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비가 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를 위해 걱정하니라 삼상10:1~2
07.11.11.설교스크랩, 출처
◑서론/ 아버지도 자녀를 사랑합니다.
옛날에는 ‘어머니날’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도 있는데
왜 어머니만 위한 날만 만드느냐 해서 그것이 ‘어버이날’이 되었지요.
그러나 여전히 교회 안에서 어머니들은 있는데 아버지들은 실종되었습니다.
이것을 무엇보다도 찬송가 가사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어머님의 귀한 사랑 ~ ’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는 찬송하는데, 찬송가를 아무리 뒤져봐도 ‘아버지의 넓은 사랑~’에 대한 구절은 없습니다.
또 ‘나 집에 돌아갑니다. 어머님 기도 못 잊어~’,
‘아침저녁 읽으시던 어머님의 성경책~’
기도하는 분도 어머니고, 성경을 읽는 분도 어머니고..
아버지는 성경책이 없었는지.. 왜 이처럼 아버지의 역할을 소홀히 여깁니까?
아버지의 역할이 소홀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어머니가 부각되고, 어머니의 기도와 믿음이 중요한 것처럼 부각되었을 뿐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맞아 주는 사람도 아버지요, 입 맞추고 부둥켜 안아주는 사람도 아버지요,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여 주는 사람도 아버지에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사라와 리브가와 라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아버지 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회가 있지만
아버지 학교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성경책 곳곳에 ‘아버지 학교’가 나와요.
이 성경 말씀이 아버지의 역할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어머니를 통해서 계승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통해서 계승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믿음을, 아버지가 가르치고 자식을 아버지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사건입니다.
원래 그 집은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에서와 둘째 아들 야곱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을 더 선호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선호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복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에게는 아들을 축복할 수 있는 권세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편을 속여 가면서까지, 남편 이삭으로 하여금
야곱이 에서인줄 알고 축복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야곱이 장자권을 얻고 축복을 얻게 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 이삭이 야곱이 에서인줄 알고
속아서 축복을 했는데도, 그 축복이 유효하더라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만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아버지만이 축복할 수 있었고, 그 축복에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가부장주의, 남성위주’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유대 기독교 전통은 이슬람처럼, 반여성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이슬람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주주의가 발달했고, 문화의 수준이 높고 경제가 발전했고
서구적인 국가입니다. 거기에 이슬람 국가를 비교해 보세요.
얼마나 생각이나 사고가 뒤쳐지고 남자 위주이고, 여자를 천대하고 무시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 전통은, 결코 여자를 무시하거나,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그런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든 여성의 인권이 가장 발달한 국가일수록,
기독교 문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도 질서를 세우시고
가정 안에도 질서를 세우시고, 이 질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고, 섬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식 사랑에 있어서 결코 아버지가 어머니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자식을 위하는 데 있어서
결코 아버지가 어머니에 뒤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본론
그런데 아버지나 어머니나
정말로 자식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설교의 주제.
▲본문 말씀을 보면,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암나귀를 찾으라고 아들 사울을 보냅니다.
아들 사울 은 효자에요.
아버지 말씀을 순종해서 암나귀를 찾으러 나갔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었어요.
이제는 그 아버지가 나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고,
아들에 대해서 염려하기 시작합니다.
‘네 아비가 암나귀의 염려는 놓았으나 이제 너희에 대하여 염려하느니라’ 삼상10:2
처음에는 암나귀가 귀중해 보여서 아들을 보냈는데
아들이 소식이 없으니까, 암나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제야 아들에 대해서 염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암나귀는 잃어버리면 다시 사면됩니다. 아니면 다시 나귀 새끼를 낳으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무엇이 중요한지를.. 그 아버지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영어에는 풍자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나귀란 서구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ass’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나귀란 뜻만 있는 게 아니라
멍청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사울의 아버지가 나귀를 찾기 위해서 아들을 내보낸 것에서
뭔가 그 아버지가 멍청한 판단을 내렸다는 풍자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해봐야, 정말로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도 나귀를 찾기 위해서, 우리의 자식을 내보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나귀, 이것은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나귀는 부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암나귀는 새끼를 낳기 때문에, 부를 증식시킬 수 있는 수단이에요.
그 당시에는 주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금융자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재산은 나귀가 몇 마리고, 양이 몇 마리이고.. 이런 식으로 그들의 부를 측정했습니다.
때문에 암나귀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식보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가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식을 내보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요즘엔 나귀를 얻으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부모에게 귀중한 것, 부모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부모의 체면을 살려줄 만한 것, 부모에게 마음에 흡족한 것을 얻기 위하여
자식을 내보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을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식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내가 생각하는 내 체면으로서의 자식을 생각하는 것인지
우리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희미해져 버립니다. 이것이 내 생각인지,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아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현실 속에 파묻혀 살 때, 나를 위한 것인지, 자식을 위한 것인지
국가를 위한 것인지, 직장을 위한 것인지, 의로운 것인지..
