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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저녁 늦게까지 사역, 이른 새벽에 기도

LNCK 2013. 6. 24. 15:47

◈저녁 늦게까지 사역, 이른 새벽에 기도            막1:29~35       


김회권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pp.133~195 스크랩, 요약

 



◑1. 서론/ 전 인생을 걸어버린 제자들


마19:27절에 따르면, 베드로는, 자기 전 재산을

예수님 재단에 모두 공탁해 버렸습니다.


초대교회 주교들은, 모든 재산을 다 바친 베드로와 사도들의 본을 따라,

자기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후에 성직으로 나아갔습니다.

*아직도 가톨릭에는, 이 전통이 2천년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깍쟁이 신부님 10억 쾌척


그리고 모든 추기경들은, 진홍색 붉은 모자를 씁니다.

그것은 ‘순교자가 되겠다’ 즉 자기가 순교자 대기명단에 올랐다는 뜻입니다.


재산을 다 바치고,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붉은 모자를 쓴 것입니다.

전 재산과 전 생명을 바치고.. 예수님을 추종하겠다는 다짐인 셈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시겠다는 결연한 예수님에게,

베드로가 저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막8:27~34.


베드로의 항의에는 ‘예수님, 절대로 죽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 투자금도 돌려주지 않고, 죽어버리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라는 식의 계산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칠 때,

제자들에게 뭔가 손에 잡히는 약속도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는 열두 보좌에 앉게 해 주겠다’는 식의 약속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종의 투자자들을 끌어 모아, 큰 사업을 시작하려는 듯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내걸고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는, 오해를 일으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달나라에 집을 짓는데, 투자금을 모으고 있다.

달나라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는 식의 제안처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약속은 장엄하고도 강렬했습니다.


이런 제안에 가장 능동적으로 나선 제1투자자가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년 정도 지난 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달나라에 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중력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못 하겠다’

아마도 베드로의 낭패감은,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컸을까요?


고난과 죽음을 거친 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강력하게 심으시고, 많은 재산을 공탁 받으셨는데,

갑자기 십자가 죽음의 처절한 패배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시니,

베드로가 이해를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담화를 듣자마자, 강력하게 반발한 이유는,

자기 전 재산을 바쳤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전 재산을 바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을지 몰라도,

자기 인생 전체를 걸어버린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선과 행로가 너무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제가 볼 때, 오늘날 우리가 복음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걸었던, 그런 전폭적 추종의 제자도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 본문의 단어 뜻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심장과, 영의 숨결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베드로는 자기 재산을 다 바치고,

자기 사업과 전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의 구절 구절들이, 그저 피상적으로만.. 다가오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자적 의미와 사전적 의미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 분위기를 도무지 이해 못하는 것이지요.


이 분위기에 공감이 안 되니까, 우리의 설교도 감동적이지 않은 겁니다.

이 영적 무감동과 공감결여는, 우리 시대의 신자들이 걸려 있는 총체적인 질병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아,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해석학적 완악함’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파송의식


“이 일을 위해서 내가 왔다.” 막1:38


본문에서 예수님의 동선을 움직이는 중심축은, <예수님의 파송의식>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파송되었다는 의식이, 곳곳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며,

결론적으로 막1:38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피(被)파송의식은 요한복음에 유난히 자주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듯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6:38


이 피파송의식이 예수님을

당시의 랍비나 서기관과 결정적으로 구별 짓는 요소입니다.


이런 被파송의식은, 서기관, 바리새인 등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유일하게 예수님에게만 나타납니다.


요1:18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전에,

원래 예수님의 호적지, 원적지가 ‘아버지의 품속’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아버지 품속에 있던 예수님께서,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피파송의식이 강렬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순도가 높아집니다.


목회자의 소명의식의 절대 기준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되었다는 의식,

다시 말하면 사명감이, 목회자 후보생에게는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이 파송의식이 강력한 곳에, 기도가 힘을 발휘합니다.

막1:35절에, 예수님이 이른 새벽에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홀로 기도 하셨는데,

파송의식의 중차대함이 있으니까.. 기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능력과 기도는,

피파송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사역의 모든 총체적인 특징은, 약간씩 겉모양은 다르지만,

결국 본질은 ‘피파송의식’에서 나오는, 사명 감당 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숭고한 일에 투신이 가능한 것은,

파송 받았다는 의식 때문입니다.


일례로「전능자의 그늘」책에 보면,

짐 엘리엇과 그의 동료 선교사들의 순교에 대해서,

책의 저자 엘리자베스 엘리엇 사모는

‘뭔가에 이끌려, 등 떠밀려서, 순교의 장으로 나아갔다’고 강조합니다.


본인들은, 순교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이지요.

