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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성장의 양면성 / 데이빗 구직

LNCK 2013. 7. 11. 11:00

www.youtube.com/watch?v=2ilSg_tcIVE

◈성장의 양면성              고전15:10                      source         中文

 

The Mystery of Multiplication by David Guzik

 

▲기독교는 자체적으로 성장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한 알의 씨앗이 30배, 60배, 백배의 결실을 맺듯이

계속 성장하고 증가하는, 그 자체적 속성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태동하던 주후 1세기 경에는

세계인구 360명 중에, 기독교인이 1명의 비율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인 지금은, 세계인구 5명중에, 기독교인이 1명의 비율입니다.

그만큼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계속 성장해 왔습니다.

 

최근의 예를 봅시다.

1950년 경, 중국은 외국 선교사들을 모두 내쫓고, 교회를 폐쇄시켰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전 중국에 약 1백만 명이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은,

약 8천만~1억명 정도의 기독교인이, 중국에 있다고 봅니다.

60년 사이에, 1백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에는, 매일 2만8천명이, 기독교인이 된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매일 7만4천명이, 기독교인이 된다고 합니다.

1년에 2천7백만 명이, 기독교인이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그 자체로 계속 증가하고, 성장하는 속성이 있다

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양면을 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 그런 자체적 성장의 속성이 있다고,

가만히 놔둔다고, 우리가 수동적으로 있을 때, 무조건 다 성장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힘을 다해 수고하는 면이 둘 다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 숫적 증가, 양적 성장이

중국에, 남미에, 아프리카에만 일어나야 되는 것은 아니고요,

미국과 유럽의 우리 공동체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진정 바란다면, 무조건 가만히 수동적으로 기다린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고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정이 있어야 하고, 희생적 헌신이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은 단독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내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내가 순수한 동기로 희생하고, 봉사할 때.. 나를 사용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뜻’만 믿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뜻’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강력하게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국, 남미,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성장을 믿는 사람은,

그 성장이, 오늘날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구미 교회는 더 이상 성장이 안 된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항상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우리는 열심히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5:10절이 이 내용을 잘 보여줍니다.

 

▲먼저는 <은혜의 측면>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위 구절은, ‘하나님의 은혜/ 주권’이냐?

아니면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냐? .. 그 혼란스런 질문에 대해

바울은 간결하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 둘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리고 ‘사도’로 불리기에도, 송구스럽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기에, ‘사도’라고 불리기에도 송구스러운 자신이

어떻게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10절에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와 동시에 바울은, <인간적 열심과 수고>를 말합니다.

고전15:10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저 구직 목사는, 이 구절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바울 사도님, 당신이 정말 이렇게 말했습니까?’ 라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대조적인 두 개념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동시에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다가,

갑자기 ‘인간적 수고’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니요...

겸손해야 할 사도가, 그것도 12사도에 뽑히지도 못한 분이,

자기가 베드로, 요한, 빌립 등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요?

 

여기에 모이신 목회자 여러분 중에는,

그 누구도 ‘내가 다른 목회자보다, 김목사, 이목사, 박목사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물론 교만은 아니고요,

바울은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10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자기는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은혜를 받았으니, 아무 일을 안 하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다’ 라는 말은

사실은 아무 은혜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은혜가 헛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다른 목회자들보다 더 수고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요.

 

정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기도, 열정, 수고>는, 둘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운운하면서,

<인간의 기도, 열정, 수고>가 없는 것은.. 사실은 은혜를 못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야망, 자기 열심에서 출발한

<인간의 기도, 열정, 수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그래서 만약 우리가 바울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바울 사도님, 당신이 열심히 사역한 것이, 은혜였습니까, 당신의 열심이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먼저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15:10

 

-여기서 바울은, <은혜>와 <인간의 수고>를.. 둘 다 말합니다.

-그러나 둘을 상호 모순, 대립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 (우리는 대립적 개념으로 봅니다.)

둘을 상호 보완적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은혜’를 운운하면서,

가만히 수동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열심히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은혜가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주권, 뜻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열심을 내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 주권, 뜻을 분변해서

그 뜻에 따라 인간적으로 기도/ 열심/ 헌신하지만,

우리는 그 공로를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돌려야 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강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전략도 세우고,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 저절로 되겠지..’ 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한 구절만 살펴볼까요?

  

고후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생명이 있는 것은, 저절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 풀, 꽃.. 저절로 자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가꾸어, 아름다운 에덴동산 같이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작을 잘 하면, 소출도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위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예를 봅니다.

어떤 때는.. 선교가 저절로 막 되어지기도 하고요,

어떤 때는.. 신자들이 계획하고, 전략을 세우고,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행11:19~21절에,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위 구절은,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배경을 설명하는데..

인간의 어떤 도움도 없이,

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세워진 면을 보여줍니다.

 

안디옥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어떤 인간적 전략이, 사전에 없었습니다.

그냥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일어나서, 쫓겨 가서 안디옥에 교회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가고 피신했는데.. 안디옥에 저절로 교회가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그 후에,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는

<인간의 기도, 열정, 수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지만, 그저 우연히 되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주권,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면,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인간의 기도, 열정, 전략, 수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제 주장은, 우리 교회에, 또한 우리 개인적 삶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둘 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끌어 가시는 <주체>는, 성령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이끌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이끌고 가시기 원하시는데,

우리가 팔짱 끼고, ‘하나님의 뜻이면 다 저절로 되겠지’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닷가에 가면, 윈드서핑이나 윈드스키를 타는 모습을 봅니다.

그 기구는, 전적으로 바람을 이용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윈드서핑이나, 윈드스키를 두 팔로 꼭 붙들어야 합니다.

그 힘이 상당히 듭니다. 그 돛을 손으로 놓쳐버리면, 그만 물에 빠지고 맙니다.

물론 좌우 균형도 잘 잡아야 하고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헌신>이 둘 다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50對50이란 뜻은 아니고요.

 

<하나님의 주권, 은혜>가 강권적으로, 강하게 나를 이끌어 가시지만,

<내가> 헌신적으로 거기에 꼭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양적 증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저 두 손, 두 발 다 놓고 있을 때는.. 대개의 경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주권>이, 강한 바람처럼 이끌어 가지만요,    强

<내가 기도, 열정, 수고>하며, 그 돛대를, 그 줄을 꽉 붙들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弱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