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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난 청년

LNCK 2013. 6. 23. 19:07

◈다시 살아난 청년            행20:9~12                  13.05.19. 설교스크랩

 

현대를 ‘연령주의 사회’라 합니다.

‘젊게 보여야 된다’고 하여, 젊게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노화방지에 들이는 돈이, 경력이나 자격증을 얻는 돈 보다 더 들어 갑니다.

젊고 예쁜 것이 가장 큰 경쟁력입니다.

 

최근에는 기능성화장품을 찾는 사람이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불쌍하지요?

 

청년이란 한자말을 풀면 ‘푸른 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네아니스코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새롭다는 ‘네오스’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청년기라는 것입니다.

 

◑서론/ 예수님은 죽은 영혼을 살리기 원하십니다.

 

▲“당신은 청년입니까, 청년노인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면 청년입니다.

자기에게 친숙한 곳, 안정지대만 머물러 있으면 청년노인입니다.

 

“꿈꾸지 않는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청년은 꿈을 꿀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꿈을 꿀 기회가 있습니다.

“갈망하는 청년이냐, 회상하는 청년노인이냐?”라는 말도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고 앞을 향해 간다면 청년입니다.

뒤를 돌아오며 과거지향적으로 산다면 청년노인입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청년에게는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일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다시 살게 한 세 사람이 있습니다.

소녀인 야이로의 딸과, 장년인 나사로와, 청년인 나인성 과부의 아들입니다.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와 함께 와서 어머니를 위로하여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청년인 아들이 다시 살아남으로 꿈이 생기고, 희망이 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어 장례를 지내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소리는 그에게 생명이었고, 용기였고, 희망이었고,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이 소리가 귀에 들리기를 바랍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1에는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합니다.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이미 죽은 것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고린도후서 6:9에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습니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자가 있고,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자가 있습니다.

 

◑본문 설명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에 드로아에서 사역을 합니다.

드로아에서 밤늦게까지 말씀을 전하고 있었는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서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유두고가 왜 떨어졌지요?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왜 졸았습니까?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었습니다.

밤이 늦어 피곤한데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떨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의사인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죽었다는 말을 헬라어로 ‘네크로스’라고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이 말은 유두고가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3층에서 떨어졌는데 죽었을까, 잠시 기절했겠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2층에서 떨어져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분명히 죽었다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유두고는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는 도르가라는 죽은 여인을 살렸습니다.

도르가는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고, 죽기 아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당시의 관습은 죽으면 곧장 장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장례를 하지 않고 다락에 모셔놓고 베드로를 불렀던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성경말씀처럼 유두고라는 죽은 청년을 다시 살렸습니다.

유두고는 아직도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죽기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청년들이.. 생명이 살아있는, 죽기 아까운 젊은이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1. 죽은 것 같지만 아직도 생명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10에는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라고 합니다.

 

죽었던 청년이 바울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누구나 실낱같은 생명이라도 있으면 다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납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은 “다행하다”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죽은 줄로 알았는데, 살아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청년이 다시 살아난 것은, 청년 자신이나 성도들에게 다행한 일입니다.

 

어떤 이는 기절한 청년을 바울이 인공호흡으로 살렸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참 성경을 까다롭고 힘들게 믿고 있습니다.

너무 이지적으로 성경을 해석해도 문제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바울이 죽은 청년을 살렸다고 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죽어 있는 청년 유두고에게, 생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죽었다’고 했는데, 바울은 그에게서 생명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서 생명을 보아야.. 살릴 수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보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에 비웃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 안에 있는 생명을 보셨습니다.

죽었지만 다시 사는 생명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죽은 청년의 속에 있는 생명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청년, 영혼이 죽은 사람들에게서.. 생명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그 아이 위에 엎드려 입과 입이,

눈과 눈이 마주치게 하고 손을 대니

몸이 따뜻해지고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살아났습니다.

 

바울도 비슷한 모습으로 유두고를 살립니다.

청년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습니다. 그랬더니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외형입니다. 예쁘고 멋있는 겉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보는 것은 내면입니다. 그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만 보기 좋으면 예쁘다고 하고, 멋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은 듯이 보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로고스’입니다.

요한복음 1:4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보십니다.

 

예수님이 그러하듯이, 바울도, 사람의 안에 있는 생명을 보았습니다.

유두고가 죽은 것 같지만, 바울은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4:12에는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시련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들 안에 생명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성도들 안에 생명이 있으면 아무리 고난을 당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는, 예수님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은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였습니다.

 

버가모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였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였습니다.

 

서머나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였습니다.

서머나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은 다른 교회에 나타난 예수님과 달리,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입니다.

 

요한계시록 1:17하반절-18상반절에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소개하던 그 말로, 서머나교회에 나타나셨습니다.

순교에 직면하여 죽은 것 같지만, 살아있는 교회가 서머나교회였습니다.

 

서머나교회는 폴리캅이라는 유명한 감독이 순교를 각오하며 복음을 지킨

바로 그 교회입니다.

 

▲1956년에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29세의 청년선교사와 네 명의 친구가 에콰도르 쿠라사이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그들의 순교가 신문에서 알려지자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젊은 수재가

그렇게 허무하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다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20대 초반의 엘리엇부인은 “낭비라니요?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뜻을 이루고 순교하였습니다.

이후로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라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엇부인은 한 살, 두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에콰도르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남편을 죽인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한지 5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마을사람 천 명이 다 예수를 믿고,

젊은 선교사들을 살해한 5명의 인디언 중 4명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짐 엘리엇은 죽었지만, ‘생명’이 아우카족에게 살아 있었습니다.

 

▲에스겔 37:9에는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숨결, 생기가 들어가면 죽었던 자들도 다 일어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

 

우리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청년들이 다시 살아나서 부모님, 교회, 사회, 국가

그리고 세계에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본론2.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위로를 받습니다.

