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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과 셋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2

LNCK 2013. 9. 11. 07:36

◈가인과 아벨과 셋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2         창4:1~25, 출22:29~30, 민3:12‐13

                                                                                                          

김성수 목사, 창세기20강b,  출처

 

◑첫 열매, 장자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탄생된 언약 백성들

     (성경이 말하는 장자란.. 육신적 장남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장자들은 유기해 가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첫 것(장자)들을 당신께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명백한 모순 아닙니까?

 

아닙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이 말씀하는 장자, 첫 열매는.. 그리스도에 의해 태어난 언약 백성들

즉 ‘여인의 후손’들이, 장자인 것입니다. 아래에 살펴보겠습니다.

 

출22:19, 29‐30

“19 무릇 초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 양도 다 그러하며

29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30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 만에 내게 줄지니라”

 

(출 34:26) “너의 토지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사람이건 간에

첫 것들을 제물로 받으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물의 개념에 대해서도 잘 정리를 하고 계셔야 합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룩한 것’의 의미도 그 내용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물’이라는 것은, 더러운 것들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은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의 제물이었지만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예수님처럼 단순히 희생만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점도 없고 흠도 없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것’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죽여서 태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것들만 내가 받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처럼 점도 없고 흠도 없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자들이 또 생겨났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 말은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제물로 거룩하고 새롭게 창조가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렇게 거룩하고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지요? 진정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 난 자들임과 동시에

그렇게 새롭게 살아남으로 해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다는 첫 것들,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물의 자격을 갖추게 된 성도들을 함께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시 Union with Christ 의 교리가 적용이 되지요?

 

▲알기 쉽게 레위 지파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민 3: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보시는 것처럼, 레위 지파는 애굽에서 나올 때

살려 주신 장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지파입니다.

 

그 말은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을 살려준 어린 양 즉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성도, 즉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금 민수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장자들을 모두 내게 바치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고대 사회에서 장자의 개념은 남자를 대표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와 첫 것들을 모두 달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전부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꼼짝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지파가 레위 지파이지요.

 

이렇게 레위 지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교회를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장자를 모두 바치라는 명령하신 것은

‘나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나의 진정한 장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받을 것이다.

오직 나의 장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자에 의해 그 장자 속에서, 새롭게 살아난 또 다른 장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이 바로 창세전에 내가 택한 교회이다.

 

그들도 내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장자들이 되었으므로

나는 나의 택한 백성들인 교회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건질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첫 것들, 장자들을 자기 것으로 받으실 것이라면

애초부터 첫 것들을 유기 시키실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유기 시키시고 첫 것들을 받으셨어야 지요.

 

그 첫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성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첫 것들을 유기하지 마시고 받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측의 장자를 안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작정 속에서 유기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처럼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장자들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일견 모순인 듯 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 측에서 준비하여 내어놓는, 인간의 기대가 걸린 장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장자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을 흡족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장자는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이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제 저녁 교회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 아이들이 차 창문을 열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경찰한테 티켓을 끊었습니다.

 

아이들이 seat belt도 안 매고 차안에서 장난을 쳤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잘못이지만 제가 티켓을 끊으므로 그 아이들의 잘못이 사해진 것입니다.

 

저는 아무 잘못 없이 티켓 값도 지불해야 하고 보험료도 더 많이 내야 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겁을 좀 줬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이제 아빠 큰일 났다. 이 티켓 값이 얼마인 줄 알아?’

 

그랬더니 집에 와서 둘째 아이가 슬그머니 제 옆에 무얼 놓고 갔습니다.

보니까 자기가 그 동안 모아 둔 동전들을 다 가져다 놓았습니다. 75전이었어요.

 

만일 우리 아이가 그 75전을 갖다 놓으면서 ‘이 정도면 아빠한테 큰 도움이 되겠지요?’

라는 마음으로 가져다 놓았다면 그건 아빠를 조롱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애써 모은 것을 갖다놓으면서

‘아빠 내가 내 힘으로 어떻게 아빠가 지불한 것을 다 갚겠어요.

그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이거라도 기쁘게 보태고 싶어요’라고 가져다 놓았다면

그건 참 기특하고 대견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다른지 아시겠지요?

