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샘 삼상13:13~14, 잠14:27, 행9:31 출처보기
A FOUNTAIN OF LIFE by David Wilkerson
▲한때 성령님에 의해, 놀랍고 능력 있게 쓰임 받다가
불행하게도 나중에는 창고에 방치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 긍휼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들어서 사용할 수는 없단다.”
만약 제 윌크슨에게 그런 주님의 선고가 내려진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만
그러나 이 시간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그런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사랑하지만, 내가 너를 일꾼으로 쓸 수는 없다’는 판정을 듣는 일, 말입니다.
바로 이런 불행한 일이, 사울 왕에게 일어났습니다.
▲삼상13:13~14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사울아, 너는 내 축복을 네 생애에 계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네 불순종으로 인해, 내가 줄 축복을, 네 발로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나는 너를 사용해서 쓸, 위대한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너를 왕으로 불러서 세운 것 자체가, 그 증거였다.
그런데 나는 그 계획을, 계속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울 너는, 네 죄를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는 더욱 강퍅해지고, 더욱 완악해졌다.”
얼마나 슬픈 말입니까!
이게 사울에게 일어났으니, 다행이지
만약 내가, 이런 말을 듣는 주인공이 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한 일입니다.
정말 삼상13:13~14절의 사무엘의 예언이 있은 후부터,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때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아,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까지 선택된 사람이,
나중에는, 기름 부으심이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이
여러분,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가룟유다가 그랬고요!
이제 문제는, 우리 시대이고,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도, 내 죄를 처리하지 못하고, 계속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계속 섬기려 할 때.. 사울 왕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결국은, 메마른 광야와 같고,
혹시 운 좋게, 내가 맡은 사역은, 별 탈 없이 끝낼 수 있을런지 모르나,
그 사역의 열매는,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잠14:27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올가미(또는 덫)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그 여호와 경외가, 나를 ‘사망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 생활을 하고, 직분을 맡았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결국은 ‘사망의 그물/ 올가미/ 덫에 잡혀서.. 사울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경외’하기를 버릴 때, 무시할 때.. 그 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올가미’에 그냥 걸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28절도 “하나님을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serve God acceptably with reverence and godly fear.”
▲행9:31절을 봅니다.
위에서 제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사망의 올가미를 피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부터는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입니다.
행9:31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초대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간 것은,
그들의 교회의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아예 안 짓는, 날 때부터 거룩한 족속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이 연약해서 죄를 짓게 될 때
하나님은 ‘죄책’을 주십니다. *conviction of sin
죄책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 양심에 화살을 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즉시로 양심이 아파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는.. 죄책이 올 때, 즉시로 돌이키고, 즉시 회개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사울 왕처럼 완악해지고 강퍅해지면,
죄책이 와도, 양심으로 죄를 깨달아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행9:31절은, 교회에 관한 말씀이지만, 거기에 ‘나’를 대입해도 같은 뜻이 됩니다.
‘내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가는 것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더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위 구절에서 ‘성령의 위로’란,
회개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성도는, 죄를 보면 피하여 달아납니다.
그러나 가끔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성령이 죄책을 주실 때, 즉시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바로 그 때 <성령의 위로>가 임합니다.
죄책이 화살과 같이, 예리하게 성도를 찔렀다면,
성령의 위로는, 솜털처럼 부드럽게, 성도를 감쌀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도, 교회도.. 든든히 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경외함’이 있는 곳에 ‘성령의 위로’가 같이 따라갑니다.
반대로, 주를 경외함이 없는 곳,
죄책(죄를 슬퍼함)도 없고, 회개도 없는 곳에는,
성령의 위로가 같이 따라갈 리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 핵심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의 위로를 받아서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숫자적으로도 더 성장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위에서, 잠14:27절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샘물이 날마다 퐁퐁 솟아 오르듯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성도에게는,
성경의 모든 약속, 모든 은총, 모든 생명, 모든 성령이
계속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샘물처럼 끊임 없이 솟아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면,
사울왕처럼 되고 맙니다.
한 때 하나님께 능력 있게 쓰임 받다가도.. 결국은 버림을 받습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당할 때,
혹시 죄를 짓기 시작할 때, 초기 단계일 때,
성령님은 계속해서 경고 싸인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거기에 반응해서 회개합니다.
그러면 슬픔이 있지만, 결국은 성령의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성도는.. 성령의 죄책 싸인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계속 완악하며, 계속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울 왕처럼..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생명의 샘’이 되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오늘 당신(나)에게 ‘생명의 샘물’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내 영혼에 어딘가가 고장 나 있고,
나는 회개해야 하며, 그 생명의 샘물을 다시 솟구쳐 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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