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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축복 / Wilkerson

LNCK 2013. 9. 6. 12:11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축복              엡1:3~7        출처보기

 

The Blessings of Being in Christ   By David Wilkerson August 23, 2004

 




◑서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1:3

 

바울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계신 하늘의 처소의 영적 축복으로 복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놀라운 약속입니까.

 

그러나 이 약속은 우리가 이 영적 축복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단순한 말에 불과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서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1:1) 썼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구원을 확신한 신자들이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영생의 소망으로 잘 훈련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를 알았고,

그 안에 하늘의 지위를 확신하였습니다.

 

실로,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의 처소들에 앉히시기 위해”(2:6)

만들어졌다는 진리에 잘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시고

하늘의 처소들에서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1:20)를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창세 전에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하나님께 선택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1:5) 입양된 것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리의 말씀을 들었을 때, 믿고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베소 (를 포함한 모든) 신자들은 진실로 축복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 안에서 즐거워했으며,

그들의 죄에서 용서 받은 큰 영적 축복을 알았습니다.

 

정말, 그들은 하나님은혜의 풍성함에 대해 잘 알았고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에 대해 갈급한 사람들을 만났다면,

그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영광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그분의 거룩하심,

그 분 앞에 흠 없이 걷는 것에 대해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 하나님의 선하심, 천국과 지옥에 대해,

죄 된 삶의 귀결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현대인들)도

에베소 교인들과 같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실하며, 잘 교육받은 신자들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구속의 능력을 압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탄생의 교리를 압니다. 여러분은 은혜의 지식,

즉,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해 오는 승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잘 배웠습니다.

 

(문제 제기, 그러나) 이들이 당신을 나타낸다면, 저는 좀 더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기쁨에 들어가 본 적이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저는 사역자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용서와 장래 천국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넘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용서 받고, 깨끗하게 되고, 구속된 사람들이 비참하게 삽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계속해서 꼭대기에서 골짜기로,

영적으로 높은 곳에서 침체되는 낮은 곳으로 다닙니다.

그들은 항상 이런 느낌에 괴로워합니다. ‘뭔가 빠졌어. 단지 나는 그걸 알 수 없어!’

 

저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저는 그들의 구원에 관해 절대 확신하지 못했던

제가 알아왔던 많은 헌신된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놀랍니다.

 

이는 많은 오순절 교인들에게 특별히 그렇습니다.

50년까지 주님을 섬겨온 경건한 남녀들에게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교리와 진리, 그리고 신앙의 가르침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초자연적 즐거움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모든 것에 관해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 그의 피의 깨끗하게 하는 능력, 믿음으로 의롭게 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충만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묻습니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된 구원자를 지나

영광 안에 살아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분 안에서의 하늘의 위치에 대해

알아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 임이라.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9-20)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에 살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위치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에 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늘의 처소에 앉혀졌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단지 신학적 사실로써만 알고 있을 뿐 그것을 경험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우리의 위치’ 라는 표현은 무슨 뜻입니까? “

 

매우 간단하게, 위치란 “어떤 사람이 자리한, 어떤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가 있는 곳, 곧 그리스도 안에 두셨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그분의 오른 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실은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그분께서 계신 보좌에 앉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전능하신 분의 임재 안에 앉아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의 처소에 앉히기 위해 (엡2:6)

만들어졌다고 말할 때에 나타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하늘의 처소에 있다고는 절대 느껴지지 않아요.

저는 항상 광야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괴로움과 고민을 겪고 있는걸요.

만일 그게 그리스도 안에 하늘의 처소에 있는 거라면, 그냥 얻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신앙적 노력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

 

틀림없이 말씀 드리겠는데, 여러분의 시험의 때는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하늘의 처소’라는 구절은

여러분이 성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아버지의 눈에 여러분은 그분 가까이,

그분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의 신뢰를 그리스도 안에 두는 순간,

여러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그분과 함께 여러분을 앉히고

그분의 아들 안에서 여러분을 인식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어떤 신학적 요점이 아니라 진리이며 실제적 위치입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이 주님의 의지에 여러분의 의지를 복종시킨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위치와 함께 따라오는, 모든 영적 축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극단적 회심 radical conversion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은,

이 혜택이 잘 믿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 땅을 떠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문자 그대로의 천국으로 올라가는 감정이나 느낌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니요, 천국이 여러분에게 내려온 것입니다.

