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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6:12~42 이와 같이 기도하다

LNCK 2013. 1. 4. 07:56

 

◈이와 같이 기도하다         역대하6:12~42              설교녹취, 출처

 

본문 역대하 6장은 솔로몬이 완공된 성전 낙성식을 하면서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내용입니다.

 

열왕기에서 우리가 읽었던 기도내용과 대동소이하지만

그러나 이 솔로몬의 기도는, 오늘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기도,

또 성전에 나아오는 심지어 이방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기도는 크게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하는 기도이지만

궁극적으로 죄의 용서가 기도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도는,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6:12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과 마주 서서 그의 손을 펴니라

:13 솔로몬이 일찍이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5규빗이요 너비가 5규빗이요

높이가 3규빗이라 뜰 가운데에 두었더니 그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만 의식이 될 때,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수많은 기도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고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가장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죠지 뮬러도

늘 성경을 읽을 때, 자기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무릎을 꿇고 성경을 4~5장 읽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습관이나 버릇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늘 정말 골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으로

자기 무릎을 꿇고 그렇게 성경을 .. 죠지 뮬러는 읽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죠지 뮬러는 시68:5절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라는 말씀을 어느 날 강하게 받게 됩니다.

 

아무렇게나 성경을 읽다가 이렇게 말씀을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정성을 들여서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확신에 차서, 뮬러는 고아원을 시작합니다.

아무 재원도 없이 시작했으나,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수많은 기도응답을 경험합니다.

 

정말 먹을 양식이 떨어져서 그냥 고아들과 함께 기도하고

당장 먹을 게 아무 것도 없고, 우유도 다 떨어졌을 때

기도하면 신기하게 그 다음날 아침에 우유차가 배달 가다가 고장이 났는데

하필 그 고아원 앞에서 고장나게 되어..

우유차는 어쩔 수 없이 이유를 고아원에 기부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그의 고아원 사역의 시작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받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솔로몬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백성들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앞이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양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원래 단을 만든 것은, 손을 들고 기도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이 올라가서 훈시하는 것과 비슷한 단입니다.)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2.5x2.5x1.5 미터되는 단입니다. :13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동이요

그리고 기도의 자기 진정성을 드러내는 자세입니다.

기도가 성숙되신 분일수록, 이런 기도의 자세를 스스로 훈련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 사도를 ‘낙타 무릎의 소유자’로 부릅니다.

초대교회를 섬겼던 야고보는 얼마나 무릎을 꿇고 오래 기도했는지

그의 무릎이 낙타무릎처럼 편평해져 버렸다고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어쨌거나 지도자가 된다는 것, 왕위에 오른다는 것

한 국민을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된 다는 것은

기도의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끌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스스로 이끌지 못하고 조변석개처럼 늘 변하는데

사람들을 이끌어 자기를 따르게 한다는 일은.. 정말 기적이 날마다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기도했듯이.. 기도를 통해서.. 백성들을,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한 몸도 스스로 제어하고 절제하기가 쉽지 않은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종종 집에서도 보면, 자녀에게 존경 받는 부모(지도자)가 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아주 어렵습니다.

내 힘으로는, 자기 가족도 못 이끕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거죠.

그게 겸손의 자리고, 그게 내 주제를 파악하는 길입니다.

 

사람이 내 속을 썩일 때마다, 사람하고 다튀봐야 소용없습니다.

사람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그 사람하고 갈등을 빚어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게 우리의 본분이지

내가 그 사람을 어디로, 어떻게 끌고 갑니까?

 

▲그러나 지도자들의 착각은 ‘내가 사람들을 통제하고 이끌어간다’는 것이죠.

이게 진짜 교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교만의 속성입니다.

모든 교만은, 권력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니체는 그걸 ‘권력 의지’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남을 권력으로 지배하려는 속성!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세상 역사를 BC와 AD (주전 과 주후)로 확연히 갈라놓으셨습니다.

어떻게 갈라놓으셨습니까?

 

그것은 인간 즉 죄인이 살아가는 본능적인 권력의 패러다임을

섬기는 사랑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신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BC와 AD (주전 과 주후)로 확연히 갈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AD (주후)의 시기를 살고 있지만

내 속에 ‘권력적 의지’가 사라집니까?

 

모든 죄인들에게 있는 의지는, ‘권력적 의지’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끌고 가겠다는 것이죠.

또한 내가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할 때는, 부부가 안 싸웁니다. (권력 의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서로에게 권력 의지가 발동합니다.

 

누가 이 집의 머리냐? .. 이걸 놓고 다툽니다.

누가 이 집에서 발언권이 더 세냐고.. 그걸 가지고 그냥 부부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으로 섬긴다는 것은

피차 권력의지를 스스로 꺾고, 그의 종이 되는 그런 삶의 태도를 사는 것인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기도도 하지만

심지어 자기 권력의지를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꺾어놓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바꾼 원리는 간단합니다.

