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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라2

LNCK 2013. 1. 22. 20:23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라2        계3:21, 마25:34~35        설교일부녹취, 출처보기

 


위 출처의 22:30~끝까지 녹화, 녹취                                       *3rd time posting


◑먹는 것이란.. 그 먹는 대상과, 먹는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어떤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과 내 몸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만약에 그 음식이 소화가 안 되고, 내 몸과 하나가 안 되면,

토사광란이 나서 음식을 뱉어내든지, 아니면 설사를 해서 음식을 배출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나와 하나가 되시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전에 사울이었을 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까지 가서,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강한 빛을 보게 되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여러분, 사울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고통을 주었는데,

예수님은 하늘에서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를 핍박 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 하는 것이 됩니다.

성도 속에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님과 한 몸인 이유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아파하면 예수님도 아파하시고

내가 힘들어하면 예수님도 힘들어하십니다.


예수님과 나는, 서로 떨어져 분리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머리가 둘이 달리고 몸이 하나였던 아이’처럼,

몸인 내가 아파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도 아파하십니다.


여러분의 영이 열려서, 나뿐만 아니라 형제 한 사람, 자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돕는 마음으로, 이웃을 도와야 하며,

이웃이 병들고 헐벗었을 때, 예수님을 대접하듯이 그들을 돌봐야 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25:34~35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먹었는데, 예수님 따로, 나 따로가 되면,

예수님이 나를 토해 내치시든지, 뒤로 배출되든지.. 예수님은 그를 내치실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살과 피를 나누며, 임마누엘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내 피와 살을 먹으라고 하니까, 다 뿔뿔이 도망갔는지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과 피를 먹음으로,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지식으로는 아는데, 실제 현실의 삶에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 신앙의 절정 부분에 올라갑니다.

엡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 수준까지 우리도 신앙이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교인들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으로 상대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이걸 알면, 내가 지금 주님과 너무 같이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 기쁩니다.


이렇게 주님을 뵙고, 주님과 하나가 되고,

형제와 자매들도 주님과 한몸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정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먹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제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며 사십니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과 내가 하나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셔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지 아십니까?

주님을 먹고, 그로 힘입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6:57


신앙의 정점, 정상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른 사람은, 정상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이단이 되기 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예수다’ 하면서 허튼 소리를 하게 됩니다.

박태선, 문선명.. 다 그렇게 해서 이단이 된 것입니다.


정상에 올라가면, 즉시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기서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여기가 좋사오니, 주님이 원하시면..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우리가 여기에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절하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온 후,

‘내가 죽고 부활할 때까지, 이 변화산 경험을 절대 이야기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마17:9


나 같이 깨어진 진흙덩어리 같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는, 속히 그 아래로 내려와서, 우리는 현실을 살아야 합니다.

정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나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그분과 한 몸이 되었고, 그 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나의 머리가 되시고, 나는 그 분의 몸이 되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의 절정, 그리스도와 긴밀한 하나됨을 주신 이유는,

높은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우리는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찬양하기 위하여,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베드로가 고백했을 때,

베드로에게 교회도 세우고, 천국의 열쇠도 주시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그 이름까지 시몬에서 반석 베드로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는다. 내가 그리스도다’ 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이제 확실하게 나타내신 후에,

주님이 하신 일은, 십자가에서 죽는 일을 계시하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그 하늘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에,

확실하게 하신 것은, 이제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구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이단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 산에서 집을 짓고 살려면 사탄이 됩니다.


최근에 저는 미국 서부의 4,500미터 휘트니 산 정상에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휘트니 산  꼭대기에는 바람도 거세고 춥습니다.

그 산 정상에 올라가자마자 ‘하나님, 여기에 올라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딱 그 한 마디 기도하고, 즉시로 내려왔습니다.


거기가 좋다고 쉬면서, 사진 찍고 그러면.. 고산증으로 머리가 빙빙 돌게 됩니다.

