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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4270 가인의 분노, 살인 / 김성수

LNCK 2013. 10. 2. 09:04

◈가인의 분노, 살인             창4:3~8, 민35:29‐31, 약1:20       창세기 21강 축약, 출처

                                                                                               

*원제목 : 구원받은 살인자들

 

아래 설교는,

1. 인간의 분노는, 결국은 하나님을 겨냥하고 있으며

 

2. 가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 대해 분노하실 때, 인간이 맞받아서 분노하게 된다.. 라고 설명합니다.

 

3. 아울러 성도가 분노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은 성도에게 분노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분노하지 않으시는데,

성도가 하나님께 분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분노는, 사람에게 표출됩니다. 가인처럼요.)

 

남이 나에게 욱하면, 나도 욱하고 나타나는 것이 분노인데,

근원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욱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하나님께, 또는 세상에 욱하고 분노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분노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는.. 분노, 살인(미움)의 삶을 살게 됩니다.

 

4.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그렇지 못하는 예배가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결국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주1)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딱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자신을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다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 말은 이제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이

어떤 무리와 완전히 구별되어서 심판의 자리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확연하게 선택을 받은 자들과

심판을 받은 자들이 구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 공적인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삶의 처소에서 예배의 삶을 올바르게 살아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제 선택과 심판으로 갈라져 영원히 분리가 될 종말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하고 예배의 삶을 살게 될 때, 세상(가인)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께서 속한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의 악이 여러분의 선한 삶과 대조가 되어 폭로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여러분의 예배의 삶은, 세상의 심판에 대한 근거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여전히 자신의 자랑과 인기와 유익을 위해

여러분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고 억압하는 자들에게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주고 당해주는 것이 바로 예배의 삶이고

 

그 삶이 그들의 죄를 심판하는 삶이 되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마세요.

당하는 것이 이기는 삶입니다. 그게 심판을 하는 삶입니다.

 

(갈 4:28‐2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9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당하는 여러분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역설을 꼭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예배와 예배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된 선한 자들과,

그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저주받은 인생들을 정확하게 구분 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벨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자,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선을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여전히 자신을 예배하고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악인입니다.

아벨의 선한 행위, 즉 올바른 예배의 삶이 가인의 악한 삶을 폭로했습니다.

 

아벨이 가인을 가리켜 ‘넌 잘 못 사는 거야, 너처럼 살면 안 돼’라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른 예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벨의 삶은 가인의 삶을 악으로 규정지어 심판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있는 곳은 늘 종말이 선포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을 심판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심판을 당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세월이 흐른 뒤에’라는 어구가 가진 의미가 이해가 가시지요?

그렇게 예배를 통하여 죄가 지적을 당하고 어두움이 폭로되고

더러운 것들이 시궁창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

그 곳에는 반드시 가라지 들의 반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성과 나약함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설파하는 복음을 못 견뎌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설교는 항상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 예배 시에 선포되는 목사의 설교가 모든 사람에 환영을 받는다면

그 설교는 빵 점입니다. 그것은 설교를 통하여 심판이 선포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오죽하면 존 웨슬리 목사님은 평소에 ‘내가 말씀을 전한 뒤에

사람들이 나를 박대하지 않으면 내가 과연 복음을 전한 것이 맞는가 의심했다’라고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을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였다."

 

 

◑살인

 

오늘 본문은 분명 인류 최초의 살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에덴에서 추방된 죄의 열매로 첫 번째 기록된 것이 살인입니다.

 

성경이 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살인이라는 것이 어떠한 죄이며, 어떠한 근원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설명하여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그 살인의 행위를 몰아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된 범죄가 바로 살인죄입니다.

신학에서는 십계명의 제 4계명까지를 대신(對神) 윤리(倫理)라고 칭하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대인(對人)윤리하고 말합니다.

 

대신 윤리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를 말하고

대인 윤리라는 것은 사람에 대해 우리가 지켜야 할 윤리를 말합니다.

이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대인 윤리도 두 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적극적인 권고인 반면

6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무엇 무엇은 하지 말라’라는 경고입니다.

