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164oJrJYN7s
◈14장, 사역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고후12:1, 사55:10~11
찰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14장 내용을 발췌, 편집했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의 일부로서, 이 문장을 믿고 고백합니다만
실제로 우리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 얼마나 ‘성령을 믿으며’ 살고 있습니까?
정말 사도신경을 신앙 고백할 때, 성령님께,
나의 체험적 신앙고백이 드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일평생 나에게 지혜와 열매와 은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인정하듯이, 성령님의 존재도 우리가,
내 삶속에서 순간순간 인정해 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무 의미 없이 신앙고백만 되뇌이지 말고요.
예를 들면, 형제 A는, B와 교제하는 중에,
B의 친구인 C에 관해서 늘 좋은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C와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냥 귀로써 말로 들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A는, 드디어 C를 만나게 되었고, 이제는 눈으로 대면했고,
서로 친교의 시간을 가지면서, C와 복된 교제의 영향력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친구 C의 존재를, 귀로 들어서만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동행하시는 친구되신 성령님을, 귀로써 들어서만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제 삶에서 체험하며, 그분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게 되면,
한 가지 나타나는 특징은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귀로써 들어서만 알고 지낼 때는.. 성령님께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동행하며 교제한 이후로는.. 성령님께 민감하게 됩니다.
바로 내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님과 교제하지 않는다면, 사역자로서 아주 부적격합니다.
아니 어쩌면 교회의 회원으로 남아 있을 자격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진짜 새 피조물이 된 사람은,
반드시 성령님과 교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 각자를, 거룩한(구별된) 삶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번 장Chapter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목회 사역에는 성령의 사역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입니다.
만약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없다면, 목회자의 직분은, 그저 이름뿐인 것이 되고 맙니다.
구약의 제도권적 제사장처럼, 그저 주기적으로 형식적인 제사나 집례하는,
그런 역할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영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종으로서,
길을 못 찾아 헤매는 ‘맹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여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백성의 죄를 책망하여, 회개하며 죄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자로서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증언에는 언제나 성령님이 임재 해 계셨습니다.
만약 우리 위에, 성령님이 (계속, 오래도록) 임재 해 계시지 않으신다면,
‘나는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 어쩌면 정확할 것입니다.
행2장의 오순절의 역사를 통해,성령님은 이제 우리 사람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는 뜻입니다.나는, 그 성령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 맞습니까?
◑내가 성령과 동행, 교제한다는 실제적 증거 8가지
▲1. 성령님은 진리의 영 (말씀의 영)이십니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요16:13
신약성경에 종종 ‘비밀’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말씀을, 그저 세상 학문 공부하듯이 공부해서는,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비밀’이라서, 성령의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말씀을 잘 깨닫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씀을 잘 깨닫고 가르치려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며,
이것은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서재에서 연구하는 시간에서부터 ‘성령의 역사’가 당연히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서재에서 준비한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될 때,
회중들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서재에서.. 성령의 교제, 인도를 받지 못했는데,
강단에서.. 성령의 교제, 인도를 받을 수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서재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을 때는
서재에서 즉시 기도하면서,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셔서, 제 눈을 열어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라고요.
성경을 원어로 공부하고, 주석서를 방대하게 참고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은 더욱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없다면, 책상에서의 연구는, 그야말로 탁상공론이 되고 맙니다.
둘 다 필요하지만, 만약 딱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성령의 도우심’이, 차라리 ‘학문적 연구’보다는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만약 없다면.. 남의 소중한 (설교 듣는)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은 수 백 번 들어서 다 알고, 그래서 지루하니까’
설교에, 귀에 솔깃한 다른 주제를 말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그의 사역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할 때.. 그 복음은 수 천 번을 들어도.. 늘 새롭습니다. 지루할 수 없습니다.
▲2.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것과 함께,그 깨달은 말씀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도.. 역시 중요합니다.
일례로, 복음의 일부분을 분명히 이해한 사람이, 그 일부분을 지나치게 부각시켜서,
그 부분만 집중/ 강조해서 가르친다면..그것은 결국 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의 코가, 얼굴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이지만,
코를 너무 크게 그려서, 눈과 입과 그밖의 것들이 거의 드러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초상화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전하는 ‘복음’이, 얼굴이 일그러진 풍자만화처럼 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복음의 특정한 일부 교리들을 과도하게 선포하면서
나머지 진리들은 그 그늘 속에 가려진다면,
그것은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복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다.
이런 ‘지혜’도, 성령님이 허락해 주십니다.
진리의 복음의 말씀을, 잘 사용하고, 잘 다룰 수 있는 균형잡힌 감각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쳐야지,성도들이 좋아하는 ‘향신료’만 골라서 넣는다면,
결국 그 요리는 망쳐버리고 맙니다.