 

▲정리를 해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준비해서 내 놓은 장자들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장자들을 유기 시키시고, 기대치 않은 자들을 선택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장자만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그 장자는 인간이 자랑삼아 내어놓을 수 있는 인간 측에서 만들어 낸 장자가 아니라,

다른 말로 인간의 노력을 근거로 한 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자가 바쳐짐으로 해서 태어나게 된

예수의 형제들인 또 다른 장자들만을 받으시겠다는 것이

바로 장자들, 첫 것들을 바치라는 어구의 진의(眞意)인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 양의 첫 새끼는 - 그리스도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의인으로 등장하는 아벨이

바친 제물이 ‘양의 첫 새끼’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한 가지 주의하셔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믿음을 선물 받은 의인이었기에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진정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자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첫 새끼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는 구원의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의 진술대로

정말 아벨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맞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23:34‐35) “34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35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보시다시피 성경은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 사람일 뿐 아니라

의인이었으며 선지자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무엇을 증거 하던 사람입니까?

 

(롬 3:21‐22)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선지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아서 죄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죄인들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함을 선포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선포하던 이들을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이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이미 아담 때부터 당신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계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삶을 살았는지

오늘 본문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지요.

 

먼저 아벨의 이름인 ‘하벨’은 ‘nothingness, vanity'입니다.

성경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분이 계시지요?

 

(사 53:2‐3)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모습이 바로 ‘아벨’ ‘nothingness, vanity'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벨‘의 모습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에게 살해를 당했습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열심히 드리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시는 의인이신 주님을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가인.. 뱀의 후손

 

▲가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가인은 자신이 드리는 제사의 행위와 제물로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혹시 이 중에 ‘그게 뭐 나쁜 일인가? ‘하고 의구심을 품으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어떤 행위나 인간이 드리는 어떤 제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어떤 것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것을 ’자기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눅 18:11‐12)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들의 열심을 보십시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 속에 토색, 불의 , 간음,

사기가 없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고 십일조를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아주 엄격하게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행위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바치는 제물이나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의 삶과 그들의 제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처분에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고 원망스러워도 하나님께 대들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하나님께 해 드린 것이 없고 앞으로도 해 드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오는 거룩한 삶과 행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나의 옛 사람이 죽어가며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가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것을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는

예수님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내 행위를 값없다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와 똑같아요? 가인과 똑같지요?

오늘 본문의 가인이 정확하게 예수님을 살해한 세상의 무리들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창 4:5)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설사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안 받으신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내가 나의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드리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으시자 심히 분해합니다.

그리고 안색까지 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하는 자들과 세상의 것들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 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으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의 후손’을 대표하는 자의 이름이 ‘아벨’'아무 것도 아닌 자‘인 것이고

그가 세상에게 살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아벨 - 여인의 후손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 아벨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예표였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히 12:24) “24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아벨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죽음은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드린 제사가 온전한 제사였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막을 공부할 때 살펴보았듯이

일 년에 한 번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올릴 때

그 제사가 조금이라도 부정하거나 흠이 있는 제사이면

제사장은 그 지성소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제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사였을 때

대제사장은 그 지성소를 살아서 나올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신 예수가 자신을 제물로 드려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신 것이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온전하게 드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볼까요?

 

(창 4:25)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여기서 ‘대신에‘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쉬트‘는 ’두다, 임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의 그림자로 왔던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셋‘은 죽은 ‘여인의 후손’의 재등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십자가의 삶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세상의 힘의 원리에

맞아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바로 그 삶이 ‘셋’으로 부활하는 삶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벨을 선지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렇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벨과 같이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늘 가인이라는 세상의 공격에 노출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21세기의 가인들에게 늘 맞아 죽는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때려죽이려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듭니다. 그 때 죽어 주세요.

져 주십시오. 그런데 성경은 그게 부활이라고 합니다.

맞아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 탄생했습니다.

 

▲세상에게 맞아 죽은 자들의 삶을 밖에서 보면 사랑이요, 인내요, 온유요, 절제요,

용서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탄생하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사람

‘셋‘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에게 맞아죽은 우리의 죽음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정말 부활을 기다리십니까? 부활을 하려면 죽어야지요.

나의 옛 사람의 죽음이 없이 어떻게 부활을 기대하십니까?

다같이 이번 주도 열심히 죽으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