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을 품는 기도 빌1:20, 신12:23 출처보기
해외선교사 선교대회 때, 김용의 선교사님의 설교 내용 요약.
◑서론
▲주의 종이, 기도 못 하는 이유
문제는 주의 종들이 기도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너무 귀하신 분이라서, 이리 저리 불려 다니시느라..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하고요.
-또 어떤 분은.. ‘기도학’을 연구하시느라, 그 연구에 너무 바쁘다보니.. 기도를 못하고요,
-또 이제 오늘은 정말 기도를 좀 해야 되겠다고, 모처럼 기도하는 자세를 가다듬었는데,
평소에 안 오던 귀한 손님이, 마침 그 시간에 맞춰서 방문하는 바람에,
모처럼 방문한 손님을 문전박대 할 수도 없고.. 이래 저래 기도를 못하는 것이지요.
-또 어떤 분은, ‘기도 하라’고 권면하고 다니시느라 바빠서.. 또 기도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돕니다.
출애굽 때, 유월절에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면.. 그 재앙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피만 칠해야 되는 게 아니고, 그 집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저녁에,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에게 잡혀서 죽습니다.
그런데 범사에, 주의 종들이 위험한 것이 뭐냐 하면,
너무 사역에 익숙하다 보니까, 주의 종들이 집집마다 검사하고 다닙니다.
‘이 사람들이 피를 똑바로 칠했나? 안 칠한 사람 없나? 피를 진하게 칠해야지!’
이렇게 점검하고, 심방하며 돌아다니다가,
그 사이에 죽음의 천사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바람에,
그는 거리에서 시체가 되었다는.. 그런 우스개 얘기가 있습니다.
주의 종이, 심방 등 기타 사역에 너무 바빠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소외될 수 있다는 내용을, 비꼬는 농담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비극적인 일이,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변할 것이면, 처음부터 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끝까지 버티다가, 나중에 흉한 몰골을 하면서, 변하게 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은혜를 받을까, 말까.. 내가 다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겠다’
이러면 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은혜가 임하든 말든,
일단 믿음으로, 은혜를 이미 받은 자로, 확 엎어지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정말 은혜가, 내게 임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본론
▲기도를 하지만, 열방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최 측에서 이 시간에, 제게 정해주신 제목이 ‘열방을 품는 기도’입니다.
주의 종이.. 기도를 거의 안 하거나, 기도가 자기 삶에 최 우선순위가 안 된 경우,
이것도 문제이지만, 이런 초보 수준은 제쳐 놓고,
지금 이 시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기도에 훈련되어 있고, 기도를 자기 삶의 최 우선순위가 된 분들 가운데,
자기 가정, 자기 교회를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는데,
‘열방을 품는 기도’를 하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러면 안 된다고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 선교지를 위해서도, 기도를 다 못 하는데.. 남의 선교지를 위해서 무슨 기도를 하겠느냐?’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다고 봅니다.
이런 분들이, 한국의 교회들을 방문해서는,
“선교지의 저희와 저희 사역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몇 번이나 기도해 주셨습니까?” 하면서
자기는 얼굴빛도 전혀 안 붉히고, 뻔뻔스럽게 설교하는 분이 계시는 줄로, 추측합니다. 하하하
자기는 남을 위해, 전혀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이런 미성숙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기도를 많이 받고 싶어합니다.
세상에 기도해 준다는 데, 싫어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모두는, 다른 분들의 중보기도를 많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대부분은, 다른 분들의 중보기도를 많이 못 받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런 부족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키는, 내가 쥐고 있습니다.
내가 열방을 품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가 반드시 나를 위해 기도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방을 품고, 다른 선교사와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그가 내 기도를, 어쩌다가 한 번은 할 수 있어도, 계속은 못 합니다.
그러니 제 결론은,
열방을 위해,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기도 하거니와
그 기도가 우리 선교사역에 최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기도 하거니와
그 열방을 품는 기도는.. 결국은 나를 살리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부메랑으로.. 결국은 나와 내 선교지로.. 다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후원자, 파송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후원교회도 나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기도 안 하면.. 후원교회도 나를 위해, 기도를 아주 드물게 할 것입니다.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인 것입니다.
▲저는 순회선교단의 대표로 섬기고 있습니다.
‘순회’의 의미는 방문한다, 돌아다닌다는 뜻도 있지만,
순환시킨다. 복음의 자원을 돌게 한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순회한다.. 돌아다닌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별로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여러분, 우리 몸의 혈액을 보십시오.
