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인하여 실족하는 자 눅7:20~23 13.03.23.설교스크랩
※결론의 한 줄을 주장하기 위해서, 길게 논지가 이어졌습니다./편.
눅7: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예수님을 인하여 실족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있으니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누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를 떠나서,
세상에는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가족들 중에 그런 사람이 없기를 기도하십시다.
성도들 중에 그런 사람이 없기를 기도하십시다.
왜냐면 그건 정말로 복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쉽게 삐지는 사람은 인생이 괴롭지만,
특별히 종교적인 이유로 삐지는 사람은 참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삐지는.. 즉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실족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요즈음 한국 개신교에 대한 많은 비판이 난무하고,
교회 때문에 시험에 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표면적인 현상이고
정말로 핵심에 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실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네거티브한 표면적인 현상에 매몰되는 것 같지만,
심각한 것은, 그것이 습관이 되어.. 사람들이 예수님께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당신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설명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눅7: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후,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세례요한 자신이 한 때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 다음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크시니, 그가 너희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리라."
"나는 그의 신들메조차도 받들 자격이 없다."
이미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증거했던 세례요한이
왜 이 시점에 사람을 보내서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그 분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뭘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옥에서 건져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고,
-현재 이스라엘의 부패한 정치 사회현실을, 바꿔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왜 옥에 갇혔습니까?
헤롯왕이 자기 동생의 부인과 결혼한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괘씸죄로 옥에 갇힌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도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당대 최대의 독설가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표현은, 그에게 욕도 아니었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열매 맺지 않으면 다 불에 던지우리라"
굉장히 강한 표현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를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리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니, 듣는 사람들은 기분이 안 좋았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는 방식 자체가, 현세에 대한 강한 부정을 몸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 자체가 현세에서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강한 부정입니다.
그 삶 자체가 강한 설교요, 안락한 삶을 제일의 목표로 추구하는 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잠시 흔들렸습니다.
예수께서 진짜 메시야라면, 어떤 일을 하셔야 되느냐?
세례요한 나름대로의 판단과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의 예상이 빗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하실 일,
그건 예수님이 정하실 몫이지, 세례요한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끝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막1:14절에 구체적으로 명시하길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고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동시대에 사역한 게 아닙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세례요한이 계속 옆에서 설치고 있으면
지방방송이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의 시대는 끝났고, 그는 퇴장만 하면 되었고,
예수님께 바통을 넘겨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신들메를 들 자격도 없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고 맡겨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했던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세례요한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전달한 말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됩니까?" 눅7:20.
이 말을 유추해서 해석하면,
"나는 당신을 이해 못하겠습니다. 맘에 안 듭니다. 방법을 바꾸든지 하세요."
매우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취임 초기에는 국민들이 강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가
실망이 쌓이면 지지율이 떨어지듯이.
세례요한도, 예수님께 대한 실망이 점점 쌓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7:22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강한 증거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강한 증거입니다.
세례요한은 천국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그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지도 못했고, 앉은뱅이가 걷게 하지도 못했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죽은 자가 살아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표적이 예수님께는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메시야’ 라는 강한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증거는 이후에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 때까지는 세례요한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은 신화가 아니고 후세 사람들에 의한 조작이 아닙니다.
만일 조작이었다면, 세례요한의 추종자들도 똑같은 조작을 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에 대해서도 신화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선 그런 일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만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게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고, 예수님만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Sign입니다.
그 말은, 기적이, 그냥 단순히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기적(Sign, 표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적용/ 현대에,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 사람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례요한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 각자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한다는 말입니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주위에도 많습니다.
▲1. 기독교를 거부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방법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그들의 마음에 차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합니다.
그게 바로 혁명. 사회개혁. 정치. 물리적 힘. 정치적 권세를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들(실족한 자들)은, 물리적/ 폭력적 방법을 통하여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기독교를 싫어합니다. 기독교를 박해합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합니다.
자기들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 기독교를 위협으로 느낍니다.
더 나아가면, 이들의 논리는, ‘빈민들이 벌써 옛날에 혁명을 일으켰어야 하는데
기독교의 마약에 마취되어
내세의 상급을 믿고, 현세를 바꿀 의지를 잃어버렸다’고 봅니다.
결국 이들은,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천국을 기다리기 보다는, 현세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2. 꼭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더라도
혁명, 전쟁 등 물리적 힘을 사용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방법이 답답하게 보입니다.
무저항. 비폭력.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소위 ‘약한 자의 철학, 루저의 철학’이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예를 들면, 니체 같은 철학자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기독교 윤리를 ‘노예 심리’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노예들이, 자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약한 게 강한 것이고, 고난당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고, 가난한 자가 복되다"는
식의 종교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과거 애굽의 노예 출신이었기 때문에
노예근성을 가지고, 그런 (노예)종교를 만들었다는 식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강함, 힘, 권력..
