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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

LNCK 2012. 11. 26. 10:19

◈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       요18:1-14, 사50:5-11       요한복음강해109강中일부, 출처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마시라고 주신 잔(殘)이 나옵니다.

잔(殘)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더러 십자가에 죽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조선 시대 임금이 사약(死藥)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 하고 덥석 받아 잡수시고 있어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무슨 이런 고약한 이야기가 다 있나요?

어느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준단 말입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죽으라고 한다고 해서 예!~ 하고 죽는 자식이 또 어디에 있답니까?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살리고자 하지 죽이고자 하지 않아요.


어째서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 넘기우는가 입니다.

죽음에 넘기 울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또한 예수님도 아버지의 명(命)을 따라 죽는 길을 나선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과 다니면서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 아비가 누가 있으며,

자식이 고기를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자가 어디에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이해하면 자식이 돌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고,

자식이 전갈을 달라고 하면 고기를 주는 것이 아비의 심정이란 말입니다.

이처럼 아비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하시는 일은 다 사랑인 것입니다.

그럼 오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마시라고 하신 죽음이라는 쓴 잔도..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알아봅시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힘을 축적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神)에 도움을 구합니다.

인간들이 신(神)을 찾는 것은 신(神)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힘을 주는 신(神)을 참 신(神)이라고 섬깁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고로 신(神)을 찾는 행위를 우상숭배(偶像崇拜)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생래적으로 우상숭배적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신(神)과 거래하는 거에요.

내가 신(神)을 섬겨 줄 테니 신(神)은 나에게 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독자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게 간섭을 하십니다.


그게 출애굽기에서, 애굽에서 종으로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에서 의지 할 것을 없게 하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독자적인 힘을 갖거나

그 힘을 의지하고자 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당하게 됩니다.


이사야 31장을 봅니다.

(사 31:1-3)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도움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가는 자는 화가 있다’고 하지요.

애굽은 세상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에 힘을 얻고자 하는 자는 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세상 것을 힘을 삼고 의지하고자 하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애굽의 힘이 뭔가요?

병거와 마병이에요.

문자적으로 말하면 군사력을 말하지만, 지금 식으로는 금력을 말해요.


오늘날 세상의 힘이 뭔가요?

돈이고, 권세이고, 명예이고, 능력이에요.


자본주의 시대에는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와요.

그러므로 이 시대 최고의 힘은 돈입니다.

실제로 인간들이 신(神)을 찾는 것은 돈을 얻고자 함이지 신(神)이 아니에요.


이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한 것과 같아요.

사람들은 떡을 원하지 임금을 원하지 않아요.

그들에겐 떡이 곧 임금이에요.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은 예수가 좋아서가 아니고

예수를 통하여서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에요.


그들에겐 예수님은 하나의 직장이에요.

자신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해요.


그래서 제자들끼리도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암투를 벌렸어요.

예수가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도 한 자리 해 먹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그 날을 위하여 참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게 생겼어요.


지금 로마 군사들이 무장을 한 채 예수님을 잡으러 왔어요.

예수가 잡혀가면 제자들은 끝장이에요.

지금까지 투자한 세월이 물거품처럼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그래서 어찌 하든지 예수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가 살아남아서 자기들의 꿈을 이루어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 모두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과

일전불사를 외칩니다.

칼을 빼들고 군사들과 맞섭니다.

급기야 군사중 하나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를 지키고자 함이 아니고 떡을 지키고자 함이에요.

제자들에겐 예수는 출세의 수단이에요.

곧 힘이고 재물이고 떡이에요.

예수가 살아 있어야 자기들 입에 떡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달라고 예수를 임금으로 삼고자 하던 군중들이나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제자들이나 다 똑 같아요.


예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지고 있는 것에 관심을 두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그 떡을 주어야 할 예수가 죽게 생겼어요.

죽으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아요.


그럼 지켜야지요.

적과 싸워서라도 예수를 죽게 하지 말아야지요.


베드로는 칼로써,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얻고자 했어요.

그래서 예수를 지킨 겁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십니다.

순순히 잡혀 주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합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납득이 안가요.

칼을 거두라는 말은 힘을 거두는 일이에요.