좋아하는 ‘향신료’란.. 위로, 사랑, 은혜.. 이런 것들이지요.
싫어하는 ‘향신료’는.. 거룩, 순종, 심판.. 이런 것들이고요.
이렇게 성경을 골고루, 하나님의 복음과 경륜 전체를 균형있게 가르치려면,
‘성령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편파적인 사고와 균형을 잃어버린 치우침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설교본문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편파적으로 치우쳐서, 본문을 선택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성령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는 목회자는.. 그것을 피하고, ‘균형’을 추구합니다.
▲3. 입술에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사6:7
제단에서 취한 핀 숯이 내 입술에 대어져서, 입술이 잘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내 입술이, 성령의 숯불로 지져진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럽게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성령의 불타오르는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종종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자가, 설교를 망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쓸데없는 말을 발설하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그 말만 하지 않았으면, 다 좋았을 것을..’ 하는 말, 말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합니다.
유머의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 유머조차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면
오히려 설교를 망치는 ‘쓸데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또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상스러운 말, 말실수.. 이런 것을 범하기 쉽습니다.
성령에 의해, 내 입술이 사로잡혀 있어야, 그런 말실수를 안 하게 됩니다.
나아가, 설교를 너무 단조롭고 평범한 어조로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흥분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흥분으로.. 어조와 어감이 흥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냥 평상시 대화하는 것처럼 평범하게만 말하면, 좋은 설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고함을 지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목소리를 발성하는 것입니다.
제 스펄전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함을 강하게 받지 못할 때는
목소리도 원활하게 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날은, 마치 바퀴 빠진 병거처럼, 말이 무겁기가 한이 없고,
반대로 어떤 날은, 마치 암사슴이 초원을 달리듯이, 말이 시원하게 나올 때가 있습니다.
내 입술에, ‘성령의 역사’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 회중들이 속으로 ‘아, 저건 성령의 역사로 하는 말(설교)이야!’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4. 성령은 또한 ‘기름부으시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저 스펄전도 그런 때가 있는데, 그 때는 정말 설교 시작부터 끝까지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12:1
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늘 그렇지는 못 하더라도, 가끔은 그런 상태로 인도함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그 설교(예배) 현장에 임재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높이며
회중의 모든 생각이, 오직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데 집중되어 있고,
그때는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간절히 토로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허공을 치며 설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경험한 신자들은, 반드시 삶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예배와 설교를, 자기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의심 많고, 조롱하던 불신자가 참석했다 하더라도,그도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비판하는 자, 조롱하는 자가 많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예배를, 그가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도 됩니다.)
이때는, 설교를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똑같이 어떤 전율함을 느낍니다.
혹은 독수리가 공중으로 날듯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촉촉이 이슬같이 성령이 내리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메마른 심령, 갈한 심령들이.. 다 은혜롭고 부드러운 밭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이슬, 성령의 단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머리 깎인 삼손이 비참한 신세가 되었듯이, 성령이 떠난 목회자도,
그렇게 비참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강단이 되려면,처음부터 끝까지,
간절한 심령으로 내가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을 깜빡 깜빡 잊기 쉽습니다만,
성령님이 종종 역사하시는 사역자의 비결은, 그가 늘 성령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깜빡 깜빡 잊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내가 설교를 열심히 준비해서 선포해도,
성도들이 곧 다 듣고 잊어버릴 터이니,
뭐 그렇게 힘들게 설교할 필요 없다’면서, 아예 기대감조차 전혀 없습니다.
설교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지는 시간이며,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 설교시간이 얼마나 복된 시간인지.. 전혀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55:10~11
위 말씀을 보십시오. 목회자들은 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사람들이 까먹지 않습니다.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언제 그 말씀이 잊어버려집니까?
그 말씀이 열매를 풍성히 맺고, 그 정한 목적을 다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하늘에서 내린 비가, 다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증발하듯이,
하늘에서 떨어진 말씀이,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전파한 설교말씀을, 성도들이 다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내 입에서 나온 내 말이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 말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하늘에서 떨어진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설교해도 다 잊어버리니,
소용없다’는 생각은 이제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즉 ‘대언자의 대언의 음성’은,
결코 헛되게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5. 복음전파의 실제적 효과를 내려면..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데.. 실질적인 열매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지만.. 실제적으로 열매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강단에 올라가서 보여주는 것은, 화려하고 현란한 ‘칼 쑈’가 아닙니다.
무슨 서커스 단원처럼, 칼로 화려한 묘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실제로 ‘말씀의 검’을 휘두르는, 실질적인 영적 전투입니다.
강단이 실제적인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 장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전투하는 전장’에 들어갔으니까요!