아들 되신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오셔서,

그들의 처소로 삼으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14:23)

 

네, 예수님께서는 낙원에 계시며 영광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또 네, 그분의 영은 온 지구에 운행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특별히 여러분과 저의 안에도 거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 땅 위에 그분께서 거하시는 그분의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에 관한 예수님의 강력한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 안에서 완전함을 이루게 하려 함이며”(요17:21-23)

 

이탤릭체를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이 저에게 주신 그 영광을, 제가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주셨던 그 동일한 영광을

우리가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그리스도께 주어진 이 영광, 또 그분께서 우리에게 준 이 영광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삶이 그 영광을 드러낼까요?

 

 

◑2. 우리가 받은 그 영광은, ‘아버지께로의 열린 접근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은, 어떠한 기운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매우 간단히 말해,

우리가 받은 영광은 <하늘의 아버지께로의 제한되지 않는 접근(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께 접근하는 것을 쉽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문을 여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을 통하여 우리 둘이 한 성령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게 되었음이라”(엡2:18)

‘나아감’ 이라는 말은 들어갈 권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통행, 뿐만 아니라, 쉬운 접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확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로의 제한 받지 않는 접근의 장소에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에스더와 같지 않습니다.

그녀는 왕좌에 나가기 전에, 초조하게 왕의 싸인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오직 왕이 그의 홀을 든 이후에야, 에스더는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여러분과 저는 이미 보좌의 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때라도 왕께 말할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께 어떠한 요청이라도 하기 위해 초청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그분께서는 아버지께로의 완전한 접근권을

누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오직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보이시는 일만을 할 뿐이다.”(요5:19, 8:28)

 

더욱이,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도하러 슬쩍 빠져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자주, 강렬하게 기도하셨지만,

그것은 아버지와의 교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무엇을 할지 알기 위해

아버지께로 올라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그 분 안에 머무셨으며, 그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 뒤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것과도 같은 정도의

<아버지께로의 접근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만요, 그것참 믿기 어려울 만큼 놀랍군요.

제가 우주의 창조자이시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과 동일한

아버지께로의 접근권을 가지고 있다구요?”

 

오해하진 마십시오.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자주,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의 발걸음에서는

– 우리의 들어감과, 나감, 우리의 관계, 우리의 가족생활, 우리의 사역에서는-

우리는 하나님께 힘이나 방향의 말씀을 구하기 위해, 슬쩍 빠져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사시는 바로 그분 자신의 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마음과 의지를 보이십니다.

그분의 음성은 항상 우리 뒤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 길이다, 이 길로 걸어라.”

 

 

◑3. 바울이 나타나기까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교회에 숨겨진 미스터리였습니다.

 

▲성령님은 바울로 하여금 이 ‘네 안의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이라는

미스터리를 공개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서신서들을 통해서요.

 

물론, 교회는 구원의 은혜에 관하여 배웠습니다.

그들은 구원이 믿음에 의한 것이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바울이 나타나기 전까지 예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개에 관하여 알았고, 아버지의 긍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바울이 이렇게 선언하며 나타났습니다.

“회개와 선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와서 믿는 것

또는 여러분이 지금 대단한 영적 지식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분 안의 축복과 충만한 가운데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걷되”(골2:6)

 

바울은 무엇에 관하여 말한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자들은 몇 년 간, 이를 행해오지 않았습니까?

간단히 말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축복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축복에 대하여 완전한 계시로써 알지 못했던 것을

확실한 말로써 교회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다른 다음과 같이 다른 사고방식을 설명했습니다.

 

“나는 내 구원에 관하여 단지 머리로의 지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충만함 가운데서 걷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나는 단지 천국에 관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가능하게 하신 모든 하늘의 축복을 원합니다.

