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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깨어짐과 권위 / 존 비비어

LNCK 2013. 9. 12. 11:49

 

◈깨어짐과 권위                       벧전 2:23,  고전13:4-7                   출처보기

 

존 비비어

 

▲군마는 자기 뜻이 꺾이기 전에는 전쟁터에 나갈 수 없다.

구간에서 가장 세고, 빠르고, 재주가 많더라도.. 일단 깨어지기 전에는 싸울 수 없다.

그 말은 마구간에 남아 있고 재주가 덜한 다른 말들이 전쟁터에 나간다.

 

깨어지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과 상관있는 것이다.

 

말의 주인은 그 말을 타는 사람이다.

제대로 깨지고 훈련된 말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다.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싸움터에서도 그 말은 꽁무니를 빼지 않는다.

적들이 칼과 도끼를 휘둘러도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총을 들고 대포를 쏴도 주인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다.

 

주인이 누구든 한마음으로 복종할 뿐이다.

절대로 자기를 지키거나 몸을 사리려 하지 않는다.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이 깨어짐 Brokenness의 처방은, 하나님의 처방에 따라 사람마다 독특하다.

그 과정을 제대로 수료하면, 그 사람을 통해 하시려는 섬김을 할 준비가 된 셈이다.

그 '때'는 그분만이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운 차원에 올라갈 때마다

다시 그때에 적합한 또 새로운 깨어짐의 과정을 시작하신다.

 

과거에 내가 겪은 과정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다음 차원의 섬김을 할 준비가 되었다고 철석같이 믿은 때가 정말 많았다.

실제로 준비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말이다.

 

나는 자신 있게 외쳤다.

"저는 주님의 권위에 온전히 복종합니다. 주님의 일을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성숙한 신자들은, 내가 깨지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또 다시 내 권리를 찾으려고, 발길질하고 몸부림을 쳤다.

 

▲군마처럼, 우리가 깨어지는 과정은, 권위에 대한 반응과 상관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위해 맞춤식으로 완벽한 과정을 짜시는데,

그 과정에는 늘 일종의 권위가 개입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한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3, 18).

 

이것을 현대식으로 풀어보자. 사환이란 직원, 학생, 교인, 시민일 수 있다.

주인이란 고용주, 교사, 교회나 정부의 지도자일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선하고 관용하는 지도자들을 만났고 그런 이들을 좋아했다.

그런 이들에게 복종하기는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고 관용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들에게도 복종하라고 명하신다.

 

여기서 '까다롭다'는 헬라어로 ‘스콜리오스’인데,

그 의미가 '비뚤어지다, 괴팍하다, 포악하다, 불공평하다'로 풀이된다.

 

사실 베드로의 말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말한다.

"애매히 고난을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벧전 2:19).

 

"너희가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친히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셨다.

총독 빌라도는 의연한 예수님의 행동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 아래, 그리하여 그분의 보호 아래 남기 위해서였다.

 

베드로는 말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하나님)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자기 변호에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의 손 아래 숨게 된다.

그보다 안전한 피난처는 없다.

 

반면 자기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고소하는 사람들과 함께 심판 아래 놓이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누리지 못한다.

 

▲내가 권위에 맞서 자기 변호를 하던 상황이 떠오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중에 내게 짤막한 장면을 보여 주셨다.

뒷짐 지고 내 곁에서 서 계신 주님의 모습이었다.

 

그분은 내게 도움을 베푸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자기 변호를 멈추자 나를 위해 나서서 일하셨다.

 

나는 퍼듀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로크웰 인터내셔널사에 취직하여 다니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고등부 목사로 한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어느 날 그 고등부 부서장의 아들이 울면서 나를 찾아왔다.

 

집안에서 온갖 경건치 못한 행동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애의 아버지가 나를 적대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 네 명이 찾아와, 내가 곧 해임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서운해 했다.

그의 아들에게서 나온 정보였다.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한테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아이 아버지인 부서장을 찾아갔다.

부서장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담임 목사 탓으로 돌렸다.

