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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

LNCK 2012. 11. 23. 10:07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      계3:1~5        12.11.18.설교녹취, 편집     


아래 설교의 전반부를 녹취, 편집했습니다.

☞http://blog.daum.net/dfgiyo/6080235


 

본문의 사데 교회를 보면, 3종류의 기독교인들이 나온다.


◑1.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갖고 있으나,

자기 이름에 걸맞는 활동도 하고 있으나, 그 영이 죽어있다.


차라리 자기에게 ‘살았다’하는 이름이 없으면,

‘나는 죽었구나. 나는 이렇게 하다가는 영원히 멸망 받겠구나’ 라고 인식한다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일어나려고 발버둥 칠 터인데,


실상은 자기 영혼이 죽었는데, 자타가 ‘살았다’고 자기를 인정해 주니,

자기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상태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고 본다.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가?, 그것도 직분자가 아닌가?’

‘내가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있는데..’

그래도 실상은 그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즉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멀어진 상태에서

얼마든지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라는 표현의 뉘앙스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제법 이름이 나 있다는 뜻이다.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신다.

겉이 아무리 잎이 무성해도, 그 속 본질이 죽어서, 열매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심각한 것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다.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또한 제법 이름과 명성까지도 얻었는데,

실상은 자기 영혼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 말씀이 만약 내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라면.. 대단히 심각한 사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살았다 하는 이름’에 안주하시면 안 된다.

내가 ‘주일학교 교사’이고, ‘몇 년째 계속한 성가대원’이라는 그 이름에 의지했다가는..

심지어 목사, 장로, 권사라는 직책이 내 구원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주교 교사, 성가대원, 장로, 권사, 목사를 하고 있으면,

거의 대부분, 자기 구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실 때는,

나의 과거, 현재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몽땅 다 처리하셨는데,

오히려 그런 구원 못 받을까봐 우려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불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시라.

성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선민이었다.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을 세워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분명히 약속하셨다.


그래서 바벨론이 쳐들어 왔을 때도, 그들은 일면 안심하는 면이 있었다.

‘우리는 언약 백성이고,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할례를 받은

선민이요, 택한 백성’이라는 보장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바람은, 여지없이 무참하게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바벨론 앞에서, 그들은 멸망을 당하거나

살아남은 사람은 포로와 노예로 잡혀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70년 후에, 그들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여러분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모조리 다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시는가? 아마 아니실 것이다.

예수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작정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100%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 ‘남은 자’만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브라함 언약’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이 적용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을 믿는 사람은 100% 다 구원된다’... 는 말도 맞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그 중에 남은 자만 구원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구약에도 ‘나는 언약백성이야’ 하고 안심하다가 멸망 받은 사람들이 있었듯이,

신약시대에도 ‘나는 십자가 언약 백성이야’하고 안심만 하다가는

사데의 일부(아니 다수) 교인들처럼, 예수님의 엄중한 책망과 경고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신학적으로 ‘은혜, 은혜, 사랑, 사랑’의 측면이 강조되면서,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즉, 실상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이면서도

신학적인 선입견 때문에, 자기 구원을 과신하고 있는 신자들이 너무 많다.


가톨릭교회에서 사제가 ‘여러분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회중은 대부분 침묵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원관은 ‘평생 이루어가고, 완성해 가야하는 구원’으로 보기에,

현재 자기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신중한 태도이다.


그런데 개신교회에서 목회자가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

회중은 대부분 ‘아멘, 구원을 확신합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신학적인 교육을 그렇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개신교인들의 자세는, ‘값싼 은혜, 값싼 구원’을 양산할 수도 있다.


어떤 교인들은, 제 설교가, 회개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어필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미래의 지은 죄까지 다 용서해 주셨다는데’

뭐 그리 우리가 울고불고, 난리치며 회개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저는 그런 어필을 받을 때,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는다.

제 속으로 ‘이게 바로 한국(세계) 교회의 문제로구나’ 라고 생각한다.


여러분, 중세 시대에는 면죄부가 있어서,

사람들이 자기가 회개해야 하는 것을,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일부 사람들은, 자기가 헌금생활을 충실히 하면,

그게 다 면죄가 되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는데, (헌금은 좋은 것이지만)

그게 면죄부식 헌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을 때, 정말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의 역사로

영혼이 거듭나서, 새 피조물이 되어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또한 처음에는 결단주의로 믿기 시작했으나, 나중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죄의 권능을 깨닫고, 죄의 두려움을 알기에.. 목회자가 회개해라 권면 안 해도.. 스스로 회개한다.

왜냐하면 혹시 죄를 지었을 때, 성령이 그에게, 속에서 회개를 강권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을 때, 결단주의로, 지식적으로

어렴풋하고, 모호하고, 회개 없이..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과 공로를 지나치게 믿어서,

자기 구원에 안주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안 된다.

왜냐하면 복음은 신비mystery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는 자만,

그 눈과 귀를 열어서, 그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이 설교의 흐름은,

자기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많다’는 것이다. 계3:1

직설적으로 공격하면,

‘교회를 평생 다녔어도, 구원 받지 못할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고, 오히려 많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다.)


여러분,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은

칼빈이 말한 <성도의 견인> 신학에서 유래된 것인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너무나 크고 견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신 사람은,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이 이론은 분명히 사실이고, 진리이고, 성경에도 많은 뒷받침 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런데 이 신학을 ‘결단주의로 예수 믿은 사람’

또는 ‘사영리 읽고서 10분 만에 예수 영접한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교리사>를 더 깊이 연구해 봐야 되겠지만,

이 교리가 발생하게 된 시기에, 개신교는, 항상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가톨릭교회가, 

갈라져 나간 개신교를 이단으로 낙인 찍고,

거기에 가입한 성도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라고 위협, 협박했기 때문에,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고 보니까)


‘아니다. 개신교회에도 구원이 있다.

