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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13장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LNCK 2013. 9. 6. 15:06

https://blog.naver.com/karamos/80140022430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느13:5-14              

 

◑서론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큰 사고를 쳤다”

느헤미야 13장이 바로 그런 장면입니다.

느헤미야가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유다백성들이 큰 사고를 쳤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들어가는 술에 독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보안 경찰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벽이 무너져서 도적이 횡횡하고, 치욕과 수치가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기도를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온 때가 B.C 444년 이었습니다. 외우기도 쉽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땅에 올 때, 총독의 신분으로 왔습니다.

느헤미야 5장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20년부터 32이년까지

12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니깐 12년 동안 느헤미야는 유다 땅의 총독이 되어 성벽 재건하는 일에 성공을 하고,

백성들의 신앙을 바르게 지도했습니다.

 

12년 일을 하니깐 힘도 들고, 페르시아는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12년 만에 페르시아에 다시 돌아 간 것이었습니다.

 

돌아갔다가 1년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1년동안 유다 총독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것입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유다 백성들은 급속하게 신앙적인 배역(backsliding)을 했습니다.

신앙이 앞으로 전진을 해야 하는데 뒤로 자꾸 미끄러져, 하나님으로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는 느헤미야 12장 말씀을 보았는데,

유다 백성들은 성벽재건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하고, 승리의 기쁨과 완성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 13장은 유다 백성들은 ‘행복하였더라’라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성벽 낙성식을 하고 기쁨을 누린지 벌써 11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가서 일년 동안 총독의 자리를 비웠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다 백성들은 급속히 배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유다백성들의 배역

 

▲1.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느헤미야를 극단적인 인물이라고 비판하고,

도비야와 한 통속이 되어 성전의 십일조 보관하는 방을 내주었다

 

느헤미야가 1년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유다 백성들의 1인자가 되었습니까?

바로 대제사장 엘리아십이라고 하는 사람이 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아십은 느헤미야 13장 28절을 보면 대제사장이라 했고,

또 그의 사명은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거두어서 성전에 있는 골방, 즉 저장하는 방,

창고에 기름도 거두고, 곡식도 거두고, 포도주도 거두고

제사장들에게 나누어 줄 거제물도 거두어 저장하는 창고의 책임자입니다.

대제사장이니깐 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가 1인자가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그가 우두머리가 되어서 슬슬 느헤미야를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가 좋은 사람이긴 한대, 느헤미야는 너무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같아.

너무 극단적인 면이 너무 많은거 같아. 느헤미야 신앙은 너무 광신적 같단 말이야.

안식일에도 좀 장사를 하면 안되나? 이방인들과 교제를 넓히고 무역을 하고,

무역 개방의 정책을 써야지 느헤미야처럼 그렇게 신앙만 따지고,

하나님 말씀만 따지는 보수적인 신앙에 메여 있으면 되나? 타협이 필요하지 않은가?”

라고 했던 것입니다.

 

엘리아십의 말을 계속 듣다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립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백성들이 들으면 일리가 있는 말같이 들리는 사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십 대제사장이 십일조를 저장하는 방에 있는 십일조 물품을 끄집어 내고

그 방을 느헤미야의 철천지원수, 옆구리 가시 노릇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내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도비야와 한 통속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 거두는 방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도비야가 십일조 거두는 방에

자기 세간을 갖다 놓고 성전안에 있는 방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그곳이 호텔입니까? 십일조를 거두어도 저장 할 방이 없으니

백성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노래 할 사람들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있다가 굶어 죽겠다 싶어

고향으로 흩어 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엉망이 된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엘리아십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10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4가지 언약을 맺었습니다.

 

2. 유다백성들은 느헤미야 10장에서 하나님과 맺은 4가지 언약을 모두 파괴했다

 

첫째, 하나님의 전을 버렸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9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라고 했는데

느헤미야 13장 11절에는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하고

느헤미야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안식일에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느헤미야 13장 15절에 보니 이방 사람들이 안식일에 들어와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안식일이 파괴된 것입니다.

 

셋째, 십일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7절에서는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하나님의 전,

골방을 두겠다고 하더니

느헤미야 13장 10절에는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함으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도망갔습니다.

 

넷째, 이방인의 딸과 통혼하였습니다.

느헤미야 10:30절에는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않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는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 라고 했는데,

 

느헤미야 13:23절에는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이방여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방여인이 낳은 아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고,

아버지의 언어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이며, 히브리어를 씁니다.

그런데 그 자식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여인 엄마가 안고, 이방나라 말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13:24절을 보면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엄마가 이방여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 말을 못합니다.

말하자면, 한국 사람이 월남 여인과 결혼했는데,

엄마가 월남말만 가르친 것과 같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6년 살았습니다. 우리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집에 오면 영어만 하라고 합니다. 한국말 잘 모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2세대 아이들만 봐도 한국말 잘 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자식을 낳아서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말을 가르치지 않으면 문화와 정신을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말에는 그 문화와 정신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먼저 모국어를 가르치고,

외국어를 가르쳐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화가 낫겠습니까?