 

그 경고의 계명 가운데 가장 첫 번째 것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민수기에는 살인자에 대한 율례가 더 무섭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민 35:29‐31) “위에서 말한 율례는, 너희가 어디에 가서 살든지,

자자손손 모든 세대에 적용되는 율례이다.

30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증인들이 있어야 한다. 오직 한 증인의 증언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 31 살인죄를 지었을 때에는,

살인범에게서 속전을 받고 목숨을 살려 주어서는 안 된다. 그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렇게 성경은 살인에 대해 아주 무섭게 경고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성경을 통해 무섭게 경고되어진 살인죄가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5:21-24)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주님은 형제를 향해 노하는 것, 형제에게 라가라 욕하는 것,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업신여기는 것.. 모두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인과 벌이 똑같습니다. 지옥 불입니다.

 

▲요한 사도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살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다 살인자들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살인자 가인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자들은

살인자의 삶을 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난 죄인들은

이제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남을 밟는 것이 그들의 삶의 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삶 전체를 ‘살인자의 삶’ ‘가인의 길에 행하는 삶’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죄인들은 다 살인자들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그 살인자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며,

그들은 이 땅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정확한 예화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자들의 삶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징후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다른 말로 살인을 일으키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인의 예를 들어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가인의 이야기에 국한시키시면 안 됩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 안에는 살인자 가인이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보세요.

 

▲1. 살인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징후의 첫 번째가 시기와 질투입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기와 질투는 여자들의 애교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는 그 자체가 살인의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뭡니까? 질투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뭐지요? 역시 질투 때문입니다.

 

(요 11:47~48, 53)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질투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왜곡시키는 가장 무서운 감정이 바로 질투심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질투심을 갖지 않습니다.

질투심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건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갖는 감정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망상 속에 사로잡혀 있는 가인들은

다른 이들에게서 자기보다 나은 모습이 보일 때, 그를 제거하고 싶어집니다.

그게 바로 살인의 동인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그러한 가인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올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바로 벤치마킹의 이성적 자세입니다.

벤치마킹이라는 것은 경쟁업체의 장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배워서

쉽게 아이디어를 얻어 그 경쟁업체를 따라잡는 다는 의미로

Fortune 지가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도는 그 사람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도 생활을 분석하고 배워서

자신도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내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지 벤치마킹을 해서

나의 영적 생활에 유익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이들에게 나보다 더 인기가 좋으면

그 사람의 품성과 성격, 대인관계 같은 그 사람의 인기 비결을 잘 분석하고 배워서

그 사람처럼 인기 있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러한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한 벤치마킹으로

자신의 영적 유익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 상대방을 말로 행동으로 몰아붙여서 죽여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질투의 정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 하셨을 때

도대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은 나의 삶을 기뻐 받지 않으시는지

그리고 저 아벨의 삶은 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고민하고 분석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죽여 버리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아벨만 없으면 자기가 최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질투이며 살인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러한 질투로 점철되어지고 있으며,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인 아벨 들은계속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인들의 죄가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르의 질투에 의해 얼마나 곤욕을 치렀습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천재 미켈란젤로 때문에 얼마나 많이 흔들렸습니까?

그의 말년 작품은 한심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게 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 보이면

그를 질투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를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보아

자신의 영적 성숙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살인자인 가인들이 품고 있는 살인의 동인이 분노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인자의 삶을 살게 된 죄인들에게서 나오는 대표적인 감정이.. 분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를 말합니다.

 

거룩한 분노도 있습니다. 의분이라고 하지요.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시면서 유대인들의 외식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죄를 보고 분노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서 죄가 발견 될 때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로 죄를 밟아 죽이는 데 쓰면, 그 것은 거룩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내는 분노는

그것 자체가 살인의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창 49:6) “나는 그들의 비밀 회담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들의 회의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유익을 위해 뿜어내는 분노와 혈기는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없애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이 오염된 육체 속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사용하여, 살인의 도구로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이 나는 것은 어찌 할 수 없지만

그 분을 해 질 때까지 품고 있지는 말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엡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에 부담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분노’이거든요. 저는 분노를 잘 참지 못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아주 많이 좋아진 거예요. 예전에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는 특히 누가 저를 무시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그걸 못 참았어요.

