.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다.’
또 한곳 있지요.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
여기서 ‘상실한 마음’이라는 말은 부패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를 종합해서 보면,
인간이 부패한 마음으로부터, 정욕대로 욕심대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진노’의 성격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돼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대로 즐기고, 원하는 대로 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고 그러면
다 잘된다 말이에요.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아 다 잘고, 원하는 대로 다 돼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형통하다고 하는 말을 쓰고, 행복하다는 말을 쓰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왜요? 내버려 뒀으니까요!
여러분, 대학입시를 몇 달 며칠 남겨둔 아들이 그만 공부가 지겨워가지고
아버지 어머니 말을 듣지 않고 나가서 술 마시고 들어오고
나중에는 담배피우고 밤에 나가서 밤새도록 있다가 새벽에 들어오고
아버지 어머니가 달래고, 어떨 때는 때리고 여러 가지 좋은 말을 가지고 돌려보려고 했지만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나중에 마약 중독자까지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부모가 극도로 화가 납니다. 그때 하는 말이 있지요?
‘마음대로 해! 나가던지 죽던지 마음대로 해!’
그러면 ‘마음대로 해’ 하는 것은 내버려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화가 극도로 치밀어 올랐을 때 하는 말입니다.
바로 그거에요. ‘하나님의 진노’가 당장 이사람 죽이고
저사람 때리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마음대로 해 -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진노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굉장히 무서운 일입니다.
그럼으로 가끔 가다가, 내 마음대로 잘 안되고 실패하고 고통을 당하면
그것은 진노입니까, 사랑입니까?
사랑이지요. 그래서 실패해서 예수 믿고 돌아오는 사람 많지요. 그것은 사랑이지요.
그런데 끝까지 자기 마음대로 해라고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나요?
그것은 뭐 완전히 ‘하나님의 진노’안에서 끝나는 인생입니다.
정말로 불쌍한 사람이에요.
▶2. 또 하나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 쌓아두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장 그때그때마다 심판을 하지 않고, 계속 쌓아놓고 모아놓는 것을 말합니다.
2장 5절을 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어떻게 합니까?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계속 차곡차곡 쌓아놓는 거에요.
마치 댐 속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물이 가득차가지고 댐이 무너진다던지, 수문을 열면 굉장히 무서운 힘으로 물이 내려가지요
많은 악을 범한 사람을, 당장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면
그것은 사랑이 되겠지요. 그런데 끝가지 그렇게 하지 않고 쌓아두시기만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키워보니까 잘 알지요.
내가 어릴 때 부모로부터 들은 말 중에 가장 공포를 느끼게 한말이 있는데
그것은 ‘어디 두고 보자!’는 말입니다.
‘어디 두고 보자!’ 라는 말이 그것이 참 어린애들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말이거든요.
아빠 엄마가 당장 왜 그렇게 했어 하고 회초리 한 대 때려주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데, 때리지 않고 두고보자입니다.
‘두고 보자’ 그러니까 언제까지 두고볼 지 모르겠지만, 항상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오늘날 이 세상에 모든 악을 범하는 사람에 대해서 ‘두고 보자’입니다.
이것은 쌓아두는 거에요.
그런데 심판의 날까지 그런데 두고보자가 아니고
어느 때 갑자기 치신다던지 돌이키시면 그것은 진노입니까, 사랑입니까?
사랑이지요. 여러분 이런 성격을 잘 이해하세요.
▶3. 또 세 번째 진노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폭로하지 않고 가만히 잘못된 것을 계속 숨겨 놓는 것입니다.
비밀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롬2장 16절을 보세요.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왜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폭로하지 아니하고, 계속 숨겨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세상사람들은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들어나기가
항상 겁이 나가지고 빛 앞으로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언제든지 비밀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비밀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시간 속에 영원히 망각되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향해서 ‘내가 모르는 줄 아나? 다 안다.
그러나 지금 아는 체 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모르는 체 하고 가만히 있는 거.. 이거 무서운 거에요.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입니다. 끝가지 가만히 두면
그 사람은 영원한 멸망을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서운 나쁜 짓을 했더라도, 언젠가 하나님이 그것을 부끄럽지만은
폭로하시고 그것 때문에 매를 때리시면, 그것은 진노입니까, 사랑입니까?
사랑이지요. 그래서 그가 예수 믿고 돌아오고 회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끝가지 그냥 ‘내가 모르는 줄 아나, 가만히 내버려둔다.’
이것만큼 무서운 진노가 없어요.
▶오늘 우리가 세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라 하면, 삽비라와 아나니아를 당장 죽이듯이
그때그때마다 악인을 처리하시고 악한 자를 징벌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만,
그와 같은 진노는 지금 이 세상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시대의 ‘하나님의 진노’의 성격이 무엇이냐
바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세 가지입니다. 잘 기억 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진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맹렬하게 하늘로부터 죄인들에게
모든 경건치 않은 일에 대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없이 마음대로 살면서 잘되는 사람일수록,
형통하기만 하고, 아무 탈이 없이 예수 없이 그냥 행복하기만한 사람들,
남몰래 나쁜 짓을 아무리 범해도 그것이 들통이 나지 아니하고
끝까지 마치 돌맹이가 바다에 가라앉으면 다시 떠오르지 않듯이 드러나지 않고
그래서 기고만장한 사람들
이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생활을 계속 끝가지 할 경우에는
그것 자체가 바로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나 무섭습니다. 너무나 무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이 길을 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지요. 길을 하나 열어놨어요. 딱 한길 열어 놨어요.