느헤미야 10장에는 언약을 맺었지만 모두 깨뜨렸습니다.

 

3.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부패가 이렇게 큰 영향을 끼쳤다

 

대제사장 엘리아십, 이 한사람이 신앙의 타협과 부패가

백성들에게 잘못된 사고와 사상을 가지고 인도하자,

온 유다 백성의 영성이 급격히 하강해 버린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12년동안 목숨 걸고 올려놓은 신앙의 영성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큰 대[大]가 붙은 사람이 미치는 영향력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고 말할지는 몰라도,

이 한 사람이 잘못된 사고와 철학을 가지고 반국가적, 반민족적 사고를 가지고

이끌어 가면, 백성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물러나야 합니다.

 

▲4. 신구약에 반복되는 현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쉽게 배역(배반+반역)한다는 것이다

 

느헤미야 13장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확실한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는 지도자가 없어지면

쉽게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쉽게 하나님을 배역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순절날 성령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기뻐한 교회들도 고린도 교회처럼 분열하고 송사하고 서로 고소하고

음행을 저지르고 사도권에 대한 도전을 합니다. 이런 배역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큰 은혜를 받은 세대일지라도, 10년만 지나도 배역하고 부패하는 동일한 현상이

역사 속에 반복되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역 현상이 역사 속에 일어났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이 안 된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배역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5. 경각심을 가지고 배역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느헤미야 13장은 참으로 슬픈 장(chapter)이기는 해도

하나님의 교회에 경각심을 주는 유익한 장(chapter)입니다.

 

우리에게는 배역이라는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영성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영성(spirituality)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네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사람은 2010년도에 다시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살아서 잘 된다고 해도 죽으면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끊지 마시고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느헤미야의 개혁

 

▲1. 하나님은 “한사람”을 통해서 교회를 개혁하신다

 

백성들이 배역하니깐 느헤미야가 개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회를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1517년 개신교 종교 개혁을 이끈 사람은 마르틴 루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거스틴 종단에 속한 수도승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편과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사람이 천국가는 것은 착하다고 가는 것이 아니구나.

선행을 행한다고 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게 되고, 의로 말미암아 천국가게 되는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돌파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종교 개혁은 인류 역사상 위대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죽고나자 후계자가 1인자가 되었습니다.

멜랑히톤(Melanchthon)입니다. 이름 그대로 “멜랑 멜랑” 해서

루터가 개혁 해 놓은 신학을 상당히 변질시켜 놓았습니다.

 

19세기말 영국 침례교회에는 찰스 스펄전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지만

16살 때부터 설교를 하고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영국의 국교는 성공회입니다. 국교가 아닌 사람을 비국교도(Nonconformists)라 하고

비국교도를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핍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 수도인 런던에서 비국교도 침례교 목사님 스펄전 목사님은

2만 명이나 참석하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Metropolitan Tabernacle)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꽉 찼습니다.

길 건너가면 좋은 교회가 있으니 그 교회로 가십시오.”

 

길 건너 교회는 누가 목회 했냐면, 스펄전 아들이 목회 했습니다.

아들 교회로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펄전은 철저하게 진리를 설교했고, 철저하게 바울과 어거스틴이 가르쳤고,

루터가 회복했고, 존 칼빈이 확립한 개혁주의 신학을 설교 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이 죽고 나자 후임자가 신학은 변질됐고,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 교회는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조그마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20세기 영국 최고의 설교자는 두 말할 여지없이 마틴 로이드 존스입니다.

그는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설교의 탁월한 은사를 발견하고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평생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 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저는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를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설교자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죽고 나자 후임자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신학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되느냐 바로가느냐 잘못가느냐는 것은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 개혁은 지도자 한 사람의 사상과 흥망성쇠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서 유다백성을 개혁하셨다

 

유다 백성들이 숫자가 많을지라도 개혁은 느헤미야 한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느헤미야 10장의 맺었던 언약을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의 전을 정결케 하고 레위 사람, 노래하는 사람들 다시 불러 옵니다.

또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다시 갖져다

곳간에 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비야는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문을 닫아 버리고 아무 거래도 못하게 만들고

장사꾼은 안식일에는 성 근처에서 잠도 못자게 쫒아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딸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잡어다 때리고, 머리털을 뽑아 버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사람 머리털을 잡아 뽑았겠습니까?

여자들도 화가 나서 싸울 때는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웁니다.

머리끄댕이를 잡는 것은 화가 많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고 합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에게 성전 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아십의 손자는 산발랏, 도비야, 게셈은 3대 원수인데, 이들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불러 너 같은 인간은 유다 백성의 소속될 가치가 없으니

나가라고 했습니다. 추방하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개혁을 했습니다.