그러면 고산증으로, 누가 부축해 주지 않으면, 혼자로는 산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 정산에 오래 머물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생명이 되었으면,

이제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세상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으면, 스데반처럼,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다 자기 생명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3:21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설교하면서,

위 본문의 보좌는, 하나님 보좌 우편의, 그리스도에게 주신 보좌인데,

그 보좌에 우리를 앉히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일부 신학자들은, 너무 귀한 그 영광의 보좌에

어떻게 우리를 거기에 앉히겠느냐..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

혹은 예수님 의자 옆에 다른 의자가 있든지.. 하면서, 위 본문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그 영광의 보좌에, 우리를 앉히실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면서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으니까요.


예수님이 지금 농담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자기 보좌에 앉게 해 주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그저 상징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그대로 문자적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기는 자에게 둘째 사망을 면하게 해 주시겠다고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셨고,

사데 교회에는, 이기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이기는 자에게는 우리 이름을 그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게 하겠고,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이기는 자에게, 주님의 보좌에 (주님과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21


그런데 말세의 교회를 예표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이 교회 밖에 서 계십니다. 계3:20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며 큰소리치는 그 교회에,

주님이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 매우 큽니다.

‘주님의 보좌에, 이기는 자(우리)를, 거기에 앉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진정으로 신앙생활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가 그만큼 적을 것을 예상하시고,

예수님이 아주 파격적인 상을 제시하신 것은, 혹시 아닐까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을 원합니다.

교회도 그 길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를 먹고 하나가 되고, 그 하나가 된 그 사명을 따라서

주님처럼 죽으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예수님의 보좌에 예수님과 함께 앉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21


누가복음에도 비슷한 표현이 이렇게 나옵니다.

눅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이기는 그에게’ .. '그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수형입니다.  소수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이기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와 하나가 되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사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우편에 앉아계신 보좌를,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그 보좌에 앉기를 소원합니다.


정말 내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도 좋은데,

그 주님의 보좌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광과 축복을 누릴 성도가, 그만큼 많지 않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정말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 영광의 자리를,

‘이기는 그에게’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3:21절에 ‘내가 이기고’ 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이기셨나요?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세상과 전쟁해서 이기셨나요?

아니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이기셨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기셨어요. 


예수님처럼,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써, 이기는 그에게, 보좌의 자리를 주시겠다는 겁니다.


요한과 야고보 두 제자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자기들은 그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세상적인 승리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십자가 지시러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가로막고,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하실 일인데, 내가 마시는 이 고난의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네 있습니다!’  막10:38~40

 

그게 십자가의 죽음인지도 모르고, 두 제자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로부터 약 17년 후, 주후 47년에, 야고보는 목베임을 받아, 최초로 순교했습니다. 행12:2

저는,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본문 3:21절이, 야고보 사도에게 제일 먼저 적용된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성령 받고 설교 한 편 하고 나서,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예수님께서 앉아 있던 보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왜 일어나셨을까요? 그의 영혼을 맞이하신 후에 함께 앉으시려고,

예수님이 그 보좌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치는 말

‘이기는 자에게, 그 보좌에 함께 앉혀주신다!’

‘이긴다’ .. 주님처럼 십자가에 죽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정상에 올라가시면, 그 정상에 오래 머무시면 안 됩니다.

히말라야의 어느 정상에 올라갔던 일본인 사진기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장갑을 벗고, 단 5초 동안 셔터를 눌렀는데,

그것 때문에 나중에 동상으로 손가락을 잘라야 했답니다.

정상에 오래 머무시면 안 됩니다. 즉시 십자가 지는 자리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 번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보좌에 함께 앉는 영광,

그 찰싹거리는 바닷가에서 발버둥치지 마시고,

제가 정말 주님을 먹기 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겠습니다.


이 생명보다 더 귀한 사명을 위해서, 제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영광의 초대에, 주님과 함께 앉겠습니다.

이 소망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기는 그가 우리 각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이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는 특권을 저와 여러분이 받아 누리게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