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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성령이셨다 / Sparks

LNCK 2013. 10. 24. 16:54

◈시작부터 성령이셨다          요일1:1, 2:27                  출처, 편역

 

As it Was in the Beginning   by T. Austin-Sparks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행1:2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8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16

 

이와 같이 행1장에, ‘성령’이 4번 나옵니다. 행1:2, 5, 8, 16

그것이 중대한 사실임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는, 사도바울이 그의 인생 막바지에 로마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그 당시의 기독교 신앙은, 이미 그 자체적 성격이 점점 바뀌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건 자연적 현상입니다. 

예수님 승천 후 약 30년이 지났으니,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비신앙적 요인들이 점점 스며들기 시작하던 시점이었습니다.

 

그 변화는, 교리doctrine 적인 면에서, 또한 실천 practice적인 면에서

둘 다 나타났습니다. (전자는 이론, 후자는 실제)

 

여러분, 비슷한 시기에, 사도바울이 썼던 디모데서를 읽어보십시오.

당시 기독교가 얼마나 기울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편지를 통해, 그런 기울어짐을, 다시 바로 잡으려했던 노력을 엿보게 됩니다.

 

◑기독교회의 변질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목적, 시대 정황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성격 자체가, 점점 변하고 있었던 시기에,

누가도, ‘사도들의 행적’이란 책을, 썼습니다.

 

누가 ‘사도들의 행적’이란 제목을, 이 책에 붙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제 Sparks가 보기에는, 누가 자신이 붙이진 않은 것으로 확신합니다.

만약 제가 이 책에 이름을 붙였더라면

저는 ‘사도들의 행적’보다는 ‘성령의 행적’으로, 이 책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제가 파악하기에, 사도행전을 쭈욱 읽어보면, 사도들의 행적을 설명하기 이전에,

그것을 가능케 했던 성령의 행적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행1장에서만, 성령이란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보십시오.

‘성령’이란 단어가 계속적으로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요..

 

행 1장만 보더라도,

누가가 ‘성령’을 이 장에서 4번이나 언급하는 이유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탄생하던 초기부터, 모든 것이 성령으로 되어졌다>

또는 ‘교회가 성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인도, 감동, 주장과 관련 없는 교회는,

본질에서 많이 빗나간 것이지요.

 

누가가 가만히 보니까, 주후 60년경의 초대교회가 벌써,

성령이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가르침, 인간의 주장이 횡횡하는 교회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빗나간 현실을 바로 잡고서,

교회의 본질로 다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바울이 디모데서를 썼던 비슷한 시기에)

하나님은 누가로 하여금, 사도행전을 쓰게 하셨습니다.

 

‘다시 성령이 주장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행1장부터 성령, 성령, 성령, 성령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 스팍스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성령이 인도/주장하시는 교회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유럽의 교회와 서구의 교회는, 원래 교회의 본질에서

지금 너무 많이 벗어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전통’이라는 것이 생기고,

나중에 그 정신은 사라져 버리고, 전통이란 형식만 남아서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전혀 엉뚱한 전통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교리가 그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기독교신앙과 완전히 상충( 또는 반대)되는, 그런 잘못된 교리로 변질된 경우도,

제법 있습니다. 이름은 기독교 교리인데, 내용은 기독교적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지금은 정반대의 교리 문제로, 교단이 서로 반박하기까지 합니다.

같은 기독교인데 말입니다.

같은 기독교인데, 교단에 따라서, 서로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리만 그렇습니까? 실천 practice 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단이 강조하는 ‘실천’이 있고, 다른 교단이 강조하는 ‘다른 실천’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이 보시기에 정말 통탄스러운 것은

기독교가 이런 교리, 실천 또는 정치적 문제로 갈라져서

종잡아도 수 백 개의 교단으로 나누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성령님께서, 과연 이런 현실을 좋아하실까요?

성령님께서 원래 이렇게 수 백 갈래의 다른 마음을 갖고 계셨기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교회가, 이렇게 뿔뿔이 나눠어진 것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처음 모습이 과연 어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것 아닙니까.

이런 얘기가 진부하게 들리십니까?

 

사도행전의 처음 교회의 모습, 그것은 교회의 기초에 해당합니다.

기초가 없어보십시오. 또는 기초가 잘못되어 보십시오.

그 위에 계속해서 건물을 세워나간다면..

결국은 건물(교회)은 조만간 무너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초가 그만큼 중요한데,

교회의 기초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구약 교회의 시작 때부터 ‘성령님’ 이셨습니다.

 

▲세상의 시작, 천지창조 때부터, 성령님께서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셨지만, 성령님의 사역을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행1장의 교회의 시작 때부터가 아니라,

훨씬 이전에 태초부터 성령님이 삼위일체로 역사하셨으니까요.

교회의 삶, 성도의 삶은, 성령님과 필수적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창1:2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로 운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hover

여기서 ‘운행하셨다’는 말에는, ‘(새가 알을) 품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brood

무슨 말입니까?

 

창1장에서 천지창조 때, 성령님께서 세상을 그 날개 아래에 품으셨고,

행1장에서 교회의 시작 때, 성령님께서 교회를 그 날개 아래 품으셨습니다.

신구약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실 때, 성령님께서 항상 개입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 없이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태초부터 그랬습니다.

 

▲출애굽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끄실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앞서가게 하셨습니다.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때로는 백성들의 뒤를 막아서, 보호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두 개의 기둥이 아니라, 구름기둥 안에,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하 ‘구름기둥’으로 부릅니다.)

 

저는 그 구름기둥이, '성령님의 모형'이라고 봅니다.

광야교회의 시작 때부터, 백성들을 앞에서 인도하시고, 뒤에서 보호하시는 역할은

바로 성령님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둥이, 때로는 세상과 분리를 가져다줍니다.