 

▲3. 느헤미야는 확신(Conviction)과 용기(Courage)를 가진 지도자였다

 

개혁가인 느헤미야에게서는 2가지 성품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는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나이도 많습니다. 총독으로 와서 12년 지나고 1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1년 사이에 이방여인과 결혼 한 애들이 커서 말 할 때가 되었으니

4-5년입니다.

 

느헤미야도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진리에 헌신한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따르는 것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나라를 번창하게 한다’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지옥가면 어떻하나?

이런 사람은 아무 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어 언제든지 천국간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2차 대전 중에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히틀러의 위세는 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정치가들이 처칠에게 히틀러와 싸우다간 백성들의 희생이 커지니깐

히틀러에게 항복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우리는 죽으면 죽었지 저 히틀러 같은 악인에게는 굴복하지 않겠다

(We will never surrender).”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연합군은 싸워 이기고 히틀러는 엉망되고, 독일은 패전 국가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윈스턴 처칠이 이런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도 히틀러가 지배하고,

우리 대한민국도 독일어 쓰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위대한 확신의 사람이었고, 느헤미야도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용기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무리 총독이더라도 나라를 통치하려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봐야 합니다. 중도노선을 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도노선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길만이 축복임을 확신 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추진했습니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13장 8절을 보면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던져 버렸다고 했습니다.

유리창이 부서지거나 말거나 창밖으로 모두 던져 버린 것입니다.

느헤미야 13장 17절에는 안식을 범하는 귀인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느헤미야 13장 25절에는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은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습니다.

느헤미야 13장 28절에는 원수 산발랏의 사위가 된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는

유다 백성들 가운데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느헤미야는 결코 독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비겁한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를 영적인 리더로 보지 아니하고 영적인 웨이터로 보는 교회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유다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가도록 돌이켰습니다.

 

사람이 잘 못 가면 잘 못 가고 있는 줄 압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길을 막아서고 “돌이키라”라고 하면 막아서고 방해 할 때는

괴롭지만 돌이키고 나면 행복한 것입니다. 평안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6학년 깡패 형한테 속아서

어머니 가게의 돈통에서 돈을 꺼내다가 갖다 주었습니다.

그 깡패가 빵을 사준다고 해서 갖다 준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돈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6학년 형만 계란빵 먹고, 저는 국화빵만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아주머니가 돈 훔치는 것을 발견했고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루 종일 아버지께 얻어 터졌습니다.

아버지 돈에 손대는 것도 ‘도둑이구나’하는 것을 알고 그 후로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제 마음이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6학년 깡패에게서 해방이 되었구나’

확신을 하니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이 평안 했는지 모릅니다.

 

인생 길 잘 못 갈 때에 그것을 바로 잡아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다시 길에서 돌이켜 바로 가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행복이고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잘 못 가는 백성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이끌어준 위대한 개혁가였습니다.

 

 

◑3.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

 

▲1. 느헤미야 13:31절은 내면적인 고독이 엿보이는 간구이다

 

느헤미야 13장 3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Remember me with favor, O my God)”

느헤미야가 마지막에 한 말입니다.

 

나를 기억 해 주실 때에 좋은 생각을 가지고 기억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 기도를 들을 때에 이 기도가 승리한 사람의 환호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쓸쓸하고 고독한 사람의 외로운 부르짖음으로 들리십니까?

 

고독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백성들의 악을 개혁하는 느헤미야의 내면적인 고독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느헤미야서는 happy ending으로 끝나지 않는다

 

느헤미야가 아무리 개혁을 하고, 또 개혁을 해도 느헤미야가 늙고 죽으면

유다 백성들은 또 다시 성전을 게을리 하고, 안식일을 범하고, 십일조를 떼어 먹고,

이방인과 통혼하고 했을 것입니다.

 

죄악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박멸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도력은 아무리 최상의 지도력이라 할지라도, 결코 완전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헤미야 13장은 개혁가 느헤미야의

외롭고 고독한 부르짖음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결론

 

느헤미야 13장의 슬픔은 하나님 내가 하긴 했으나 백성들의 죄악은 여전 합니다.

하나님 나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이것을 고백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안된다’는 말의 의미는 느헤미야서의 전체 메시지는 느헤미야를 넘어서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간 지도자 느헤미야를 넘어서서 참된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된다

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느헤미야처럼 자리를 비우시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없는 분을 만들어 섬긴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도 안 되는 철학을 만들어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천국에 계시고, 천국에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 삶 하나 하나를 통치 하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능력이 모자란 분도 아니요, 실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인간도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들의 영원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며

우리의 소망이 영원한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교회 담임목사로 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 은퇴해야 할 때가 옵니다.

저를 바라보시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죄를 용서 받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안 되는 상황이라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닌 예수님께 아뢰면

예수님이 최고의 권세자 이시기 때문에 왕의 마음도 바꾸시고,

나보다 윗사람의 마음도 바꾸셔서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지도자로 삼고, 예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3장의 전체 메시지입니다.