 

사도행전 20:12에는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고 합니다.

드로아의 신도들은 죽었던 청년이 다시 살아난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죽었던 청년이 살아남으로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과부가 된 수넴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장사 지내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아들만 바라보고 살던 어머니에게 희망을 준 것입니다.

아들이 다시 살아나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청년이 다시 살았다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청년이 모름지기 살아 있어야, 교회에 웃음이 있고 교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시편 11:3에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고 합니다.

 

왜 청년들이 새벽이슬 같습니까?

호세아 14:5에는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라고 합니다.

 

새벽은 은혜의 시간입니다. 이슬은 성경의 은총 중의 은총입니다.

이슬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고요한 은혜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교회에 청년들이 소리 소문 없이 모인다면, 교회는 이슬 같은 은혜가 함께 합니다.

청년들이 새벽에 내리는 이슬같이 쌓인다면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민족이 희망에 부풀게 됩니다.

 

청년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무의식중에라도

그들이 교회로 발걸음이 향해야 합니다. 이래야 교회도, 청년도.. 복을 받습니다.

 

청년이 살아 있는 교회는 희망이 있고 위로를 받습니다.

반면에 청년이 죽은 교회는 절망이 있고 고민이 쌓입니다.

 

“청년은 교회의 미래입니다.”

청년들의 기를 살리는 교회가 희망이 있는 교회입니다.

 

청년들의 기를 꺾는 교회는 희망이 없는 교회입니다.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들의 기를 살려주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요즘 용어로 ‘키덜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의 ‘키드’와 어른이란 말의 ‘어덜트’를 합성한 단어입니다.

몸은 어른이지만 행동과 취향은 어린이인 사람을 ‘키덜트’라고 합니다.

 

어른인데 장난감이나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른을 말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키덜트’ 용 장난감이 호황이라고 합니다.

 

왜 우리사회에 ‘키덜트’족이 많아집니까?

어른이 되어도 어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어린이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또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어른이 되기 싫은 과거지향적 삶을 가지게 합니다.

‘키덜트’족이 많은 것도 사회가 풀어가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13:11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합니다.

장성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하는데, 사회 환경이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에베소서 4:14에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합니다.

그리고 15절에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어른입니다.

청년들은 자라야 합니다. 청년들은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청년의 생명이 죽고 장래희망이 사라지면 점점 우리사회는 ‘키덜트’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태초에 하신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는 탄생과 유아기 입니다.

레위기는 유년기 입니다. 민수기는 청년기 입니다. 신명기는 성인기 입니다.

 

민수기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군대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궁극적으로 국가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희망적인 젊은이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에 전파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젊은이가 살지 못하면.. 한국은 <포스트 크리스천 시대>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유럽과 미국이, ‘포스트 크리스천 시대 Post-Christendom’를 살고 있습니다.

보통 한국어로 ‘후기 기독교 시대’라고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요..

이 설교에서는 ‘포스트 크리스천 시대’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후자가 더 선명한 번역입니다.)

 

*post: 후(後)라는 말인데, 포스트 크리스천은, 한 때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했으나,

이제는 그 시기가 지나가고, 현재는 신앙이 거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미국의 바나그룹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의 성인 37%가

과거에는 크리스천이었으나, 현재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기도도 안 하는..

소위 ‘포스트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믿음을 수반한 행동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가나안 성도’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가나안 성도’는 교회에 안 나가는 성도입니다.

‘가나안’이란 말을 뒤집으면 ‘안 나가’입니다.

 

지금 한국의 노년층의 28%, 청년층의 48%가 ‘포스트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세대 간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젊은 층이 ‘포스트 크리스천’화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큽니다.

청년들이 빠져나가는 교회는 망하는 교회, 그런 나라는 망하는 나라입니다.

 

요한일서 2:14에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청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는

생명이 있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는 말

 

▲한 청년이 서서히 달리는 시내버스의 문짝을 두드리며 힘껏 달리고 있었습니다.

버스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데도,

청년은 그 버스를 꼭 타야 한다는 고집으로 버스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길이 조금 막혀 버스가 멈춰 서자 청년은 또 버스의 문을 두드립니다.

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자동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버스가 제 속도를 내며 질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년이 버스를 따라서 계속 달리려고 하는 순간,

한 어르신이 청년의 팔을 낚아채며 “이봐, 젊은이! 왜 이렇게 달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팔을 놓으세요. 저는 저 버스를 타야 합니다.”

청년은 어르신에게 신경질 섞인 말로 대꾸했습니다.

 

어르신은 청년의 팔을 놓아주며 “여보게 젊은이! 이렇게 달리면

바로 뒤에 오는 버스와 거리가 점점 멀어질 뿐이라네.

자네는 왜 뒤에서 오는 버스를 앞서 달리나?”라고 하였습니다.

 

앞서서 달려가는 공간은 이미 과거입니다.

뒤에서 달려오는 공간이 잡아야 할 미래입니다.

 

▲이번 주간 5월 20일자 ‘타임’(Time) 메거진에는

현대 젊은 세대에 대한 특집을 실었습니다.

표지에는 이들을 ‘나 세대’(The Me Generation)이라고 하였습니다.

 

“새천년동이들은 게으르다. 이들을 귀찮이스트라고 부른다.

이들은 아직도 그들의 부모와 함께 산다. 이들은 왜 우리 모두를 구할까?”라고 썼습니다.

 

청년들이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지만 그들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고,

우리를 구할 세대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모든 필요한 것들을 잘 준비하여, 달려오는 미래를 꼭 붙잡기를 바랍니다.

죽지 않고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청년이 되어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위로가 되고 훌륭한 미래의 주역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