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저축’을 하며 사십니까? 벧전4:12~13 편집자 글
▲살다보면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은, 저축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비싼 차를 타면서 자기를 과시하거나,
여자인 경우, 명품 옷과 가방과 구두를 사서,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또는 국내외로 여행도 가고 싶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외식도 자주 하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그럴 경우, 저축을 통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자기의 모든 소비 욕구를 절제하고,
미래와 노후를 대비해서, 성실히 저축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런 마음을 품게 됩니다. 정말 성실한 인격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중국인이나 과거의 일본 사람은, 저축을 많이 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일부) 중국인들은 수입의 70% 이상을 저축한다고 합니다.
지금 중국인들이, 동남아 화교 상권을 넘어서,
온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고, 온 세계에 투자하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은 ‘자기 수입의 상당량을 저축’하지 않고는,
저렇게 자본 및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나라에 가 보면,
그 국민적 특성이 ‘저축을 거의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저축할 돈이 없기도 하겠지만,
혹시 돈이 생겨도.. 저축을 하는 생활습관이 없다고 합니다.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
그들의 생각 속에는 ‘오늘’이 ‘내일’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현재’ 누리는 것을, 늘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저축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축이 도가 지나쳐서,
한마디로 인색한 ‘스크루지 (영감)’ 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자녀에게도 인색하고,
친구에게도 늘 얻어먹기만 하고, 구제나 헌금도 할 줄 모른다면..
저축을.. 무조건 장려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꼭 많은 돈이 아니더라도, 적은 수입을 갖고도,
삶을 풍요롭게, 질적으로 살며, 서로 우애하며 아름답게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미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합니다.
비록 많지 않은 수입이지만,
화초나 화단을 가꿀 줄 알고, 음악이나
예술을 즐기기도 하며 (돈 안 들이는 방식으로)
자기가 사는 집도.. 아담하지만 아늑하게 꾸며놓으며,
상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지만, 맛있는 단품 요리를 만들어서,
가족과, 이웃과, 친구, 친척들과 나눠서 먹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 웃으며 우애하고, 격려하고, 만나면 서로 푸근한 인간관계...
비록 수입은 많지 않더라도, 삶의 질은 매우 높은 사람들입니다.
▲(본론) 요즘 제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약간 혼란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거에 전혀 하지 않았던,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을 정직하게 읽어보면,
‘신령한 저축’을 여러 면에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정기예금에 몫돈을 넣으면.. 나중에 이자 몇 %해서 받게 되지요?
아니면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를 해도.. 나중에 배당금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계속 투자금을 입금하는 기간이고,
나중에 이자 또는 배당금을 받는 때는.. ‘내세’라는 것입니다. ‘현세’가 아니라요!
우리의 신앙생활을 ‘투자’에 비유할 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일생의 기간 동안은.. 계속 투자하는 기간이고,
그 투자에 대한 배당금 또는 이익 회수는.. 나중에 저 천국, 또는 재림 때라는 것입니다.
제가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투자하고.. 이 세상에서 회수하기를 바랍니다.
또 그런 설교도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성경을 읽으면서, 자꾸 눈에 띄는 구절은,
이 세상에서 투자하고.. 저 세상에서 회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스천의 삶이, 일면 불쌍하게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계속 투자만 하면서 살다가.. 즉 고생만 하면서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라니요!
그래서 솔직히 제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저축만 하면서 사시는 분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그 삶이 불쌍합니까!
그런데 실제로, 신약성경(복음)이 가르치는 바,
천국을 소유한 성도의 삶이, 근본적으로 <미래 천국을 위해 투자하고, 저축하며 살아라>는
사실임을 확인할 때..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고..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몇 구절 찾아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4:12~13.
- 위 구절은, 불 시험 당할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당연하게 받으라고 합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즐거워할게 따로 있지요!
그렇게 즐거워해야할 이유가.. 배당금, 투자금을 회수할 때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그 때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라고 합니다. 즉 재림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살 때는.. 불 시험을 당연히 당하다가,
재림의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거니까’
그 날을 바라보며 <저축하는 마음으로> 고난 중에 기뻐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저축하는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그 앞의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이해를 돕기 위해, 죄송하지만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 앞의 배당금 회수, 투자금 회수가 얼마나 큰지..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영어로 scorning shame, 또는 despising the shame입니다.