 

올해에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아

더 가까이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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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별 해석

 

느13:1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 날'

12:44의 '그날'과 동일한 날로 봄이 무난하겠다.

성벽 봉헌시 뜨겁게 달아올랐던 감격과 헌신의 마음 자세가 식기 전인 성벽 봉헌 직후에

계속 정화 운동을 전개했을 것이다.

특히 12:44부터 본장 3절까지는 3인칭 시점으로 기술된 데 반해

4절 이후부터는 1인칭 시점으로 바뀐다는 점

또한 본절의 '그 날'12:44'그 날' 의 동일성을 뒷받침해준다.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모세의 책'은 주로 모세 율법, 즉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어 전개되는 정화 운동이 철저히 성경 말씀에 따른 것임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암몬 사람...하나님의 회(會)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것은 신23:3의 요약이다. 한편 '하나님의 회'(카할 하엘로힘)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표현이다. 즉, 여기의 '카할'은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항상 '여호와'와 함께 사용된 것이다(레 4:13, 민 16:3, 20:4).

 

일반적로 '여호와의 회'는

1) 언약 공동체로서의 백성들의 모임(민 20:4, 신 23:1),

2) 성전(聖戰) 수행을 위해 모인 백성들의 집합, 혹은

3)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제의적(祭儀的) 의미에서의 회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 23:3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용된 이 '하나님의 회'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총회'(카할)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임에 분명하다.

 

느13:2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본절은 하나님께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엄금한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서, 신 23:4, 5의 요약이다.

 

'저희가...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암몬''모압'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접해야 했던 이유는,

두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과 혈통적으로 한 뿌리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다(창19-30-3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관계를 고려하여

절대로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었다(신2:9, 19).

 

'양식과 물'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두 가지였다(신 2:6,7).

 

'발람에게...저주하게 하였음이라'

이것은 모압 왕 발락이 주동이 되어 메소포타미아의 브올에 살던 복술가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가 임하도록 하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모압과 암몬 족속이 이처럼 행동했던 까닭은,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했던 아모리 족속까지 격파시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게도 그 같은 군사 행동을 취할까 염려해서 였다(민 22:2,3).

 

그러나 사실상 이 같은 염려는 어처구니없는 기우(杞憂)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형제로 인식하고 있었다(신 2:9,19).

이에 따라 그들은 다만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날 수 있는 길만 비켜주고(신 2:27,28),

2) 먹을 양식과 먹을 물을 돈을 받고 공급해주면 그만이었다(신 2:6).

 

'뇌물을 주어(사카르)'

'품삯을주고 고용하다' 혹은 '어떤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다'의 뜻(창30:28, 민18:31).

이것은 구체적으로,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한 대가로

발람에게 많은 은금(銀金)을 주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2:18, 24:13).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비록 발람이 모압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마음을 가졌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에 따라 그가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4장).

 

느13: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백성들의 이 같은 즉각적인 반응은, 그들이 칠칠절 절기 이래 계속적으로

에스라로부터 신앙적 감화를 받은(8:1,13, 9장) 결과였다.

 

'섞인 무리를...모두 분리케 하였느니라'

여기의 '섞인 무리'(에레브)는 '함께 사귀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아라브'에서 파생된 명사로

'함께 있는 사람'의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머물면서 성전 의식에 참여하는 등

이스라엘 사람 행세를 했던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 히브리어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했던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 바 있다(출 12:38). 그러나 거기서는 그들이 아무런 무리없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반면에 본문의 이방인들은 실제적으로 여호와 신앙에 바로 서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악습을 끌어들여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이 있는 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분리케 하였느니라'(얍딜루)는 '구분하다' 혹은 '나누다'의 뜻인 '바달'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강제적으로 이방인들을 쫓아내는 일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바달'이라는 동사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두 개체를 각기 위치해야 할 곳으로

완전히 갈라놓는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가운에서'

혹자는 전통적으로 진정한 이방인 개종자들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 받아들여졌으며

또 당시 팔레스틴에 이방인 거주자들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본문을 '종교적 모임으로부터의' 축출로 이해한다.

 

그러나 당시 이방인들로 말미암은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건대,

보다 단호한 조치가 취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느13: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이전에(리프네이 미제)'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다시 돌아가기 전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6절).

 

'우리 하나님의 전'

여기의 '우리''이스라엘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는'의 의미로 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표현은 암몬 사람인 도비야에게 성전의 방을 주었던

제사장 엘리아십의 조처가 대단히 잘못된 일임을 보여준다.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

본절의 '엘리아십'은

1) 대제사장 엘리아십(Raw-linson, Schultz, Kidner, Keil).

2) 동명(同名)의 또 다른 제사장(Fensham, Myers,Williamson) 등으로 추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첫째, 대제사장은 성전의 사소한 부분에 대한 감독권까지 갖고 있었으며

둘째, 본절의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다는 사실과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라는

28절의 내용이 잘 부합되며
셋째, 대제사장에게는 다만 '제사장'이라는 직함이 적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하 24:2, 스 2:63)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의 견해가 보다 타당성이 있다.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는 암몬 출신으로서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주구(走拘)였다(2:10).