이것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굉장히 틀린, 즉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의 매일 매일의 현실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분별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것을 우리가 느끼지 않습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여기까지는 내 일이고
여기서부터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섣불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밀어붙이는 경우를, 주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힘을 빼야 합니다.
▲목회자도 그래요. 목회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인지가.. 불분명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제 자신이 염려하고 또 신경 쓰는 많은 것들이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것인데
그럼에도 염려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저의 자존심이든/ 정체성이든/ 저의 존재 가치든/ 명예든/
이런 것이 걸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인들을 독려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염려, 안달하는 것처럼, 염려, 안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할렐루야!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염려하면 됩니다. 자기 자신만 잘하면 됩니다.
사실 그것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뜻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다스리고 절제하고
우리 자신을 극복하고 욕심을 극복하고 미움을 극복하고
겸손하고, 인내하고, 또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우리가 그 일에 일부분이 되기를 겸손히 바라는 것이지요.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불러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나도 거기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실 때에, 나도 거기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외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바깥 어두운 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바깥 어두운 데가 있다고 했어요.
‘이를 간다’는 말은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고, 자기밖에는 탓할 대상이 없을 때 이를 갊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지요.
하나님이 귀중한 일을 하실 때에 거기에서 내가 제외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것처럼 크게 따돌림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동네 친구들과 놀 때
동네 친구들이 운동을 하든 뭔가를 할 때 팀원을 뽑지 않습니까.
제가 기억하는 것은 두 명의 캡틴이 있어서 각자 자기가 원하는 선수부터 뽑습니다.
‘나는 얘!’ 그럼 저쪽에서 ‘얘!’ .. 그런데 저는 항상 꼴등으로 뽑혔어요.
처음에는 안 뽑고 남으니까 ‘얘는 너 가져’ 이런 식으로.
그래도 자기가 팀에 소속되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이 땅에 하고자 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꾼을 뽑으시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갈릴리의 어부들을 부르신 것처럼.
예수님이 무엇을 기준으로 그들을 뽑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갖고 계시는 기준입니다. (그것을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예수님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어부들, 때로는 세리,
이런 사람들을 뽑으셨는데 그것도 그 중에 한 사람은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그러니까 참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도 구인난(求人難)입니다.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부모의 계획보다 큽니다.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을 때
그 아들 사울은 사무엘이라는 선지자를 만나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약속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삼상10:1
사울에게는, 그 아버지도 알 수 없는 놀라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울을 나귀를 찾으러 보냈습니다.
나귀를 찾으러 나갔는데, 여기에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에게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는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위해도
하나님의 지혜가 없이는, 자기 자식에 대해서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저는 참 좋은 부모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없었을지라도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저의 아버님을 통해서 귀중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목회를 하러 오게 된 것도 아버님의 역할이 컸고
또 미국에 유학을 하게 된 것도 아버님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부모님이 아무를 저를 위해도
하나님 이외에는 보여 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것들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 믿고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둘째는 목사로 부름 받은 것이고,
셋째는 기쁜소식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님도 도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위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의 사명이 있는 아들을 암나귀나 찾으라고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고 아버지의 간섭을 피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버지에게는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어요.
암나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울을 자기의 품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사울이 자기 아버지도 알지 못하고 본인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놀라운 계획을 알 수 있게 된 것이고
새로운 인생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우리에게 축복이에요.
무엇을 잃어버리든 무엇을 실패하든 차라리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폐쇄적인 생각을 벗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폐쇄적이고 좁은 생각을 웬만해서는 벗어버리려고 하지 않지요.
때문에 무엇을 잃어버린다든가 어떤 실패를 경험해야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우리의 좁은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었을 때 부모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일이 있었지요.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일행 중에 있는 줄 알고
하룻길을 가다보니까 예수님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찾는데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어요. 성전에서 예수님이
학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묻기도 하고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우리가 너로 인하여 염려하고 찾았느니라’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러나 그때는 그 모친이 그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모친이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부모는, 자식이 한 것이, 자기에게 섭섭한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일에 관여해야 되는 책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선에서는 스스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되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 말은 다른 식으로 번역하면 ‘내가 내 아버지 일에 관계해야 될 것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 의미는.. 부모인 마리아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아직 예수님이 애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못하고
자기들에게 섭섭하게 한 것만을 생각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아가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눅2:51
이후에 깨달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다 예수님처럼 지혜롭고 그렇지는 않지만
그들도 뭔가 찾아가야 될 것이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녀들이 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이 미련하지 않아요.
부모가 너무 간섭하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실 수도 있는데
우리는 암나귀나 찾으라고 내보내는 일이 많아요.
내게는 암나귀가 중요하지요. 그러나 자녀에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암나귀 찾으려다가 자식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암나귀가 중요합니까, 자식이 중요합니까?
암나귀는 얼마든지 다시 얻을 수 있어요. 그러나 자식은 그렇지 않아요.
◑마치는 말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에 대한 염려를 놓고
사울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한 것은 다행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자식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자식은 암나귀를 찾아오는 자식이지만
하나님은 더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도 그것을 몰라요,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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