하나님이 한 번 택하신 성도는,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라는

교리가 생성되었다고 본다.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만약 오늘날, 우리가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신학을 정립한다면,

칼빈의 ‘성도의 견인’ 신학보다는

‘성도의 구원의 완성’신학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관련글 마16장과 행2장 사이

 

 

◑2.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 


여러분, 본문에 더 무서운 말씀이 나온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한 번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삭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위 구절에서 ‘흐린다’는 말은, ‘지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개역개정/새번역/공동번역/현대인의 성경은

모두 ‘지우지 아니하고’라고 번역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경이 그렇게 쓰여져 있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가 되고,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는

주님이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구원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삶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진짜 구원 받은 성도는,

이기는 자가 되고,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게 되어 있다.

‘흰옷’은, 성도들의 선한 행실을 뜻한다.


만약 누가 구원은 받았다는데,

(계속적으로)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흰옷을 입는 선한 행실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가 받은 구원을 면밀히 재점검 해 보아야 한다.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자기 내면이 변화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죄를 두려워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며.. 자연적으로 그렇게 살게 되어있다.


여러분, 아침에 칫솔질을 의무적으로 하시는가, 자연스레 하시는가?

구원 받은 사람은, 의무적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그렇게 살게 되어있다.

그게 더 개운하고, 자기에게 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값싼 은혜’ 식으로 이끌어지는 곳이 많다.

아예 교회의 신학이, 교회 전체 분위기가.. 죄와 회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강조가 사라지고

(물론 율법주의적으로 죄를 지적해서도 안 된다.)

대신에 성공주의, 웰빙 라이프 같은 다른 토픽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가 이끌어지고 있다면,


그들 가운데는, 사데 교회와 같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또는

‘생명책에 이름이 한 번 기록되었으나, 지워져 버리는 사람’들이 양산될 것이다.


일생을 모태교인으로, 목사와 장로와 권사의 자녀로,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에는 내가 충실했지만,

그 외적 이름이 나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분들은, 더욱 자기 자신이 진지하게 개인적으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 위로부터 번쩍 하면서, 번개를 쳐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해 주셔서, 신앙의 신비와 깊은 것을 깨닫고, 믿게 될 것이다.


 

◑3. 영생을 가졌으나, 죽어가고 있는 자가 있다.


계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시면,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점차 그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키지 않고 그냥 그대로 놔두면.. 결국은 죽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도적처럼 오셔서,

그런 자들을 심판해 버리신다고 하셨다.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한 번 영생을 얻었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자가 있음을.. 위 계3:1~5절이 밝혀주고 있다.

 

예수님이, 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도적같이 임하시겠다는 것은,

상급을 주려 하심이 아니요,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혹은 자기가 급작스레 죽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세상 우상들에 취해서,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님이 도적과 같이 임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이다.

물론 이것은, 심판을 염두에 두심보다는, ‘그러므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내용을 대하면, 당황스러운 것이

신학적으로 ‘구원 받고, 생명책에 이름까지 기록되었다는데’

어떻게 그것이 취소될 수 있을까? ..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저는 그렇게 본다.

1. 극단적 회심 체험에 의해 구원 받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거의 대부분 안전하다.

    칼빈의 '성도의 견인' 교리가 적용되어, 그의 구원은 안전하다.

 

2. 그런데, 그 중 일부는,

구원 받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지만.. 혹시 타락하는 자들도 소수 있을 것이다.


3.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문제는,

결단주의와 쉬운 복음으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사실은 기복적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증해 보아야 한다.

회개 없이 예수 믿은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2번이든지, 3번이든지.. 공통적인 것은,

(교회를 안 다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께 이런 책망과 경고를 듣는 사람이 있으며,

사실 자기의 구원이 안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라는 신학적 잣대 하나만 갖고서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누가 10년 전에, 이런 예화를 고안해 냈다.

영이는 평소에 선생님 말씀에 늘 순종하며, 숙제를 꼬박꼬박 해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정이 있어서 숙제를 해가지 못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영이의 과실을 용서해 주셨다.

영이는 평소에 늘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이 적용되는 경우임)


그런데 똑같은 날, 영이 옆에 앉아있던 철수는

영이와 똑같이 숙제를 해 가지 않았는데, 호되게 혼이 나고, 벌을 섰다.

선생님이 편파 판정을 하신 것일까?

왜 영이만 용서해 주고,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철수에게는 가혹하게 대하셨을까?


그것은 철수가 평소에도 늘 선생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평소에도 걸핏하면 숙제를 안 해 갔기 때문이었다.

그날 또 숙제를 안 한 철수에게는, 가중 처벌이 적용되었다.


이 예화는 일부러 고안한 것인데,

<성도의 견인, 한 번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다>는 사상은,

영이에게 해당되는 경우이지,

철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철수에 해당하는 많은 신자들이

단순히 어떤 신학 하나에 자기를 의지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담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마귀의 미혹을 받은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의 계명을 완벽히 다 지킬 수는 없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 자에게는,

살다가 간혹 실족할 때가 있지만,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게 되고,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성도의 견인)이 적용되는 것이다.


교회의 종말론적 배교/ 데이빗 윌크슨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