(오페라 가수는, 흰손수건을 들고 노래를 부를 때가 간혹 있지만)
강단에서 목회자는, 흰손수건을 들고서, 어떤 쑈를 연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면 자기의 어투를, 마치 연기자의 대사처럼, 연기하듯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 사역도, 얼마든지 겉포장을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습니다.
그 속 본질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 결과,
화려하기는 한데.. 또 매우 세련되고 나이스하기도 한데.. 회중들은 아무 은혜도 못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거의 소멸된 것이지요.
그것은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교회의 외모가 어떻든지 간에,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검’에 찔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고..
또는 영혼에 감동을 받고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주님과 멀어진 영혼이, 주님께로 돌이키게 되는.. 그런 실제적 역사가 나타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화려한 공연에 불과하고,
아무런 실제적 열매가 없다면,
그건 우리가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물론 평소에, 생활에서부터,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제멋대로 살다가, 예배시간에만 의지한다고 해서.. 그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성령의 인(도장)’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런 의미도 될 수 있습니다.
사역이나 예배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흐르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역이나 예배를.. 성령의 인을 쳐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사역, 그 예배, 그 사역자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또는 그 사역과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좀 끔찍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을, 우리 예배를, 우리 자신을.. 받아주고 계십니까?
‘성령의 인’을 쳐 주십니까? 즉, 성령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흐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바짝 메말라 있습니까? 장기간 계속되는 가뭄은 아닙니까?
그냥 감정적인 은혜.. 그런 것 말고요,
‘내가 새 사람으로 살겠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
하는 그런 결단과, 회개와, 회심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척.. 연기만 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그런 역사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을, 늘 간절히 의지하고, 동행해야 합니다.
평소에, 성령님과 동떨어진 삶을 늘 사는 사람에게서
그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주 무리수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서,
목회자나 지도자가, 자기 자신의 능력과 힘을 써서,
어떤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다가 실패를 맛본 사람들은,
강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날마다 성령님을 간절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성령님이 소멸되었는지를 파악해서, 진실로 회개하고,
나로부터 멀찍이 떠나신 성령님을, 내 가까이로 친밀하게 다시 모셔 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론’에 관해서, 논쟁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봅시다.
내 사역에, 성령의 은혜, 성령의 감동, 성령의 임재 Presence, 성령의 회심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저 내가 하는 모든 수고는.. 무용지물인 셈입니다.
‘성령론’을 따지면서.. 무용지물인 사역을 해 서는 안 됩니다.
성령론을 좀 몰라도.. 자기에게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나타나는 사람이.. 참 사역자입니다.
▲6.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성도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성령님’을
우리는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있을 수는 없습니다만,
내 영혼은 절대로 경배의 자세를 떠나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습관’은 좋습니다. (아마 개인기도를 뜻하는 듯)
그러나 ‘기도의 영’은, 그보다 더 좋습니다. (아마 일상에서 마음의 기도를 뜻하는 듯.
비록 눈을 감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기도를 계속 하는 것을 뜻하는 듯)
정기적으로 기도하며 홀로 있는 것은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개인기도)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기도의 영)
※바울은 ‘무시로 always 기도한다’고 말씀했는데,
아마 이 마음의 기도, ‘영의 기도’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풍성한 기도가, 신실한 설교와 함께 가는 법입니다.
늘 무시로 기도하는 사람만, 신실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7. 성령님은 ‘성결의 영, 거룩하게 하는 영’이 되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님의 책망, 근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곧바로 회개하므로, 성령의 소멸까지는 좀처럼 가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와 아울러, 그의 삶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정에서 모범적인 가장인지,
대인관계에서 정직하고 겸손한지, 늘 예의주시합니다.
율법적으로, 또는 외식적으로 자신이 성결하게 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녕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그를 늘 책망하시고, 교정하셔서.. 그는 점점 성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벽주의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년보다, 또는 3년 전보다는.. 성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무시하고 사는 신자, 지도자는,
어쩌면 3년, 5년이 지나면, 상태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의 책망, 교정을 듣지 못하여, 평소에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에게 어울리도록
모든 거룩함과 성결함으로 행하고자 한다면,
날마다 하나님의 영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8. 성령님은 ‘분별의 영’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분별케 하십니다.
(후략)
'분류 없음 >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장, 옥외 노천 설교의 역사 / Spurgeon (0) | 2013.10.01 |
---|---|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 영향받으실 수 있다 / 케네스 해긴 (0) | 2013.09.17 |
깨어짐과 권위 / 존 비비어 (0) | 2013.09.12 |
겸손의 기초 (0) | 2013.09.10 |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축복 / Wilkerson (0) | 2013.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