롬5장 9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길을 하나 열어두었는데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모든 죄의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쏟으시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그 모든 죄를, 우리 대신 진노를 다 받으시고
우리를 그 진노에서 피하게 해주신 길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이 길을 만들어 놨어요. 이 길을 만들어 놓고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면서 십자가 밑으로 피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우리는
마음으로 감사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 내가 과거의 예수모르고 살 때 가만히 끝가지 내버려 두지 아니한 거 감사합니다.
끝가지 기다리지 않은 것도 감사하고요. 끝가지 덮어주지 않은 것도 감사하고요.
실패를 통해서, 불행을 통해서, 병을 통해서, 환란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빨리 깨우쳐주어서
십자가 밑으로 피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 복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가끔 잘못하면 매를 맞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그 무서운 진노 안에서는 떠난 사람입니다.
믿습니까? 할렐루야!
여러분 가정에 만약에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랑하는 식구가 있습니까?
남편일수도 있습니다. 부인일수도 있습니다. 자녀일수도 있습니다. 형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안 믿는데도 너무 건강하고, 지금까지 실패를 해본일이 없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무엇하나 아쉬운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지금 굉장히 위험한 자리에 있습니다.
누구의 진노아래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내버려 둔 것 인지도 몰라요. ‘어디 두고 보자!’하고 기다리는지도 몰라요.
그러므로 그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할 제목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 제발 내버려두지 마옵소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남편을 위해서 내버려두지 마옵소서. 기다리지 마옵소서. 언제까지 입니까?
하나님 덮어두지 마옵소서. 여러분, 이 기도 하실 수 있겠어요?
여러분 남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남편이 십자가 밑으로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 이 기도 할 수 있습니까?
이 기도 할 수 있어야, 우리는 그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에 가면,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이, 하는 사업이 너무나 잘 되어가지고
막 가정이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 합니다.
그리고 온 식구들이 건강해가지고 기름이 흐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께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가정에 얼마나 축복해주셨는지 모릅니다.
너무 자녀들이 잘 자라고요. 건강하고, 사업도 잘되고요, 이러고요, 저러고요..
그런데 성경을 바로 아는 목사가 들을 때는
‘예수 안 믿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데, 이러고요 저러고요 잘된다고 하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하는데
그것을 축복이라 하고 착각을 하며 앉아있으니.. 기가 막힌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 잃어버린 영원을 위해서 진짜 기도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세요.
‘제발 내버려두지 마옵소서. 기다리지 마옵소서. 덮어주지 마옵소서.
십자가 밑으로 빨리빨리 나아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상에 사람들을 보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 너무나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부한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이 많아요.
끝가지 그들이 그렇게 살면, 그들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당신이 지금 잘되는 것이 성공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당신지금 형통한 것 당신에게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빨리 피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 밑으로 피하십시오.’
하고 우리가 눈물로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을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심정입니다.
▶결론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인식을 바꾸십시오.
행복한 자를 보는 인식을 바꾸세요.
형통한 사람 성공하는 사람을 보는 시각을 바꾸세요.
성경이 그들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 실체를 우리가 다루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없이 사는 것을 성공할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럴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생각하면서
또 내 가정에 주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고 만사가 형통해서
교만에 빠져있는 남편 혹은 아내 자녀를 위해서
생각하면서 부를 찬송이 하나있어요.
269장입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값으로 지옥 형벌 너도 받겠구나.
웬일인가 내 형제여 제물만 취하다가.. 세상 물질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
참 과거에 우리는 이런 찬송 부를 때, 안 믿는 식구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불렀고
안 믿는 친구들 생각하면서 눈물로 부른 찬송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아십니까?
진노아래에 내버려둔 사랑하는 식구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런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 가슴이 타야합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값으로 지옥 형벌 너도 받겠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진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잘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부러워 할 때가 있지요?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안에 놓인 자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잘되면 잘될수록, 형통하면 형통할수록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누구하나 막는 사람이 없을 만큼 앞길이 확 트여있는 사람일수록
그는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을 무엇이라고 기도해야합니까?
‘주님 기다리지 마세요.
끝까지 가만히 있지 마세요. 주님 덮어주지 마세요.
십자가 밑으로 피할 수 있도록 주여 꺾어주세요.’
우리는 이런 기도를, 아무리 사랑하는 내 남편을 위해서 할 줄 알아야 되고,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고,
내 이웃을 위해서 내 민족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할 줄 알아야합니다.
한 목소리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답답한 사람 많아요? 기도합시다.
끝까지 끝까지 ‘하나님의 진노’안에서 살다가 망하는 자들, 그들을 가만히 두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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