 

그분께서 모든 영적 축복을 약속하셨으며,

나를 그분 가까이에 데려가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내가 그 축복들을 누릴 수 있는 곳 말입니다.

나는 내 삶이, 그 사실을 비추기 원합니다.

 

나는 하늘에 관한 모든 영적 진리가

지금 나의 매일의 발걸음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축복들은 더 이상 신학적 개념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을 단지 여러분의 구원자뿐만 아니라,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으로서도 받아들이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

살아계신 다는 것을 받아 들이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 삶에 어떤 결과를 보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단지 여러분을 죄에서 구하셨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 사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매일 아침을 걷는 것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분께서 여러분과 가까이 하시기 위해,

여러분과 사귀고 사랑할 수 있도록 벽을 부수기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신 것의 영향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 우리 영혼 안에 천국을 받았습니다.

네, 그 천국의 맛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맛보기 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지금 당장 사용할 우리의 유산의 몫으로써 주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 이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매일 생명의 충만을 가질 수 있도록 오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고통이나 슬픔을 겪지 않는 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유혹과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험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넘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영원한 친절 때문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앉도록 하신 이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사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주려 하심이라”(엡2:7)

 

여기에 우리가 우리 일상에서 보아야 할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온정의 친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외치며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께서 나를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네.”

 

 

◑4. 또 다른 축복은, 우리가 하늘의 처소에 ‘앉혀지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받아들여지는 특권입니다.

곧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친히 우리를 받아 주시는 은혜”입니다. (엡1:6)

 

여기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의 희랍적 의미는, 고도로 호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격이 있어서 받아들인다고 해석될 수 있는 영어의 표현과 다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인내해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라는 자세를 암시합니다.

그가 쓴 받아들여졌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높은 호감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매우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처소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이제 오직 하나의 통합된 사람, 즉 그리스도,

그리고 그에게 믿음으로 묶인 자들로서 보십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눈에는 죽은 것입니다. 어떻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본성을 없애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그분께서는 오직 그리스도만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얻은 승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위치를 받았을 때에 오는

용납의 좋은 예를 제공해 줍니다. 여러분 그 이야기를 아시죠.

 

한 젊은이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그의 상속을 받아서 죄악의 삶에 탕진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완전히 파산한 후- 도덕적, 감정적, 육체적으로- 그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모든 호의를 잃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가 분노와 그를 향한 미움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한 때, 이 젊은이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가족의 명예로운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축복, 질서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집에 있다는 것의 호의를 맛보았습니다.

과연, 이 탕자는 하나님을 비참하게 져버린 신앙을 버린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 탕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 전에 거의 굶어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그의 죄스런 삶에 지쳤을 때,

그의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은 회개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처음에 그가 집을 떠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마도 다시 돌아와도 좋다고 안심시켰을 것입니다.

 

어떤 사랑하는 부모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대문은 항상 너에게 열려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지금 떠나면서 그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내 마음이 너와 함께 가는 걸 알아라.

네가 한계에 다다르면 부디 되돌아 오거라. 언제라도 너는 환영 받을 것이다.”

 

여기에 제한되지 않는 접근권,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탕자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로 가서”(눅15:18)

그는 그가 받은 접근의 은총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때 이 파탄 난 젊은이는 그의 죄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무가치 합니다. 나는 하늘을 대적해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경건한 슬픔을 통해 회개하러 나오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이 탕자는 그의 죄로부터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뒤로 남겨두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약속한 열린 문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는 회개 속에 걸었으며 접근권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용납 안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가련한 처지입니까.

여기에 그의 과거의 죄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며 바로 걸어오는 신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모든 죄, 수치, 그리고 비난을 지는 데에 지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 진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아버지는 화가 나셨을 거야.

그분께서는 아마 내게 준 모든 것을 탕진한 것 때문에 나를 싫어하실 거야.

그와 마주쳤을 때, 그는 분노와 심판으로 가득하겠지.”