 

나를 내보내는 것이 담임 목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몇 주가 지났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교회에 남아 있게 될지 떠나게 될지 모르는 상태라서

우리 집에는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우리는 대출받아 집을 산 상태였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돈도 없었고, 갈 데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일자리를 구하려고 이력서를 쓸 마음은 없었다.

 

우리를 그 교회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 믿었기에

아무 대안 없이 잠자코 있었다.

 

담임 목사는 결국 나에 대한 해임 안에 찬성했다.

나하고 개인적으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담임 목사와 그 부서장을 만나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자기 변호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튿날 담임 목사 사무실에 들어가니 담임 목사님 혼자 앉아 계셨다.

 

그는 나를 보더니

"하나님이 이곳에 보내신 비비어 목사님을, 내가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나는 안도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나를 지키셨다.

 

담임 목사는 이어 이렇게 물었다.

"부서장은 왜 목사님을 해임하고 싶어했을까요?"

 

나는 모른다고 했다.

담임 목사는 그 사람과 화해하라고 당부했고, 나는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그 만남 직후, 그 부서장이 내린 결정에 관련된 문서가 내 손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그 사람의 사악한 동기가 드러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담임 목사에게 가지고 가려고 했다.

 

담임 목사 모르게 일어난 일을 알리고 싶었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떨쳐보려 45분 동안이나 방에서 왔다갔다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사람은 부정직했습니다. 그는 이 교회 사역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실상을 담임 목사한테 알려야 합니다! 입증할 자료도 있습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막지 않으면

그 사람의 타락한 행동이 교회 전체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러나 한껏 열을 내던 내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나왔다.

"하나님은 제가 진상을 폭로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에 흘러들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저었다.

 

하나님은 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것을 알았기에 나는 증거물을 폐기해 버렸다.

 

나중에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때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호하고 복수하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이기적인 동기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내 자신을 세뇌했을 뿐이었다.

정보는 정확했지만 동기는 불순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던가,

내가 교회 뜰에서 기도하는데, 그 부서장의 차가 들어왔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가서 겸손한 자세를 보이라고 하셨다.

나는 즉시 반대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20분 후 하나님은 다시 나를 떠미셨다.

즉시 그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았다.

나는 그 사람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그를 보자 내 입에서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지 않았으면

터져 나왔을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날부터 그는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췄다.

 

그로부터 여섯 달 후

그간 그 사람이 했던 모든 잘못이 담임 목사에게 발각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그 사람은 바로 해임되었다.

 

심판은 왔으나, 내 손을 통해 오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내게 하려던 일을 자기가 당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기쁘지 않았다.

그 사람과 가족을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그런 상황에 처해 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그를 놓아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교회에 11년이나 더 있었고, 여러 차례 사역자로 청빙도 받았다.

돌아보면 내가 그 힘겨운 시기에 '자랐음'을 깨닫는다.

 

자기 변호를 기꺼이 포기하고, 순종하신 예수님을 크게 높이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이 보이신 본을 따르는 자녀들을 높이신다.

 

- 존 비비어, <순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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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바란다 - 존 웨슬리         출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즉, 쉽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악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사랑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가 악한 일을 행한 것이 사실입니까?

아마 소문대로 그렇게 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그대로 악하지 않기를 바라는 여지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히 악한 행위를 했습니까?

그러나 사랑은 의도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의도 또한 악한 것이 확실하다구요?

하지만 그것은 가슴 속 뿌리 깊은 본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촉발이나 이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어떤 격렬한 유혹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심지어 그의 모든 행위와 의도와 본성이 모두 다 악하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 아홉의 의인보다

회개한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하시기 때문이지요.

 

 

기도/ 주님 지칠 줄 모르는 부드러운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주님처럼 이웃을 향해 지칠 줄 모르는 부드러운 사랑을 전하게 하옵소서.

이웃의 건강과 안녕, 안락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돕게 하옵소서. 저를 평화와 화해의 길로 이끄사

남을 쉬이 용서할 수 있게 하시고, 악을 선으로 갚으며 기뻐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존 웨슬리의 경건과 기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