본인들이 그것을 평소에 감지하고 있었고,

그때가 되어서, 그 장소에서.. 영광스럽게 순교로 나아간 것입니다.

순교로..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연이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요!



◑3. 예수님의 치료의 손 내밈


본문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후에,

다음날 이른 새벽에, 나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장모의 열병이 어디로 떠나갔을까요?

열은 에너지이기도 하고, 질량이기도 한데, 그냥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지구 어느 구석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저는, 장모의 열병의 열이, 예수님께로 전가되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사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병행구절인 마8:17절에서, 마태는 사53:4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8:17.


마태는, 열병이 에너지일뿐만 아니라, ‘짐’이라는 점을 주목한 것입니다.

즉, 짐이 없어졌다는 말은, 누군가가 그것을 짊어지고 떠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열병’이라는 짐을, 접촉을 통해서, 당신 자신에게 전가시켰다는 암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시68:19.

우리의 죄 짐을 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요1:29, 35.


오늘도 파푸아뉴기니 등, 해외선교의 오지에서는 신유의 기적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그 상황이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개인 은사나, 경건의 능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있어도, 다른 지역에서는 신유가 많이 안 일어나고,

오지에서만 유독 많이 일어나는 것은,

<그 상황의 절박함 때문>입니다.


병원도 없고, 약도 없고,

혹시 병원과 약국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에서는,

그냥 (비타민만 먹이고) 기도해도, 중병이 낫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 잡을 때마다, 예수님의 생명력이 소진되어

결국 예수님의 육체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고, 고통, 죄, 저주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고후5:21.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 롬8:3


이런 구절들은, 모두

인간의 죄와 저주와 질병이

예수님께 전가되고, 옮겨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과, 예수님의 손 접촉은,

죄 짐을 짊어지는 행위이며,

병자의 고통을 빨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자신에게 옮기는 신비한 관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시키고 배수시키는 통로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손도, 그렇게 치료의 손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이 죽음의 열병을 빨아들이는 기구요,

동시에 당신의 생명력을 배출시키는 손이었듯이,

여러분의 손이, 예수님의 동정심의 배출관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교회는, 그리스도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인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서.. 그들의 열병의 짐을 대신 져주는,

예수님의 등이요, 손이 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될 줄 믿습니다.



◑4. 늦은 저녁 사역과 이른 새벽 기도


막1:32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2절은, ‘저물어 해질 때’입니다. 예수님은 저녁 늦게까지 사역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35절에, 다음날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러 나가십니다.


‘기도했다’는 미완료시제는,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영육간의 에너지 소모가 많은 날일수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먹거리를 찾아서 먹습니다.

자동차에 연료가 고갈되면.. 주유소에 가서 보충하고요,

휴대폰 배터리도, 날마다 충전을 해 둡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충전할 줄 아는 사역자가 되도록, 자신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기도가 고갈되면, 기도가 ‘고파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사를 가더라도 ‘어디가면 기도를 잘 할 수 있을까?’ 보면서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새벽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단락 펀글-

‘어제의 사역을 반추하고, 오늘의 사역을 계획하는 등

사역에 관한, 기도이었을까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설교 잘 하시는 목사님이 있어도

또한 진리의 말씀을 읽고, 들어도

성경을 100번 읽어도

진리의 모임이 있고, 내가 거기에 참여해도

또한 예언을 알고 현 시점을 파악했어도


결국 내가 변화되지 못하면.. 말짱 황이라는 거죠!

나부터 시작되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이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도,

또한 우리 자신의 새벽 기도도..

그 방향이, 먼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은 둘째고요!


언제 나의 자아는 무너지고

그 안에 예수로 가득 채워지는 것일까요?


먼저 나부터 변화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주된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예수님이 시공간적으로 고요함 속에 기도에 몰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새벽에 광야로 잠적하신 후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찾는 대중들의 열기가 엄청날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 품속으로(요1:18) 잠적했습니다.

대중들로부터 자신을 감추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시는 당신의 아들에게, 한량없이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마치 아침에 이슬이 내리듯, 성령의 이슬을.. 예수님은 듬뿍 맞으신 것입니다.

매일 아침마다요!


새벽 미명의 한적한 광야기도,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에서 기도에 잠길 때,

우리의 오장육부 속에 감춰진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 염려, 낭패감, 무능력,

미움과 열등감 등이 녹아내립니다. 동정심이 샘솟습니다. 자기 부인의 용기가 샘솟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열기가 이렇게 고조되었을 때,

자신을 은닉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 품안으로 자신을 철수시키신 예수님의 겸손과 자기 절제를

깊이 묵상하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방송에 자기를 과도히 많이 소개하거나

방송의 힘을 빌려서 신유집회나 여러 홍보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