그는 비록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뜻의 히브리식 이름을 가졌지만,

결코 여호와 종교의 예배자는 아니었다.

 

한편, '연락이 있므로'(카로브)는 (장소, 혈연 또는 시간등에 있어서) '매우 가깝다'는 뜻으로서

각별한 친근 관계를 가리킨다.

 

느13: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특별한 밀착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느헤미야의 귀환 전, 곧 오래 전부터였겠지만,

본절과 같은 시혜(施惠)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일시 돌아갔었던

B.C. 433-432년 동안에 이루어졌었다.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엘리아십이 여러 개의 곳간을 헐어서 하나의 큰 방으로 만들어 도비야에게 주었음을 뜻한다.

 

'그 방은...곳이라(하이우)'

원문상으로는 '그것들은...이다'의 뜻이다.

이처럼 본 동사(하야)의 주어 어미가 3인칭 복수라는 사실은,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준 '한 큰 방'이 여러 개의 작은 방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임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소제물'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섞어서 만든 일종의 무교병(레 2:1)으로서

상번제와 안식일 제사 그리고 대부분의 희생 제사와 함께 드려졌던 예물이다(민15:3:10).

 

'유향'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등의 향품을 동일한 비율로 섞어 증거궤 앞에 놓았던 제물이다(출 30:34).

 

'기명'

성전 제사 때에 사용되던 여러 가지 그릇들이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최초의 포로 귀환때 바벨론에서 가져온 것들임이 분명하다(스 1:6-11).

 

'레위 사람...노래하는 자...문지기'

세 종류의 레위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레위 지파에 속하였지만,

그 직임에 따라 이와같이 세 종류로 분류되었었다(2:40-42).

 

느13: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그 때에는' 문자적으로는 '이 모든 동안'이다.

구체적으로 도비야가 엘리아십의 호의에 따라 성전에 속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기간을 말한다.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 이년'

B.C. 433년을 가리킨다. 한편, '바벨론왕 아닥사스다'라는 표현은

페르시아 왕들이 바벨론 왕들의 후계자로 자처했던 전통과 관련이 있다(스 5:13).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간 것은

1) 그가 아닥사스다에게 약속했던 기간이 다 됐거나,

2)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호출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며칠 후에'(레케츠 야밈)는 문자적으로 '날들의 끝에'의 뜻이다.

추측컨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다시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을 의미하는 듯하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느헤미야가 B.C. 433년에 페르시아로 돌아가서

정확히 1년 만에 팔레스틴으로 귀환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느13: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이처럼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 다시 돌아온 까닭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여러 가지 개혁이 완결되지 않았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일시 돌아갔던 것도 분명히 본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 뜰'

스룹바벨 성전에는 두 개의 뜰이 있었다(사 62:9, 슥 3:7).

B.C.4세기 헬라 사가(史家)인 헤카테우스(Hecataeus of Avdera)에 의하면

그 성전의 안뜰의 길이가 500규빗이요 광이 100규빗이었다고 한다.

 

느13: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내가 심히 근심하여'

여기의 '근심하여'(야레)는, 산발랏 일당의 군사적공격 가능성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사용했던 단어이다(4:14).

그렇게 본다면, 느헤미야는 도비야가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호의에 따라

성전의 한 방을 차지한 사실을 산발랏 일당의 군사 공격만큼 두려운 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백성의 최고 지도자였던 그는, 도비야라는 이방인을 통하여 이루어질

이방 문화및 이방 종교의 침투를 심각하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느13:9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그 방을 정결케 하고' 추측컨대 그 방은 물이나 피를 뿌리는 등의

정결 의식을 통하여(레 14:52) '정결케'되었을 것이다.

 

느13: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

레위 사람들의 유일한 수입원(收入源)이었던 십일조를 가리킨다(10:37).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느헤미야는 십일조의 원활한 징수를 위하여 레위 사람들을각 성읍에 주재시켰었다(10: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불과 1년 가량의 기간 동안

성전 제사의 절대적 필요성을 무시할 만큼 영적으로 침체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받은 바 신령한 은혜를 계속 보존하기란 이렇듯 힘들다.

 

'레위 사람들...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성벽 봉헌식 이전에도 레위 사람들의 상당수는 여러 촌(村)에 흩어져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었다(12:27).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성실히 내겠다는 백성들의 다짐(10:37-39)을 믿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십일조 납부가 중단되자 다시 생업 유지를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도망하였기로(바라흐)는 생명의 보존을 위한 자구책(自球策)으로서

위험한 곳으로부터 떠나는 일을 가리킨다(삼상 19:18, 대하 10:2, 사 48:20).