칼을 무기로 삼는 자들에게는 칼은 곧 힘이에요.

그러니 칼을 거두라는 말은 곧 힘을 거두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힘을 거두어 가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겁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힘을 빼앗는 일을 하시고 있는 거에요.


칼을 돈이라고 한다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돈을 거두어가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 할 것을 빼앗는다는 말입니다. 왜 빼앗나요?


이는 성도가 의지할 것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지 돈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재물을 의지하든지

둘 중 하나를 의지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살다가 보니 세상의 가치관을 버릴 수가 없어요.

세상 것의 유혹을 늘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도움을 구하려고 세상과 짝하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징벌을 가해요.


‘너 왜 날 믿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왜 썩어질 것을 구하고 있느냐?’ 하십니다.


애굽은 사람이지 신(神)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애굽의 힘은 땅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영이 아니고 육체라고 합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육은 죽이는 것이에요.

애굽의 힘은 영이 아니고 육이라는 말은

애굽에 속한 것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산 자인데 어째서 죽은 것을 구하느냐!

왜 힘도 아닌 것을 의지하고자 하느냐! 입니다.


땅에 속한 것들은 다 멸하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땅에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을 의지하면 땅이 망할 때 함께 망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땅에 것은 의지하고자 하면

반드시 징벌을 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땅의 힘을 주지 않고, 하늘의 힘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람을,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십니다.

이건 아브람이 믿고 의지할 것으로부터 빼내신 거에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기근이 듭니다.

아브람이 먹고 살고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겁탈을 당하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징벌을 가하신 것입니다.


룻기에 보면 이러한 사건이 또 나옵니다.

나오미라는 여인이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자 모압으로 이사를 갑니다.

모압은 이방 땅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남편도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의지할 것을 없게 하십니다.


결국 나오미는 애굽에 도움을 구하러 갔다가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고

생과부가 되어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와서 하는 고백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국가적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되면

선민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당하게 되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윗도 인구 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혹독한 징계를 당하였어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우상성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상성이란.. 하나님을 수단화 하고자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을, 세상에 것을 얻고자 하는 수단화 합니까?

이는 세상에서 붙박고 잘 살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 곳은 하늘이지 땅이 아닙니다.

성도는 땅을 떠나야 할 자들이지!

땅에 코를 박고 살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수단화 하여서 땅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우상 성을

깨트려 주어야 합니다.


인간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가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걸 사도 요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며 마귀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이러한 마귀적인 것들을 빼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 것을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힘을 빼앗김을 당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빼앗김을 당하는 것이에요.

반면에 우리는, 신앙을 세상의 꿈을 이루는데 이용하고자 해요.

헛된 꿈을 꾼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의 헛된 꿈을 깨트리는 일을 하세요.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결혼은 멀어진 눈을 되돌려준다” 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꿈이고, 결혼은 실제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연애하는 것과, 결혼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연애는 환상이에요.

동화 속 이야기와 같아요.

동화 속 이야기는 아픔이 없어요.


연애 할 때는 눈에 콩깍지가 끼어서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아요.

아픔도 없어요.


그러나 결혼은 실제에요.

모든 것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눈에 콩깍지가 벗겨져서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나요.

이때부터는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허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아픔을 당해요.


그래서 결혼은 멀어졌던 눈을 되돌려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서로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서로의 실상을 보게 되는 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어요.

이때부터 싸움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환상을 깨트리는 무덤’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래요.

듣는 복음은 환상이에요.

복음을 들을 땐 기쁘고 좋아요.


그러나 그 복음이 삶으로 나타날 때는 엄청난 아픔을 동반해요.

복음을 듣는 것은 연애하는 것과 같아요.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엔 아픔이 없어요.

그러나 습득되어진 복음이 실제로 우리 몸으로 표현이 되어질 때는 아파요.


복음이 관념이면 신앙생활이 환상으로 치달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눈을 멀게 해요.

아픔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사들처럼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았더라가 아니에요.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서 살아요.


영혼은 천국을 누리지만, 현실은, 일정(오랜)기간 동안 지옥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버림당하여지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이 되어서 죽임 당하는 삶을 살게 된단 말입니다.

