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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봐 두려워해야 고후6:1, 히12:14, 25, 행26:20 출처보기
John Bevere 존 비비어,
◑우리는, 은혜를, 일부분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고 있는 부분을 다루려 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께 “간청하노니” 고후5:20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후6:1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간청하여 말한다 pleading”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인들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미 방언 받은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간청하여, 즉 간곡하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요!
▲오늘날 대부분 교회들은
(제가 대부분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뜻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은혜를 강조하는
은사주의 교회, 오순절파, 복음주의파 등의 교회들도
이 성경구절의 실제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감도 못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 한 단면만 보고, 전체적 의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제가,
그 “은혜”에 대한 의미를, 잠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씀드려 볼까요?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죄를 덮어주는, 큰 가리개 정도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육신적이고, 불순종하는 삶을 숨겨주는
안전한 가리개 정도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면도, 은혜에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육신적이고, 한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예수님의 보혈, 그 은혜가
내 죄를 깨끗케 하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까?”
아니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은혜의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한 면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칭의 Justification과, 성화 Sanctification의 과정을 절대 혼동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이 과정을 둘 다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사람은,
칭의.. 한 면만 보고서,
성화.. 의 면을 간과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요, 부분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고백한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성화>의 과정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화란.. 거룩함과 동의어입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고,
젓가락 두짝과 같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 만으로, 단독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제 말을 주의 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여러분의 영에, 공명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동의하실 것입니다.
◑은혜는.. 성도가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히브리서 12장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은) 거룩함을 좇으십시오.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칭의를 좇으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거룩함이 없이는, 즉 성화가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즉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의 가르침을 그동안 간과해 왔습니다.
칭의와 성화.. 두 면을 다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한 측면만 보고서, ‘칭의’한쪽만 강조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뵈오려면,
즉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 둘 다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에 동참해야할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가려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면이고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히12:28.
위 말씀은,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그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즉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위 구절은 은혜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부숴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믿게 되어, 영접기도를 따라하게 되고, 신자가 됩니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래의 고백을 하는지.. 다들 들으셨을 것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있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함께 살펴볼까요? 마5장으로 가 봅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7
요약하면 율법은 모세,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예를 들면, ‘살인’에 대해서
율법은,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살인으로 규정한다면,
예수님이 전하시는 ‘은혜와 진리’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까지도 ‘살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듯이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의 또 다른 측면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1:17절에,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다고 했는데,
그 구절을, 마5~7장의 산상수훈과 연결시키면,
‘은혜와 진리’는, 즉 은혜는,
율법을 그저 형식적으로, 외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 율법의 본래 의미, 율법의 본질을.. 지키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은혜> 둘 중에, 어느 쪽 기준이 더 높습니까?
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 또는 율법의
근본정신, 그 속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에,
예전에는, 그게 뭔지 몰라서, 그걸 못 지켰는데, 또는 형식적으로 지켰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은혜와 진리를 받은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율법 또는 계명의 속본질, 그 근본바탕 정신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를 일부 측면만 보고서,
은혜로, 만사오케이, 오직 은혜를 ‘나의 죄를 가려주는 덮개’로만 생각해서는,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는, 실제로 간음을 하지 않으면, 간음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안에서는, 행동을 해야 죄가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생각만 품어도 죄가 됩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은혜시대에 사는 백성들은, 은혜와 진리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너무 얕보지 마십시오.
은혜는, 구약의 율법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입니다.
◑그 ‘은혜’를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과나무를 봤을 때,
그게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 알아보려 할 때,
나무 몸통 중앙을, 드릴로 구멍을 뚫어봐야만 알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그 나무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정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그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열매를 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선한 행동으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구원은 은혜, 즉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 그 은혜를 받은 사람과,
자기 스스로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열매를 보고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이 부분에 관한 중요한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약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아직도 불신자와 비슷하게
죄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나는 구원 받았다’ 라고 장담하지 마십시오.
사도바울은, 자기가 구원 받았는지, 스스로를 살펴보고, 시험해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13:5.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행26:20.
NIV성경에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진정한 회개인지
행함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I preached that they should repent and turn to God
and prove their repentance by their deeds. Acts.26:20/NIV"
왜냐하면 디모데후서에 나온 말씀처럼,
사람들은, 경건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스스로의 삶에서는, 경건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분명히 선포합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경건케 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살 수 없게 하고
‘은혜’가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권능이 아니라,
단지 죄를 덮어주는 수단이라면,
그렇다면,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진짜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게,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한다고 합시다.
“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덮습니다.
여러분이 넘어지고 죄짓고 살아도, 아무 걱정마세요.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가 다 덮어줍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은혜가 덮어주고, 가려주는 면도 사실이고, 복음입니다. 시32:1.
그러나 그 한 면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칭의를 얻고,
동시에 그 은혜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
그 은혜가 그의 부족한 부분들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은혜가 내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니, 나는 성화의 삶은 관심없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진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진짜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은혜, 칭의.. 모두 신비적 역사입니다.
위에서 주셔야 받습니다.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믿기로 결단만 하면, 다 받는 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다 받는 것은 아니고요.. 위에서 주실 때만 받습니다.
‘받는’ 키를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물론 내가 간절히 사모할 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더 잘 받을 것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7:1
만약 우리가, 은혜만 극단적으로 강조한다면,
사도바울은, 위와 같은 성경구절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강조하는 위와 같은 구절들은,
제가 이 설교에서도 여러 구절 언급했지만,
사도바울의 서신서 말고도, 야고보서, 베드로서, 요한서신서에 가득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극단적 은혜론’의 관점이 만약 맞다면,
위와 같은 성경의 상당 부분을, 다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극단적 은혜론’을 폐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하십시오!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는 무슨 뜻입니까?
다른 말로 ‘진행되어져 가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도중에 힘들어 할 때도 있지만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성화는, 거듭난 그날부터 시작됩니다.
성화를 이루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처음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식이든지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열 처녀의 비유, 양과 염소 비유 등을 보면,
두 그룹 간에 발견되는 단 한가지 차이점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한 쪽은 했고,
다른 한 쪽은, 결국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성화, 신부단장을 하도록, 그들을 도왔지만,
자기들이, 그 은혜를 무시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신실한 자, 선생님’이라는 인정과 높임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자기 내면 속에서부터, 진정한 성화의 삶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이 말씀도, 은혜가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다 해 준다.. 는 개념을 깨뜨리지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은혜에 이르도록, 은혜를 받은 자가, 자기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은혜 개념이 다 틀렸다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일부분만 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여러 측면을, 두루 두루 다 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성경적인 의미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를 경건케 하는 능력을 최대한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히6:1.
그래서 사도바울은 ‘거룩함을 좇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12:14
교회를 오래 동안 다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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