다른 장기들은, 다 자기 포지션이 있습니다. 그러나 혈액은, 자기 포지션이 없습니다.
그런데 혈액이 몸에 돌아다니지 않으면.. 그 몸은 금방 죽어버리고 맙니다.
혈액이, 자기 정처가 없이, 계속 몸의 각 곳을 돌아다니면서
끊임 없이 생명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몸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피를 생명이라’고 말씀한 것이.. 참 깊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연합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연합은, 자기 일 다 해놓고, 남는 시간에 연합한다.. 그러면 절대로 연합이 안 됩니다.
자기 사역을 최우선으로 하고, 남은 시간에
다른 선교사, 또는 다른 선교사역과 연합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외선교사역이 아직 완성이 안 된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예수님을 머리로 한, ‘몸’으로 비유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본질과 속성은.. 연합입니다.
위장, 심장, 손, 발이 연합해서 활동하는 것이지,
나 하나만 몸에서 똑 떨어져 나와 있으면.. 그건 쓸모없는 ‘지체’입니다.
몸의 각 지체들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는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지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위탁되어져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몸의 각 지체는.. 자기 기능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혈액이, 피가 하는 일은
온 몸의 각 지체를 돌아다니면서,
각 지체와 장기의 영향분과 기능을 순환시키고, 분배하고, 나누어주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우리 ‘순회선교단’이 하는 주된 일입니다.
오늘날, 저희 순회선교단처럼, ‘자기 사역, 내 교회’에만 너무 주력하지 말고,
‘다른 사역, 다른 교회’를 지원하고 돕는 사역을 주로 하시는 분들이
더욱 많이 나오게 되기를.. 저는 개인적으로 바랍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입니다.
▲연합은, 영성의 최고봉
연합은.. ‘형편 닿은 대로 해 보자! 우리 일을 먼저 해 놓고, 해 보자!’
이런 안일한 태도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연합’은, 영성의 최고 경지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연합의 영성’이.. 영성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혼자 두면 대단한데,
영적 수순과 깊이가 아주 대단합니다. 난리가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세 사람만 모아놓으면, 박이 터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와도 연합해서, 같이 주님을 섬길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 이렇게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설교를 아무리 잘 해도, 혼자서는 사역을 아무리 기가 막히게 잘 해도,
누구와 함께 팀 사역을 할 수 없는 독특한 사람들은.. 다 겸손하셔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쓰임 받고 나서, 버림받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물론 안 그러기를 바라지만요. 혼자 떨어져 있으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당연히 높겠지요?
여러분, 자기가 혼자서 쓰임 받는 것만 능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연합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몸’은.. 연합이 죽는 순간, 끝장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산산조각이 나고, 분열이 되고,
선교지가 산산조각 갈라져 있으면,
세상 없는 유명한 사역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분열이 왜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구하지 않고, 그가 자기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연합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연합은 영성의 최고봉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요17장에, 공생애 마지막 즈음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에 당부하시며 기도하신 내용이
‘저희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나의 삶을 못 바꾸면,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그것이 내게는 복음이 아닙니다.
한 번 저를 따라서 말해 보십시오.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복음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자기 한 사람도 못 바꾸는 복음을 가지고,
다 멀쩡히 자기 딴에는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선교한다고 그러면서
그나마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도 못 바꾸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스트레스 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제발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도 못 바꾸는 복음'을.. 남에게 전해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이, 정말 복음이요, 능력이 되려면,
내 자신이 먼저, 복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 증거가..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저 사람은, 변화된 사람이야!’
그런데 그게 서로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안 드러나는데..
같이 공동생활을 해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복음이 나 자신을 먼저 바꾸었나, 못 바꾸었나?’
공동생활을 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복음을 가지고,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이 복음을 전한다고 소개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우리가 처음부터 정직하고, 처음부터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괜찮다. 다 변화되었다’ 치고, 그런 줄 알고 나갔는데,
많은 분들이 ‘나 자신 하나도 못 바꾸는 복음’ 때문에, 지금 곤경을 당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사람, 사역자는.. 반드시 자신부터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바뀐 사람은, 즉,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 둘씩, 반드시 빛과 소금의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지인들이, 그의 복음과 아울러, 그의 삶을 보면서, 차츰 변화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선교지에 필요한 것은 ‘주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존귀케 하시려고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창조주가, 아주 작은 미물로 오셔서,
피조물의 자궁에 착상을 해서, 세포분열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겸손과 이 신비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쉽게 생각해서 그렇지.. 사실은 사지가 떨리고, 온 몸이 소름 돋는 일입니다.