심지어 누가 뒤에서 자동차 경음기만 울려도 저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응징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분을 참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분을 냅니까? 우리가 분을 내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분을 낼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청준 선생의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에 보면,

일찍 남편을 여의고 사랑하는 아이마저 유괴범에게 살해를 당한 한 여인이

자기 아이를 살해한 유괴범을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갔는데

그 유괴범이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장면으로 그 소설은 끝이 납니다.

 

그 여인은 일차적으로 자기 아이를 살해한 유괴범에게 분노한 것이지만

결국 그 분노의 끝자락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분노는 그 대상이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결국 그 분노의 끝으로 가보면

인간의 분노는 항상 하나님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살해한 가해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그 가해자들이 당해야 할 고통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 세상에서 질병으로, 가난으로, 전쟁으로, 천재지변으로 조금씩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전부 인간들의 죄로 인해, 주렁주렁 영근 죄의 부산물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그러한 죄의 열매들이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될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한 발 한발 깊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들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은

그러한 죄의 열매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보여 지게 되면

자신들은 누군가로부터 가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하나님을 살해한 가해자인 우리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이신 하나님께서 가해자들의 죄를 향해 발하시는 것이 분노입니다.

 

여전히 그러한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 분노에 대응해서 자기들도 분노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분노 속에서 해방된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보며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아들에게 그 모든 분노를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 그 아들 안에 있는 자들의 죄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분노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혹여 상대방이 자신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행동을 해도

이내 자제를 하고 자신을 향한 분노를 거두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분노를 우리에게 모두 쏟아 부으셨다면

우리는 벌써 지금 이 순간에 그 분노의 불에 활활 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노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분노케 하는 모든 상황들과 사건들과

이웃들을 자신의 영적 성숙에 유효적절하게 사용을 할지언정

그것을 살인에 사용하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약 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야고보는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자주 분노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로 회복되지 못한 증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여러분을 분노케 하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에게서 거두어 가신 하나님의 분노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1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로서

1백 데나리온 때문에 분노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음성을 떠올리십시오.

 

이렇게 질투와 시기와 분노로 야기되는 살인은

모든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죄의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매일같이 살인을 합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언제든지 자기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 욕을 해대는 살인을 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언제든지 형제에게 노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언제든지 형제에게 라가라 부르는 자들이

죄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분노에서 구출되었다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방불하게 시기와 질투와 분노의 살인을 하고 있다면

과연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만사형통,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추구해야 할 것은

내가 여전히 시기하는 자, 질투하는 자, 분노하는 자, 살인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사랑하는 자, 용서하는 자,

온유한 자로 지어져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자꾸 사랑해 보고, 용서해 보고, 인내해 보고,

감싸 안는 연습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게 잘 안 될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

 

주1)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와예히 믹케츠 야밈’이라는 어구는

원래대로 직역을 하면 ‘그리고 날들의 끝으로부터, 종말에’라는 뜻이 됩니다.

영어로는 ‘in the end of the day'입니다.

 

왜 최초의 예배에 관해 기술하는 창세기에 요한 계시록의 언어인

‘종말’이라는 어구를 썼을까요?

 

‘예배‘라는 것은 ’종말‘을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떠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이 세상의 ‘왕’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티끌에 불과한 자신들의 실존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께 순종하고 충성하며 자신의 삶을 의뢰하는 모든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2)

(창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개역성경에는 가인이 아벨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가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70인 역(LXX)성경이나, 라틴어 번역본인 라틴 vulgate 성경, 사마리아 오경,

공동 번역 이런 성경 번역본들을 보면 그 ‘요메르’라는 단어의 목적어가

‘들로 가자’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이야기했다‘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주석가인 메튜 헨리에 의하면 성경의 갈대아 번역본에는

가인이 아벨에게 한 말의 내용이 조금 더 첨가되어 있는데

그 갈대아 번역본에 따르면 가인이 아벨에게 제물에 대해 열납에 대해,

그리고 내세와 상벌이 없다는 등의 자신의 불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아벨이 동의하지 않자, 아벨을 질투하여 들로 가자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성경이 그 구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렇게 가인이 아벨에게 의도적으로 ‘들로 가자‘고 한 뒤

아벨을 죽인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고의적이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