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3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주님

LNCK 2013. 6. 28. 11:15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주님    욥1:6-8, 마27:40-44     13.04.14.  스크랩, 정리

  

◑서론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24살이던 1997년 12월 10일,

수령 900년 된 65미터 높이의 삼나무(Japanese Cedar) 위에 올라갔습니다.

캘리포니아 험볼트 카운티에 있는 이 나무의 지상 55m 지점에, 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의 좁은 공간에서 무려 738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줄리아는 벌목회사인 ‘퍼시픽 목재회사’에 맞서 나무 위에서 시위하고 있었습니다.

 

 

연방정부는 퍼시픽 목재 회사에 4억 8천만 달러를 보상해주고

회사가 벌목하려던 4천 핵타르 의 삼나무 숲을 보존지역으로 설정하였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줄리아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고 합니다.

738일, 즉 2년이 넘도록 나무 위에서 버텼기 때문이죠.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은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큰 의미를 시사합니다.

우리의 지구를 살리고, 숲을 살리려고 한 감동적인 환경보호 이야기입니다.

자연을 살리는 지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구촌에 보여 준 것입니다.

 

▲십자가의 높이는, 영화와는 달리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9:29에는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라고 합니다.

 

갈대의 길이는 고작 90cm 정도 되므로, 십자가는 210cm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인의 키에 비해 볼 때 조금 높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내려오지 못할 만큼 높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즉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위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 위에 내려오신 적도 있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시지 않으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려오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끊임없는 역사는 주님을 향해서 계속됩니다.

인간이란 한계를 마귀는 알고 있으므로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인간적 시험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마귀는 시험을 합니다.

공생애 기간 내내 쉼 없는 시험을 사람들을 통하여 합니다.

 

사탄의 시험과 유혹은 사탄의 존재이유입니다.

죽이려 하고, 돌로 치려 하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최후의 유혹을 합니다.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엄청난 시험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강도들도 욕하더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강도보다 못한, 강도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데 내려오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만일에 내려오시면 우리의 구원은 무위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지 않은 이유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은 이유를 묵상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흘 후에 인류의 구속을 완성하시기 위해,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롱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전을 헐고, 신약의 교회를 짓는 자이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가실 때에,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까지

이 말을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막15:29 

 

마27: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저지하기 위해, 조롱의 .. 참으로 참기 힘든 방식을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리셨다면,

인류의 구원은 어떻게 되겠으며,

또한 예수님의 자기 사명 감당은 ..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패한 구세주'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꿋꿋이 십자가 위에서 버티시며,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이유 중 한 가지는, 

 

조금만 더 견디면, 사흘만 지나면 부활하실 텐데, 내려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그 길에는 '버팀, 견딤'이 요구될 때가, 일정 기간 정기적으로 찾아옵니다.

그것이, 본문의 예수님처럼, 참기 어려운 조롱으로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당장 십자가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온갖 조롱을 다 참으신 예수님을 우리가 깊이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지난 번 성지 순례 때, 어느 수도원에 갔을 때 경험으로는

수도사의 삶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거의 세상과 단절되어,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특히 봉쇄수도원 같은 곳에 가면, 외부 면회는 물론이요

가족 면회도 허용되지 완전히 않았습니다.

과거에 부모님이 면회가면, 손만 내밀어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대화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봉쇄수도원은, 얼굴은 보여준다고 합니다.

마치 교도소 면회간 것 처럼 이제는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지만, 여전히 중간에 가로막은 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수도원이 우리의 삶보다 훨씬 편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비하하려는 목적은 전혀 아니지만,

세상과 단절되어 기도원 같은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있으면,

기도하고 성경보기가 일면 쉽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섬기기가 일면 쉬운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독한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세상과 접하며, 세속의 한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셨듯이, 우리는 <재림>의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매일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사람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루 하루 그저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주의 재림 뿐만 아니라, 세상 복음화의 완성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마24:14절처럼,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날마다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위해서도,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지만, 우리가 날마다 참고 견뎌야 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린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위해서 참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열매는 '참음으로 기다린 후에'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서양격언에는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던 청교도가 자주 쓰던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8:18에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현재적 고난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삶은 장차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현재적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십자가를 절대 내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사는 삶을 삽니다.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지 말고

절대 이 신앙의 삶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도 자기 사명의 자리를 지켜며, 내려오지 말아야 합니다. 

 

존 스토트는 교회의 ‘이중성’이란 말을 말했습니다.

교회는 성화되었으나,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거룩하라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교회는 풍족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불완전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고통스러운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고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구원받은 삶은,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입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은 그 삶을 본받아 사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삽시다.

예수님과 함께 매 달린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 삶을 삽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내려오지 말고,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구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골프 치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의 어느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골프대회에 나갔습니다.

 

네 사람씩 조를 짜서 단체경기를 하는데, 자신의 점수는 엉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팀원들이 잘 쳐서 우승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친 공이 숲으로 날아 가기도 했고, 그린에서 한참 벗어나 물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실력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제대로 된 4인조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막강한 4인조는 바로 나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환상적인 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루케이도는 말합니다.

 

내 실력 때문이 아니라, 내 팀원들 때문에 내가 함께 상을 받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합작하여 나를 승리하고 우승하게 하려고 십자가를 주십니다.

이기는 비결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내가 거기서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좀 부족해도, 실력이 없어도, 단체 우승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시합은, 반드시 이기기로 작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후 승리가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의 모든 삶은 우리를 위한 것들입니다.

주옥같은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주린 자를 먹이셨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일들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