 

느13:11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민장을 꾸짖어' '민장'(세가님)은 백성들 중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유력한 귀인(貴人)들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독려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할 책무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있어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레위 사람들이 성전을 떠나 촌으로 흩어짐으로써

성전의 본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게 된 현상을 가리킨다.

그들이 모두 떠나버림으로써 희생 제사와 관계된 일들이 제대로 거행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버린 바 되었느냐'(네에자브)는 '배반하다' 혹은 '모반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아자브'의 수동형이다.

 

느13: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십일조를...곳간에 들이므로'

백성들이 직접 십일조를 갖고 성전까지 왔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레위 사람들에 의하여 징수되도록 했던 느헤미야의 십일조 규정(10:37)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직접 성전까지 십일조를 가져온 것은

느헤미야의 호되면서도 충정어린 책망을 백성들이 달게 받아들였음을 암시한다.

 

느13:13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라

 

느헤미야의 이러한 조처는, 백성의 십일조 납부가 재개되어 성전의 곳간에 재물이 많아진

그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시의적절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느헤미야가 재물의 효율적 관리, 특히 분배 문제로 말미암는

불화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하여(10:38)

'(창)고지기'로서 각계 각층의 세 사람을 세웠다는 사실이다(고후 8:18-21).

 

'제사장 셀레먀' 성벽재건에 참여했던 하나냐의 아버지 '셀레먀'일 가능성도 있다(3:30).

'여호와의 친구'의 뜻이다.

 

'서기관 사독' 느헤미야의 부하 관리였던 '시드기야'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1)'시드기야'(여호와는 나의 의이시다)와 '사독'(의로운)은 모두

'의롭다'의 의미를 갖는 동일한 어근 '차다크'에서 왔으며,

2) '서기관'은 성전 운영의 국고를 담당하기도 했다는(왕하 12:10) 점 등이다.

 

'레위 사람 브다야'

이 사람은 에스라의 율법 낭독시 그의 곁에 있었던 레위 사람 '브다야'일 가능성도 많다(8:4).

 

'하난으로 버금을 삼았나니'

'버금을 삼았나니'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손에 두었다'이며,

하난이 위의 세 사람을 도와 고지기 직무를 수행하였다는 뜻이다.

한편, 위의 세 고지기가 각각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하난은 평민 출신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저희가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고지기라는 중책이 맡겨질 수 있었던 이유이다.

여기서 '충직한 자'(네에마님)는 '든든히 세우다'(삼상 25:28),

'확실하게 하다'(왕상 8:26), '신실하다'(사 49:7) 등의 뜻이 있는 동사 '아만'의 분사로서,

'신뢰할 만한 자' 혹은 '신임을 받는 자' 등의 의미이다.

 

느13:14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느헤미야의 이 짧은 기도는 이기심에서 나온 자고(自高)의 표현이 아니다(5:19).

 

'선한 일 (헤세드)'

이것은 일반적으로 1) 하나님의 은혜, 자비(시 5:8, 36),

2) 사람들 사이의 인자, 긍휼(창21:23, 욥 6:14),
3) 하나님을 향한 경건(사57:1)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전 제사 유지를 위한 느헤미야 자신의 신실한 노력을 뜻한다.

 

느13:15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밝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그 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재 귀환한 직후일 것이다.

 

'내가 본즉' 느헤미야가 총독의 자격으로 민정(民情)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특히 '본즉'(라아)은 세밀한 조사 관찰 행동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창 6:12, 22:13, 왕하 7:13, 대하 24:22).

 

'안식일에 술 틀을 밟고...식물을 팔기로'

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그들은 성벽 재건 직후 언약을 갱신하면서 안식일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로 결단한 바있다.

 

그들은 그때 자신들과 이방인을 분명히 구별케 해주는 안식일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종교적, 문화적 순수성 유지를 도모하려고 했었다(10:31).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과의 빈번한 경제적 접촉의 결과로,

오히려 안식일 개명을 경시하는 두려운 상황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아무튼 이같은 안식일 계명의 경시는, 그 날에 소용되는 양식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

(출16:19-22)는 분명한 약속을 망각하고 또한 믿지 않은 결과였다.

 

느13:1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15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안식일을 범했던 사실에 대해 다룬다.

한편, '두로 사람'은 고대 중근동 뿐만 아니라 지중해 지역 전체에 그 명성을 날렸던

페니키아 상인(본 단락 주제 강해, '페니키아 상인' 참조)들을 가리킨다(겔 27:12-36, 28:16).

 

'예루살렘에 거하며' 이방인들의 이 같은 행위 자체는 결코 불법이 아니었다.

다윗 시대에도 여부스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대상 21:15).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 당시에도 유대인들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많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했었다.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안식일에...팔기로'

'물고기'는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매우 애호되던 식품이었다(레 11:9, 민 11:5, 신 14:9)

'두로 사람'들은 이 '물고기'를 자신들이 살고 있던 지중해 연안에서 잡았거나,

혹은 갈릴리 바다에서 다른 사람들이 잡은 것을 사와서 팔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물고기'는 '어문'을 통해서 예루살렘 안으로 반입됐을 것이다(3:3).