내가 권력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섬기는 것입니다.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고

내가 그 사람한테 듣고 싶은 어투로, 내가 바라는 바 그의 말을 듣고 싶은 대로

내가 그 어투로 먼저 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내 삶의 종교개혁, 신앙개혁입니다.

 

무슨 권력을 가지고 이 공동체를 개혁하자는데.. 개혁이 안 됩니다.

권력은 악순환을 일으킬 뿐입니다.

 

누가 권력적인 억압을 받은 사람이 자원해서 순종하겠습니까?

굴종, 맹종할 뿐이지요.

 

물론 행동으로 무릎 꿇기 전에, 내 마음의 무릎을 먼저 꿇어야 하고

교회에 나와서 무릎 꿇기 전에, 집에서 골방에서 기도하며 무릎을 먼저 꿇어야 하고

주님 앞에서 날마다 무릎을 꿇는 마음의 태도와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6:14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그래서 기도는..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그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앞에 꼼짝을 못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약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다’는 언약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아들을 다 돌보시고 책임져 주실 줄을 믿고, 고아원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솔로몬은 계속해서 무슨 기도를 드렸냐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확실하게 지키시옵소서’ 하고 나서 18절 이하를 보십시오.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하면 이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21~23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21

 

백성들은 즉 사람들은 끊임없이 죄를 짓겠지만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25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27 주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또 22~23절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에게 범죄하므로 맹세시킴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의 행위대로 그의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위 23~24절에 보면, 공의에 따라 응답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사 행위대로 그의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그가 만약에 거짓을 행하고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거짓에 합당한 것을 돌려주시고,

의로움으로 와서 주님께 억울함을 토로하거든

그의 의로운대로 갚아주소서!’

 

:24~25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주께로 돌아와서 이 성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설마 솔로몬이 장래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상했겠습니까? No

그러나 솔로몬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그가 신명기 사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적 역사관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백성들은 축복을 받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어긋한 백성들은 반드시 3~4대로 저주가 내려갈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나거든

주님 그 땅 가운데서 다시 회개할 때, 돌이켜주시고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26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는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27 주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죄악 때문에 만약 하늘 문이 닫힌다면, 죄악 때문에 기근과 가뭄이 든다면

그런데 백성들이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할 때

비를 내려 주옵소서..

기근, 전염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병들이 만약에 죄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자연재해의 많은 부분들이

인간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개념 자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면서 하나님마저도 거부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모든 재앙이 인간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인간의 죄악이 재앙의 많은 부분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어떤 일들 가운데서도, 인간이 초래하지 않은 일은 사실 없을 것입니다.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지만.. 그 일들이 사람들이 (죄악으로) 초래한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회개하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의 전제이고, 기도의 자리에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지요.

 

▲저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당장 비록 응답이 없다 할지라도

어쩌면 내 생전에도 기도가 응답 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씨앗은 반드시, 내 사후에라도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백년 뒤를 내다보고 기도한 선조들 덕에

지금 우리가 그 기도의 응답의 덕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1백년 ~2백년을 앞두고 기도하는 씨앗을 뿌린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은총들도

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과거에 뿌린 씨앗의 결과들입니다.

그걸 인정하면, 우리도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당장 그 기도의 응답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부르짖는 것은, 자주 언급하는 것은

우리가 다음 세대에 신앙을 유업으로 물려주지 않으면,

다른 어떤 좋은 것을 물려준다할지라도 그게 무슨 큰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득은 GNP는 몇 만 불, 5만불 만들어주더라도

신앙을 물려주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후손들이 허랑방탕할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장래를 멀게 보고, 기도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방인에 대한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그들이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모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32~33

 

물이 바다를 덮는 것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이 모든 솔로몬의 기도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주기도문’과 흡사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아주 내용이 비슷하고 일치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중보기도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게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어떤 종교의 기도와도 다른, 기도의 본질적 차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이 기도의 통로를

우리가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근심하시겠습니까!

그런 기도에 굳이 왜 응답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오려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늘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서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곁에 가까이 있냐/ 없냐?

하나님의 마음에 지금 합한가/ 아니한가? 그걸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기도의 자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입술을 통해, 이 나라 이 민족이 지켜질 것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에게 통일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북녘 땅에서도 예배가 드려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솔로몬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실 통일을 소망하면서

북한 땅에서도 예배가 드려지는 꿈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아무도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기도는 응답될 줄 믿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를 두려워했던 영국처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군대를 두려워하는 나라가 아니라

경제를 두려워하는 나라가 아니라

성도들의 기도를 두려워하는 나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들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일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을 고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한 사람의 기도라도 진실한 기도라면

이 땅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 아침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나님, 이 땅을 고쳐주옵소서!

이 백성을 이 민족을 고쳐주옵소서!

 

이 땅에 진정한 통일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북녘 땅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북한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세상에 넘침 같이 가득 넘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