‘부끄러움을 비웃었다. 부끄러움아, 네 까짓 것이!’ 하면서 우습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 교육비 대기 위해서,
엄마가 가사도우미도 하고, 빌딩 청소도 하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듯이,
예수님도, 마지막 날에 ‘그 앞에 즐거움’을 위해서
현재 당하는 부끄러움을 우습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문제는, 오늘날 나에게
‘그 앞의 즐거움을 바라보는’ 그런 신앙이 있느냐? .. 하는 것입니다.
‘그 앞의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십자가도 참고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고
-그날에 얻게 될 ‘즐거움, 배당금 회수’를 바라보면서
오늘날, 눈을 딱 감고 투자하는, 이를 악물고 저축하는..
그런 ‘저축심’이 내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그날의 즐거움을 바라보는’ 그런 신앙심은 거의 없고,
대신에 우리는 ‘내일이면 좋아지겠지.. 내일이면 뭔가 달라지겠지..’
하는 (헛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그러기를 또한 바라지만..
‘그게 (그 헛된 희망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런 희망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희망이지, 성경적 희망은 아닙니다.
▲정리하면..
‘그 날의 즐거움을 바라보는’
쉽게 설명하면, <신령한 저축을 하는> 그런 신앙이
오늘날 나에게.. 전혀 부족함 결여됨을 발견하고는..
약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단 두 구절만 찾아보았지만, 성경에 더 많이 나옵니다.
각자 찾아보십시다.
육적인 저축, 보험, 주식, 펀드.. 그런 투자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지만..
<신령한 저축, 영적인 투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영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눅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눅 16장의 부자는.. 이 세상에서 투자를 잘 하고, 배당금을 많이 받았겠지요.
그래서 부자가 된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영적인 투자>는 거의 제로였습니다.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날에.. 뭐 회수할 게 없었고, 있다면 ‘고통 agony, torment’ 뿐이었습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때
‘앞으로는 형편이 좀 더 좋아지겠지!’ 하는 생각 보다는 (이런 설교가 많습니다.)
‘이게 다 영생과 천국을 위한 투자구나! 감사합니다! 앞으로 많이 찾겠군요!’ 하십시오.
이게 훨씬 더 성경적입니다.
덧붙여서, 이 말씀이, 주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거지 나사로처럼’ 사시는 분들께..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쨍하고 볕들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재림의) 날’이며, 벧전4:13.
내가 장차 천국에 가서 ‘하나님 보좌 우편’을 보게 되는 날입니다. 히12:2.
오늘날 나의 헌신에 대한, 투자금을 회수하고, 이익을 배당 받는 날이,
이 현실이 아니고, 저 천국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 날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계속 전진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장기려 장로님의 삶을 보십시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관련글/ 동냥 쪽박이 깨져야 참 제자 영적인 핸디캡
......................
▲연구/ 위 내용과 다른 측면의 주장.. 과 그 반박
신약성경에서 희귀하지만, 대표적 구절이, 막10:29~30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병행구절 눅18:30, 마19:29)
예수님을 위해 투자하거나, 헌신하면.. 현세에서 백배를 보상 받는다는 구절입니다.
1.
그러나 백배를 받아도.. ‘핍박을 겸하여 받습니다.’
여전히 성도가 사는 세상은.. 핍박이요, 환란이요, 고난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받은 복이
영생에서도 복으로 연결되지 않고,
눅16장의 ‘부자’처럼, 현세에서 끝나는 복이 된다면.. 그것은 참 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고난이
영생에서 영원한 복으로 연결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참 복입니다.
2.
여기서 <백 배>는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1차적으로 맞습니다.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를 백 배로 받는다고 했는데..
진짜 엄마가 백 명이 생기고, 형제 자매가 백 배로 늘어납니까? (아닙니다. 한 명도 안 늘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은 교회의 영적인 부모, 영적인 형제 자매가 백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렇게 볼 때, 집과 전토가 백 배로 늘어난다는 것은.. 부모가 백 배로 늘어나는 것이 <상징적>이라면,
집과 전토가 백 배로 늘어나는 것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마5:5의 '땅을 차지하리로다'처럼, 그 영향력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집과 처자를 버린 자들이, 현실적으로 백 배로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2차적이지, 1차적 의미는 아닙니다.
1차적 의미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맞고.. 2차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 현실도, 주와 복음을 위해 뭘 버렸다고 해서, 물질적으로 백 배로 받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러나 영적인 영향력은.. 백 배로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위 글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투자'하고, '회수'는 저 천국에 가서 한다고 했는데,
그 반박 구절이 막10:29~30절이어서,
이상,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구약의 복’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림자’로서, 신약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복’을,
그 풍성함과 그 아름다움을, 예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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