 

그 탕자는 분명 그 혼자서 바꿔보려고 힘썼던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지쳐버렸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나아질까, 어떻게 추락하는 것을 막아볼까에 대해 생각하는 데

매우 지쳤습니다.

 

그는 이미 단지 실패하고 또 실패할 뿐인 스스로를 향한

공허한 긴 약속의 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슬프게도, 저는 이것이 오늘날 대다수의 신자들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 이 비유를

그분 안에서의 우리의 지위에 대해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만일 네가 아버지를 봤다면, 너는 나를 본 것이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탕자가 집에 가까이 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는 메신저를 만났을 것입니다.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 대해 슬퍼하신다. 그는 너를 잃어버린 양이라 부르시지.

몇 번이고 너를 찾으러 나가곤 하셨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사랑이 많은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너무 무서운 죄를 지었어. 당신이 내가 저지른 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에게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지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여 졌는지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천국의 기쁨,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평안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탕자와 같이 실패한 다수의 신자들은 이렇게 확신합니다.

“나는 무가치해, 하나님께서는 나를 받아들이실 수 없어.”

 

▲그렇다면, 그 탕자에게 무엇이 일어났습니까?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 죄스런 아들은 용서 받아, 그 아버지의 품에 안겨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무런 분노나 어떠한 책망도 없이 말입니다. 그가 그의 아버지의 입맞춤을 받았을 때,

그는 그가 받아들여 진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이야기가 끝나는 곳으로 아는 지점입니다.

“그 탕자는 다시 한번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어?

우리도 아버지와의 우리 자신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그리지.

우리는 그의 사랑의 입맞춤, 그의 긍휼과 용서를 알아왔어,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 관계를 유지할 때뿐이야.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에 멈추었어.”

 

그 사실은 여전히 우리가 아직도

아버지의 집 안에 돌아오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연회에서 우리의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거기에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에 의해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데서 오는

모든 축복을 즐기기 전에는 절대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항상 그분의 가까이에서, 잔치와 그 가족의 즐거움을 누리며

그의 집 안에 앉기를 원하십니다.

 

▲과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15:23)

 

여기서 즐기자는 말의 희랍적 의미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즐거운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꺼내어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

사람들이 즐거워하더라 … 음악과 춤추는 소리” (눅15:22-25)

 

이 장면에서 일어난 일을 보십시오.

이 탕자는 연회로 오기 전에 스스로 먼지를 떨어내고 깨끗하게 하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의 아버지는 그가 들어오도록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지 옛날 옷을 깨끗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그에게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완전히 새로운 옷의 세트를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아마 반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저는 무가치해요.”

그러나 그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네 과거를 보지 않는다. 나는 네가 내 사랑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뻐한다.

우리는 화해했고 이제 하나다. 그것이 나의 기쁨이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합니까?

아마 여러분은 탕자가 그랬던 것을 겪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입맞춤을 받고, 그의 사랑의 품에 안겨 그의 집에 받아들여진 것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믿겠죠.

“나는 하늘의 처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어.”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어느 곳에서 아버지의 연회를 봅니까?

노래하고, 춤추는, 마음의 흥겨움 말입니다.

 

▲아마 이 비유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장면은 마지막 장면일 것입니다.

형이 일하고 집으로 왔을 때 말입니다. 집 안에서 연회가 벌어지는데,

그는 창문으로만 바라보며 밖에 서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아버지가 탕자를 기뻐하며 춤추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형 또한 용납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의 슬픔과 비극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아버지와 함께한 모든 세월 속에서,

그는 아버지 집의 즐거움으로 들어가 본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가능하게 하신 축복을 절대 즐기지 않습니다.

사실 마지막에 그의 아버지는 항상 그의 것이었던 축복을 그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네 것이로되”(눅15:31)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받아들여짐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여러분께 강권합니다. 여러분의 죄들과 세상적 추구를 뒤에 남겨놓으십시오.

여러분을 쉽게 괴롭히는 모든 육신적 부담을 옆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 안의 여러분의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여러분의 받아들여짐의 기쁨으로 들어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내일 여러분이 일어났을 때, 이렇게 외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네, 나의 마음은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