나오느니 한숨이고 감사가 아니라 도리어 원망이고 불평이에요.

날마다 옛 사람과 피 흘리고 싸우는 전쟁을 치루는 싸움이에요.


이론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것은 알아도

그건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실상에선 그와 반대의 현상들이 나타나요.

우리 안에서는 매사에 불평이고 원망이 쏟아져 나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미워해요.

육신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 아니고 고통이에요.

신앙생활 속에는 우리가 꿈꾸던 환상들이 깨어지는 아픔들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 동안 신앙을 빌미로 세상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이젠 그 꿈을 버리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우리에게 그대로 덮쳐온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검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시는가요?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지요.

검으로 하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시지요.


오늘 본문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군사들이 검과 철퇴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자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기 안에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칼로 말고의 귀를 잘라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고쳐 주면서,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동일한 위험에 처하였는데도, 베드로와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베드로는 자신을 위협하는 자를 가해(加害)하는 방식으로 반응을 보인 반면에,

예수님은 베드로가 가해한 자를 치유(治癒)해 주는 모습으로 반응을 하셨어요.


베드로는 원수를 죽이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원수를 살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죽음을 토해 내는데, 예수님은 생명을 토해내고 있어요.


이건 베드로 속에는 죽음이 가득차 있다는 증거이고,

예수님 안에는 생명으로 가득차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말고의 귀를 고쳐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검을 꽂으라고 하신 것을

더 확대 하여 해석을 한다면, 너희들은 죽이는 자가 아니라

이제는 살리는 자로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알려 주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암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은 죽음의 길로 나섭니다.

마치 한 일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많은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는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생명은

하늘에 생명을 가진 자의 죽음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인간의 본능에 반대하는 행동이에요.


예수님은 본능에 반(反)하게 도리어 자신을 죽음에 넘기어 줍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하면 “아버지가 날 더러 죽으라고 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한다” 는 말은 미리 약속이 된 것을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성경에는 미리 예언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말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을 언약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도 죽음을 두려워하였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죽지 않게 해 달라고 땀이 피가 되듯이

세 번씩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기도를 했어요.

이러한 것은 우리와 동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 하실 때 아버지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서

십자가를 지는 길로 나아가도록 수종을 들게 하셨어요.

즉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설득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설득했나요?

언약을 위하여 죽으라고 설득했어요.


왜 죽으라고 설득을 합니까?

그게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 올 때 아버지와 맺은 언약이거든요.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예수님이 죽어야 창세전 언약이 성취가 되어요.

자기 백성들이 살아 난다구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안 죽겠다고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자 아버지가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시는 겁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아버지와 창세전에 맺은 언약을 기억하라고

상기시켜 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천사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성령이 예수님을 언약 안으로 밀어 넣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사들이 왔을 때 육신의 본능에 반하는 모습으로

선뜻 제자들을 가로막고 나서면서 날 잡으라고 하신 겁니다.


이러한 마음을 제자들은 몰라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의미를 몰라요.

그래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칼이라는 힘을 믿고 나선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모든 제자들의 행동을 대표하고 있어요.

우리도 베드로의 행동 속에 포함 되어 있어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는 지금 칼이라는 힘으로서 세상 권세를 이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건 결국 세상의 방법이에요.


이에 예수님이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검을 집에 꽂으란 말은 순순히 죽으란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약에 예언된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


그럼 구약에 미리 예언된 것을 살펴봅시다.

이사야 50장을 봅시다.


(사 50:5-11)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찌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찌어다

9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11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찌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5절에 “여호와께서 내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뜻을 알려 주셨다는 말이에요.

즉 언약을 알려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쓴 잔을 안 마시고자 아버지께 기도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천사들을 보내서 쓴 잔을 마시라고 수종을 들게 합니다.


이걸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귀를 열어주셨다” 고 합니다.

“언약을 기억케 하셨다” 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라면서

거절하지 않고 쓴 잔을 마시겠다고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등을 내어 맡겼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러는 거에요.