드라마 한 편을 보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있어도
이 기가 막힌 복음을 듣고도, 눈물을 흘릴 줄도 모르는,
이 강퍅한 심령인 우리들은.. 정말 바뀌고,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 여러분의 선교지에서 필요한 것은, ‘주님’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보기 원하는 것은, 잘난 내 모습, 또는 잘난 다른 사역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보기 원하고, 또 우리가 꼭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지치고, 수많은 버림받은 영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우리가 가슴 아파해야 하는 일은
내가 능력 없는 것, 내가 무시당한 것, 내가 선교하다가 고생한 것.. 이게 아니라
혹시나, 내가 까불다가, 사람들이 주님 못 보게.. 내가 주님 모습 가리웠을 것..
그것을 걱정해야지.. 다른 것을 걱정하면 안 됩니다.
‘주님, 저로 인하여, 주님이 가려지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보배 같은 주님이 잘 드러나셔야 한다면, 저는 질그릇 같게 하옵소서!’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나 죽어서, 나 고생해서, 내가 깨뜨려져서
내 질그릇 속에 담긴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여러분은, 아무리 선교지에서 고생을 엄청나게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의 영광이요, 존귀가 되는 줄 믿습니다.
▲성경적인 목회 성공 원리.
목회자가
-목회에 성공하고
-목회자도 덩달아 성공한다는 사실이, (목회와 목회자, 둘 다 성공한다는 사실이)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어디서 그런 개념을 찾아내셨습니까?
성경의 개념은
-목회에 성공하면,
-목회자는 죽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죽지 못했는데, 만약 목회가 성공했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성공이지, 성경적 목회 성공은 아닙니다.
성경적 개념의 목회 성공은,
목회자가 십자가에 죽든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든지..
목회자가 죽어서,
그 피를 받아먹든지, 그 희생의 터 위에서, 목회가 성공하는 것이
성경적인 참 목회, 또는 사역의 성공입니다.
주님은, 양떼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셨지,
양떼들의 살과 피를 먹고서.. 성공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원리를, 어린아이처럼 순종했더라면,
우리는 목회나 사역에 이미 성공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은 완전히 망가졌겠지만요! 물론 주님이 그를 다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주님은 그렇게 사시면서, 우리에게 몸소 본을 보여 주셨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삶이.. 실제가 안 되고 있습니다.
흉내라도 내 보겠다는 사람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가 막힌 이 불신의 세대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이 돌봐 주신다는.. 그런 본을 보이고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대천덕 신부님으로부터 배운 교훈.
제가 한 번은 대천덕 신부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신부님, 하필이면, 왜 그렇게 강원도 시골 하사미리 골짜기에
예수원을 지었는지요?’
아니, 선교사역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접근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강원도 그것도 산골짜기에 <예수원>을 지었으니,
접근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빵점인 곳이었습니다.
그러자 대천덕 신부님은, 이렇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내가 성공회 신학대학에, 학장으로 있을 때 보니까,
신학생들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너무 기가 막혀서, 신학 교리를 가르쳐야 할 때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 몸으로 직접 보여주어야 할 때다.. 싶어서
신학대학장 직을 내려놓고
전국에 찾아다니면서, 교통편으로 보나, 다른 면으로 보나
‘가장 인간적인 도움이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하는 곳을
7곳을 선별했다가, 나중에 결정한 곳이, 강원도 태백의 산골짜기 하사미리 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당시에 한국교회의 영성을 이끌어가는
놀라운 <예수원 사역>을 일구어내셨습니다.
도저히 사역이 불가능하다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히려 한국교회를 선도하는
놀라운 영성 사역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신부님은 그곳에서
오직 중보기도에 힘쓰시면서
인간의 술수가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믿고” 살아가며 사역하는
참된 사역자의 본을.. 실제 자기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예수원의 영성은, 지금까지도 한국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우리 <순회선교회>도 그 영성을 물려받아, 오늘날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대천덕 신부님처럼,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이 시대에
작은 증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를, 반드시 돌봐 주신다!’는
그 작은 증인으로.. 감히 세상에 나타나 보여지기를 원합니다.
▲기도는 관계입니다.
기도는 어떤 기술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복음에 확신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그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가 삼층천을 들락날락 하면서 대단한 능력을 갖지 않아도,
어린아이와 같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따르면,
그 관계 가운데.. 우리의 기도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친밀한 관계 없이..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친밀한 관계가 평소 삶에서 이루어진다면.. 기도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친밀한,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서
‘선교 완성’이라는 남은 과제를.. 반드시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순회선교단 사역 소개.