 

느13:17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느헤미야의 귀인들에 대한 이러한 책망은, 귀인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일에

오히려 앞장 섰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들은 기득권을 남용하여

자신들의 식탐(食貪)과 물욕(物慾) 충족을 위하여 안식일을 범하기 일쑤였을 것이다.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는 일은

1) 십계명 중 제4계명을 범하는 것이었다는 점,

2) 그래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다시 초래케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18절, 렘17:27, 겔 20:12,13)에서 분명히 심각한 '악행'이었다.

 

느13:18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

본절의 '이 성읍'은 단수라는 점에서 예루살렘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 문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음로써

그 형벌로 수도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당하는 사태를 맞이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렘 17:27).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건을 가리킴도 물론이다.

 

느13:19 안식일 전에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본절부터 22절까지에서는 안식일을 보다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한 시책이 언급된다.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성문을 닫고'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는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성문에 그림자가 드리워 질 때'의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밤이 되기 얼마 전의 시간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느헤미야가 일몰 시간이면 닫았던 성문을 보다 이른 시간에 닫도록 했었음을 뜻한다.

 

'내 종자...성문마다 세워서'

일상적으로는 예루살렘 주민 중 그날의 당번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성문을 지켰을 것이다(7:3).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이 어떤 대가를 보장받고 장사꾼들을

예루살렘 시내로 들여놓을 가능성을 염려하여 자신의 심복들을 성문마다 배치하였다.

 

느13:20 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장사들...성밖에서 자므로'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상품을 들여와 팔기 위한 장삿속 때문이었다.

장사꾼들이 성밖에서 군거(群居)하며 떠들어대는 소리가 매우 요란했을 것이며,

또 백성들이 성벽 아래의 물건들을 구경하기 위해 성문 혹은 성벽 쪽으로 몰려들어 혼란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느13:21 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 하였으니라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느헤미야는 유다 지역의 합법적 총독이었기 때문에(5:14),

그 지역 내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사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방인들도 유다 땅에서는 유대법, 즉 하나님의 율법의 적용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8절).

비록 유다가 페르시아의 속국이긴 했지만, 유다는 페르시아의 회유 정책에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의 법률로 삼을 수 있는 자치권을 허용받았었다(스 7:14,25,26).

 

느13: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레위 사람들...몸을 정결케 하고'

1) '성문'을 지키는 일은 성전을 지키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이며(대상 9:17-22, 26:12-19),

2) 성문 파수가 안식일 준수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성격이었다는 점 등에서,

레위인들은 정결 의식을 거쳐야 했다.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성문에는 이미 평민들과 느헤미야의 종자(19절)가 성문 파수를 위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시 레위 사람까지 배치한 까닭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보다 잘 아는

그들을 통해 성문 파수가 완전히 이루어질수 있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물론 레위 사람들은 성벽 파수의 직무를 부여받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벽 파수의 감독 직무였을 뿐이다(7:1).

느헤미야는 금번에 그들을 감독의 자격이 아닌 직접적인 성문 파수 담당자로 발령한 것이다.

 

'나의 하나님...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이것은 느헤미야가 비록 자신이 선한 일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에는 지극히 미흡하다고 느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이는 그의 겸손이 잘 드러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 문자적 의미는 '나의 하나님 큰 사랑을 베푸시옵소서'이다.

한편, 여기의 '은혜'(헤세드)는 신적인 언약에 근거한 불변적 사랑을 뜻한다.

 

느13:23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았는데

 

본절과 같은 문제는 에스라의 개혁조치가 있었던 B.C. 458년 이후에는

크게 노출된적이 없었다. 물론 그 같은 풍조가 간간이 있기는 했었지만(6:18, 10:30),

그 풍조가 사회 문제화된 것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녀왔던(6절) 그 이후였다.

 

'그때에' 느헤미야의 귀환 직후이다(15절).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아스돗'은 블레셋의 일파로서 유다 땅 서쪽에 위치했었으며(4:7)

'암몬과 모압'은 모두 유다 땅 동쪽에 위치했었다. 이들 모두 유다 땅과 인근 지역이었던

까닭에 쉽사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혼(通婚)대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느13:24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을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통혼의 심각한 결과가 언급되고 있다. 이스라엘 남성과 결혼한 이방 여인들이 그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모국어를 가르침으로써 야기된 현상이었다.

 

'아스돗 방언...유다 방언은 못하니'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해석이 애매한 부분이다.

이에 대한 논란이 많으나, 통혼한 이들의 자녀들 중 절반 가량은 아스돗 방언이나

기타 이방 언어로는 말할 수 있어도 유다 방언은 제대로 못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언어는 한 민족을 공통적인 유대 관계로 맺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더구나 히브리어가 종교 의식상의 언어였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민족언어의 상실은 곧 하나님 말씀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비운지는 불과 1년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해서 통혼이 진행됐고 또한 태어난 여러 자녀들이 이방 언어에

그토록 깊이 젖어들게 되었느냐는 점이다.