이런 것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강조하는데,
이후에 히틀러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3. 자본주의자들도 말은 안 하지만, 예수님에 의해 실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그들은 극도로 싫어합니다.
"가난이 무슨 복이냐? 가난은 저주일 뿐이다.
사람이 능력이 있다면, 가난을 극복하려고 해야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기독교 사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질구질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나가서 일이라도 해라." 이런 논리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사는 우리들 중에, 말은 안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에 동조합니다.
돈, 부자, 맘몬, 탐심 이런 것을 경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만
자기 마음속으로는 동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된다. 부자가 되고 싶다.
건강한 탐심은 자연스럽다. 사회발전에 꼭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볼 때, 자본주의 사회의 구세주는,
예수님이 아니고 기업가/경영인/자본가들이 됩니다.
큰 사업을 일으켜서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사람들,
그들이 영웅이고, 고마운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번영신학 쪽으로 발전하는 것은, 일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자"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전혀 이런 사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몰아가려는 세력이 강력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분위기가, 대다수 자본주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 물질, 성공이 진리요,
그 반대인 가난, 궁핍, 경쟁사회에서 패배자는.. 루저요, 실패자인 것입니다. *루저: 패배자
▲4. “일부” 자선가, 사회사업가에 몰입하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의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이 충분한 지침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빈민구제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시지 않고
적극적으로 강조하지 않으신 것을
무시하든가 못마땅하게 여기든가, 아니면 왜곡해서 해석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과 삶을 나누셨지,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우려는 시도를 하시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가난한 자들을 언급하셨는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라, 가난을 해결하라!” 이런 식의 말씀이 없으십니다.
복음서의 예수님 공생애를 잘 읽어보십시오.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펴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재단을 만든다든가, 부자들의 기부를 받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다든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가난을, 시급하게 해결해야 될 제1 과제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현대인 사회사업가의 사고방식과, 급격하게 다른 면입니다.
일부 현대인 사회사업가는, 가난을 가장 큰 문제로 보고,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회의 모든 문제가 가난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범죄든, 질병이든, 불행이든, 결손가정이든...
물론 기독교인은 사회사업, 자선, 구제, 긍휼사역을 열심히 베풀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님은 사역의 최우선순위에 priority에 두신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역을 병행해야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복음전파-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사역>에 집중하셨습니다.
일례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보면
거지 나사로가 부자가 됐다든가, 거지 신세를 면했다든가,
그런 언급이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물론 부자가 무슨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갔는가 하는 설명도 없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가 된다고 보셨습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자본가들은, 그런 비유를 거부하고,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과 기독교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사람이 부해지려고 하다가 시험에 들고, 부한 사람이 죄를 짓고,
부의 미혹에 이끌려 하나님을 떠나고... 이런 경고가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일부 자본가들은,
아예 예수님을 떠나서 자기 뜻대로 살든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적당히 타협을 하든가...
어쨌거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아주 민감한 발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 사람들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갖다 대면.. 싫어합니다.
언짢게 여깁니다. 화를 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교회를 안 나옵니다. 불편해 합니다.
그리고 ‘안티 기독교 세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안티 기독교 세력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그 메시지 자체가.. 사람들에게 꺼려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인간이 공교하게 고안해낸 종교라면..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민감한 발언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남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으로 불만족하여
다른 이, 다른 대상, 다른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실족한 것입니다.
즉, 물리적으로 정의로운 사회, 물질적으로 평등한 사회 등..
각자가 꿈으로 그리는 이상향/ 파라다이스를.. 일부 사람들은 바라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만으로는.. 그게 불충분하다고 느낍니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서, 실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섭리가 마음에 안 들어..
교회를 잘 다니는 성도도.. 실족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처럼요!
예수님의 섭리, 예수님의 주권, 예수님의 방법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모두 실족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간절히 기도했는데
-부모님의 질병이 안 나을 수도 있고,
-자녀의 사업이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고,
-남편이 실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뭔가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살다보면 많이 생깁니다.
기도를 아예 안 하는 사람이면.. 실족도 적게 하겠지만,
기도를 간절히 많이 하는 사람이면.. 실족할 일이, 크게 생길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실족할 정도면..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면 결론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주님이 복이라고 보시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스스로 현세적 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점을 우리가 현세적 복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에 맞추는 것은 무익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핵심이 아니고요,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지 말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기준으로 해서.. 내 생각을 거기에 맞추어야 됩니다.
더 이해하기 쉽게,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보고 "이래라, 저래라"하지 말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십시오.
우리가 아마도 이것을 제대로 배우는데,
어쩌면 우리의 일평생이 걸리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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