주님은 우리 순회선교단의 헌신자, 사역자들에게
‘세계 선교 완성을 위한, 연합과 섬김으로의 부르심’
이라는 비전을 품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깜짝 놀란 것은,
선교 완성은, 사람들이 이론적/교리적으로는.. 바라보고, 동의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 있어서는
‘이제 곧 세계선교가 완성되어지고,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진짜로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맞을 준비에 온통 미쳐서, 노후걱정이나 대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 순회선교단의 실제 사역 지침은
1. 선교하다가 지쳐서 고국에 되돌아오려는 선교사를
우리가 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와서,
가급적 그가, 선교를 계속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입니다.
2.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헌신합니다.
절대 예수 피값으로 구원받은 생명이,
살아도 예수 핏값만큼 살고, 죽어도 예수 핏값만큼 죽어야지..
자기가 편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3.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 재산을 갖지 않습니다.
가톨릭처럼, 철저히 무소유로 살면서,
부모의 유산을 받더라도, 그걸 반납하든지, 어디에 기증하든지..
순회 선교단이 되려면.. 철저히 무소유가 되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사는 정신!
이것이 바로 우리의 행동 지침입니다.
우리 자신을 벼랑 끝에 세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벼랑 끝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늘 체험합니다.
이런 재정 원칙은, 남편과 아내도 각자 따로,
부모와 자녀도 각자 따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인 제가, 아내나 자녀의 생활비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으로는 제가 아버지요, 가장이지만,
영적으로 제 아내의 아버지도.. 하나님이요,
제 (장성한) 자녀의 아버지도 ..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가족 구성들이 각자 모두 하나님께 공급을 받는 것이지..
남편이나, 아버지께.. 우리는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채우심과 공급하심을.. 우리는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순회선교단은, 하나님의 공급하심만 믿고,
오직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저희는 지금 아이들을 포함해서 약 1백여명의 선교사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선교 완성을 위한 연합과 섬김’
처음에는 그게 정말 막막하며, 어디서 손을 대야 할지 몰랐지만,
돌이켜보니, 하나님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다만 주님의 성만찬 원리로,
즉 ‘내 피를 먹고 너 살아라!’ 하는 원리로
한 알의 밀알처럼 우리가 땅에 떨어져 죽고, 남을 살리는 원리로 나아갔을 때,
‘나 잡아 먹고 너 살아라!’ 하는 원리로,
연합과 섬김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을 때, 주님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저희가 순회선교 사역을 처음 시작한 곳은
인도 중북부의 비하르 주 입니다.
지금도 선교사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고, 종족 살해가 종종 일어나고 있는
위험한 지역입니다.
지금도 인도 사람들 가운데 ‘비하리’ 즉 ‘비하르 사람’이라고 그러면
아예 사람들을 낮춰서 보고, 무시하는.. 그런 지역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한국 선교사 가운데 처음으로
인도 비하르 주에 정착하러 들어가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정보를 듣게 된 우리 순회선교단 당시 6명 전원은,
IMF가 시작되던 해인 1998년에, 공식사역의 첫 걸음을 뗐습니다.
저희 이름 없이, 저희 공로 없이
오로지 그 분의 선교사역만 돕는 역할로,
우리가 6개월 이상을 섬기고 다녀왔습니다.
어떤 순회선교사는, 집을 지어주고,
어떤 순회선교사는, 사역을 동역해 주고..
그렇게 섬겨주고, 우리는 빠졌습니다.
감사하게도 지금은, 거기에 선교 베이스가 세워지고,
10년이 지나야 되어질 일을, 연합해서 하니까, 시너지 효과가 나서 그런지
단 2년 만에, 아름답게 선교지가 정착되는, 그런 열매가 있었습니다.
조건 없이 주님을 섬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저희가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 순회선교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나 잡아 먹고 너 살아라. 나 디디고 너 올라가라!’ 하니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받은 자원들을 가지고
선교지에 찾아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선교지를 섬기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우리 사역, 우리 이름, 우리 소유를 갖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선교 사역의 큰 약점 중 하나가,
모두가 자기 교회, 자기 선교본부, 자기 사역을 가지기를 열중하다보니
연합과 협력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어쩌면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어렵게 사역해 나가고 있습니다.
사역자가, 자기 사역에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그런 ‘무소유, 빈마음의 사역’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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