아버지께서 자기 귀를 열어서 미리 예언된 것을 기억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안 죽으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내 귀를 열어서

‘아들아! 네가 죽어야 창세전에 나와 맺었던 그 언약이 이루어진다’고 알려 주더란 것입니다.


그러니 너를 죽이고자 온 자들에게 순순히 네 몸을 맡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 놈들이 너를 때리고 침을 뱉고 수욕을 가하더라도 피하지 말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7절과 9절에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다” 고 하는 대목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이라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가 곁에서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도와주심으로서 십자가의 고난과 수욕을

이겨 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자기를 비워서 복종 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너를 죄인이라 정죄하더라도

아버지는 네가 의롭다는 것을 다 아시니 염려 말라는 겁니다.


지금 횃불을 들고 너를 죽이려고 온 자들은 내가 심판 하겠다고 하십니다.

네 원수를 내가 갚아 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그 놈들이 들고 온 그 횃불에 타서 죽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지옥에서.)

결국 아버지는 예수님은 원수를 심판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로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는 대속 제물로서의 죽음이에요.

둘째로는 원수들을 심판하는 근거로서의 죽음이에요.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하여서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자

제자들의 죽음을 자신이 대신 담당하고자 날 잡아 가라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자신들을 죽이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인 어둠에 세력들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아들을 죽음으로 내 밀고 있어요.

살고자 돕는 것이 아니고, 죽으라고 돕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해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 속에는 우리의 모습도 담겨져 있어요.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된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운명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덮쳐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는 말 속에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가 있어요.

첫째로는, 칼에 힘으로 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힘을 의지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언약을 위해서 죽음에 넘기워진다는 말입니다.

언약을 위하여 제물로서 희생이 될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즉 예수님처럼 언약을 위하여 고난당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서의 쓴 잔을 마시는 등 떠미심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고 하는 겁니다.

살고자 하지 말고 죽으라고 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자신의 죽음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떠미는 일을 시키십니다.


이게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19: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요.

그리곤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찾아 가셔서 평강을 전합니다.


여기서 평강이란? 하늘나라 평강이에요.

죽음을 이기고 얻어진 평강이에요.

그리고는 파송을 하십니다.


어떻게 파송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파송 하신 그 원리에 따라서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지요.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어떻게 보냈는가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어서 그들의 죄사함을 주시기 위함으로 보내셨잖아요.

그와 똑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죄사함을 위하여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죽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일에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죽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새 언약이라는 복음을 증거 하다가 죽임 당해요.


이게 두 증인들이 죽음이에요.

그러니 제자들이 죽음 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를 이 세상에 파송을 하였는데 그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면서 너희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내 백성으로 간주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주십니다.

이제 성령이 주도적으로 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이끌림으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출교를 당하고 죽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죽음의 두려움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성령을 주어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여금 제자들을 돕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 할 때

아버지가 천사들을 보내서 수종을 들게 하신 것과 같아요.


성령이 제자들을 예수의 길로 가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하나 같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다가

죽음에 넘기어지게 되었어요.

극심한 핍박 속으로 뛰어 들게 되었어요.


단 한 사람도 예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잘 산 사람이 없어요.

모두가 비참 할 정도로 고난을 받고 죽임 당했어요.


모두가 예수님의 운명으로 밀쳐짐을 당하고 예수님처럼 쓴 잔을 마시고 죽었어요.

우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해요.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다고 하셨지요.

이건 싸우러 보낸 것이 아니에요.

죽으라고 보낸 겁니다.


지금 이 원리가 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원리에요.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낼 때 죽으라고 보냈어요.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겁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죽는다는 이름이에요.


그런데 그 일을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하고 있어요.

예수의 이름으로 이리 가운데로 가서 죽으라고 보내고 있어요.

제자들은 예수가 되어서 이리들에게 잡아먹히려고 보내어진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숨어서

이리에게 먹힘 당하기 위하여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을 이리의 먹잇감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의 먹잇감으로 보내신 것과 같아요.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죽였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 손에 죽게 한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긍휼로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린 예수를 죽인 자들이에요.

그리고 그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용서를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안으로 귀속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살게 만드셨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 역사라는 세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매카니즘이에요.

하나님은 성도들도 이 원리로 다루어가세요.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