 

바로 이 같은 의문 때문에 혹자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있었던 기간을

1년이 아닌 휠씬 더 오래동안으로 잡는다.

그러나 개혁의 미진함을 절감하며 떠났던 느헤미야가 오랫동안 페르시아에 머물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우리는,

1) 이와 같은 통혼과 그에 따른 이방 언어 사용의 문제가

이방 민족들이 살던 지역과 인접한 변방(邊方)에서 주로 야기되었고,

 

2) 느헤미야는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만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비록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가기 전부터 통혼이 간간이 진행됐지만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로 부터 재귀환한 후에야 변방 지역의 순시를 통하여

백성들의 통혼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느13:25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이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본절에서의 느헤미야의 행동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認識)한 결과에 따른 경고적 성격의 것이었다.

 

'책망하고(리브)' 11, 17절에서도 사용된 단어이다.

 

'저주하며' 이것은 종교적 선포의 성격을 갖는다. 즉, 느헤미야는 통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리라는 사실을 선포하였을 것이다.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느헤미야는 총독의 자격(5:14)으로 중한

체벌(體罰)이나 가산 적몰(스 7:26)의 징계를 통혼자들에게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문의 행동은 체벌이라기 보다는 느헤미야 자신의 극단적 불쾌감과 격노의 표시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 머리털을 뽑는 것은 진노를 나타내거나 모욕이나 경멸을 표현하는 행위이다(삼하 10:4, 사 50:6).

 

느13:26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솔로몬이...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솔로몬이 이방 후궁들의 꾀임에 빠져 이방신들을 섬겼던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왕상 11:4-8).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1) 압살롬과 아도니야 등 이복 형들의 잇단 왕위 승계투쟁이 있었던 사실

2) 솔로몬은 다윗이 부정하게 취한 여인 밧세바의 소생이었다는 사실

등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만하다.

 

'이방 여인' 솔로몬에게는 이방 출신의 후궁이 약 천 명이나 있었다(왕상 11:3).

 

느13:27 너희가 이방 연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통혼자들이 이방 여인들과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내용이다.

 

느13: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쫒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

이것은 '엘리아십의 아들 요야다의 아들 하나'로 번역함이 더 타당하다(12:10).

느헤미야가 산발랏의 사위가 된 '요야다'의 아들을 다만 '하나'라고 하여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축출되어 그의 이름도 명부에서 도말됐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그 같은 이름을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 문맥에

기록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아십'은

1) 느헤미야가 귀환했던 B.C. 444년, 즉 13년 전에 이미 대제사장이었으며(3:1),

2) 그의 손자가 결혼 적령기가 됐다는점 등으로 볼 때 그 당시 꽤 연로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요야다'는 '엘리아십'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에 올랐었을 것이다(12:10).

 

'호론 사람 산발랏' 이같은 표현은, 산발랏의 가문이 결코 이스라엘 백성

특히 대제사장 가문과는 결혼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해준다.

'호론 사람'에 대해서는 2:19주석을 참조하라.

 

'쫓아내어...떠나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요야다'의 아들 부부가 함께 사마리아로 쫓겨났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요야다의 아들이 산발랏의 딸과 이혼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인 듯하다.

 

느13:29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민 중에서 구별되어 선택되었었다(신 7:6).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제사장을 특별히 성별하여 그 직분을 통하여

당신의 거룩을 드러내기 원하셨었다(레 21:4,6).

따라서 그 같은 제사장이 율법이 엄히 금하는 이방 여인과 통혼했다는 사실은

곧 그 거룩한 직분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제사장...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 이것에 대해서는

1) 구약의 율법이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 곧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평민들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공통 인식으로 보는 견해,

2) '제사장'이 이방 여인과 통혼해서는 안된다는 레 21:14의 말씀으로 보는 견해,

3) 레위 지파가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서 범법자들을 처단했던 그 정신

(출 32:26-29, 민 25:10-13)을 계승하여,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거룩성 유지에 힘써야 한다는 언약(말 2:4-8)으로 보는 견해 등으로 그 해석이 나뉜다.

 

그러나 첫째, 본절은 레위 사람의 통혼을 책망하는 문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레위 사람'까지를 거론하고 있으며

둘째, 레 21:14은 오직 제사장의 통혼 금지 규정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느13:30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느헤미야가 제사장들을 권면하여

그들과 함께 살던 이방 여인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한 것을 가리킨다(스 10:18,19).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문자적으로는 다만 '각각 그 일을 맡겼다'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페르시아 여행 기간 동안

일부 와해된 반차 조직을 재정비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느13: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나무'는 상번제 등에 계속적으로 소용됐던 화목(火木)을 가리킨다(10:34).

'처음 익은 것'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생계 유지에 필요했던 여러 헌물 중의 대표적인 것이었다(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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