 

홍해로 들어갈 때도, 물론 그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10:1~2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고전12:13

 

보십시오. 구약의 광야교회도.. 성령(구름)아래서, 세례를 받고 광야교회를 이루었고,

신약의 새 교회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교회)이 되었습니다.

천지창조, 구약의 광야교회, 신약의 교회

이처럼 모든 교회에서, 성령이 그 시작(설립) 때부터 강력히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떠나서는

절대로 교회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막을 만들고, 성전을 만들 때도, 당연히 성령께서 주장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성막을 만들게 하셨는가 하면,

 

대상28:12 “또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 곧 여호와의 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식양을 주고..”

이와 같이, 성전의 설계와 건축도, 모두 성령의 가르치신 대로 되어졌습니다.

 

신약교회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출애굽의 광야교회, 광야의 장막, 솔로몬의 성전 모두가 다

성령님의 지시, 주장, 인도를 따라서 이뤄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연장선상에서, 신약의 교회도, 당연히

성령님의 지시, 주장을 따라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성령님이 시작부터 주도하셨습니다.

 

▲이제 신약시대에 이르러, 구약의 여러 모형들이, 그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데요..

그 중에서 최고, 으뜸의 실제는,

구약에 모형으로 보여졌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 때부터, 성령님이 깊이 함께하셨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1:35

 

2.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같이 내리는 성령님을 (의 세례를) 받으시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10:38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사역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요. (하물며 우리가 성령을 떠나서, 단독 사역을 할 수 있을까요?)

 

4. 십자가를 지신 것도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사역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 히9:14

 

5. 예수님의 부활도, 성령의 사역이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예수님의 잉태부터~부활까지

성령의 사역이, 거기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늘 나의 사역은 어떻습니까?

성령의 사역이 빠진 부분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요, 성도의 본질입니다.

 

 

◑신약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작부터 성령님!

 

행2장에 보면, 영원 전부터 계획된 교회의 탄생이

실제로 역사 속에 드러난 모습을 보게 되는데요.

 

오순절 날에,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탄생되어집니다.

그 이전에 성령님은, 머리이신 예수님의 사역 내내, 함께 하셨다면

그 이후로 성령님은, 몸이신 교회의 사역 내내, 교회와 함께 하시게 됩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시작, 공생애 사역, 십자가, 부활 내내 함께 하신 것처럼,

교회의 탄생, 시작, 사역.. 내내 성령님이 교회와 함께 하시는 것을

사도행전 성경이 보여줍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성경 마지막에, 계시록에 보면,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갈 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7교회에, 7번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여전히 돌이키고 돌아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창1장의 세상의 시작, 광야교회의 시작, 성막/성전의 시작

그리고 신약교회의 시작.. 모든 것이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 ‘사람’의 역사가 가미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초대교회 시절이라 할 수 있는

계2~3장의 일곱 교회 때부터,

교회는 본질로부터 꽤 많이 벗어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성령님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시면서

교회들이, 다시 본래 모습으로, 본질적 교회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성령의 역사에

함께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이 맞다면,

만약 당신이 참 크리스천이라면,

 

구약시대부터 모형으로 제시된 교회가, 신약에 실체로 드러났고,

그 신약교회의 일원으로, 오늘 당신이 살아가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성령님에 의해, 시작되어지고, 주도되어지고,

함께 동행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아주 중요한 사실인데요,

이건 정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일입니다..

 

(뜸을 많이 들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놀라운 사실이 맞지요?

 

성령님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 내 속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모신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성령님과 함께

저와 여러분은, 놀라운 일(능력)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실 때

그런 기적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다시 보십시다.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그들에게 첫 번째로 일어날 사건이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답은 행1:8절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비겁한 일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다 뿔뿔히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빌라도의 법정 가까이에서, 자기 신분을 숨기고 불을 쬐고 있었는데,

저는 그 날 밤에, 베드로가 불을 쬔 것은, 몸이 추워서라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그의 마음이 추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잔뜩 긴장과 두려움가운데서, 그는 불을 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저 제 상상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어떻게 증인(순교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8

성령이 내주하시면,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땅 끝까지라도, 목숨 걸고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을 심하게 비난하게 되지 않기 바랍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십자가’ 형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벌벌 떨지 않을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는,

그런 겁쟁이 같은 우리들도, 담대한 복음전파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 12사도들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로 담대해집니다.

 

▲베드로가 변화된 모습을 잠시 살펴볼까요?

행2장에서,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행2:23

 

지금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민들을 ‘살인자’로 몰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죄책을 주어, 그들을 회개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함부로 하다가는,

당장 예루살렘 군중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법한, 위험한 발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극단적 발언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만큼 담대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 받은 것을, 즐거워했다”고 증거합니다. 행5:41

고난 받는 것을 피해 다니던 사람들이,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내내, 이런 성령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령의 능력이, 오늘 당신에게 나타나면.. 당신은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으면.. 달라져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의 가르치심

 

여기서 꼭 언급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하고, 사도요한만 남아서, 90세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이때 요한서신서 등을 남겼는데,

이때 그가 서신서에 썼던 가장 첫 문장은, 이런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사도요한도 (위에서 살펴본 누가처럼)

뭔가 자꾸 변질되어가는 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그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서신서를 써서 ‘회람’시킨 것입니다. *돌아가면서 읽음

 

그 첫 문장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가장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사도요한은, ‘성령’과 연결시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태초부터 성령이 계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위에서 사도요한은 태초부터 말씀이 계셨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태초부터 삼위일체가 함께 계셨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2:27

 

저는 이 구절을 대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말씀을 누가 가르치신다고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가르치십니다.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물론, 성경교사가 전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고요,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혼란을 겪고 있고,

뭐가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도 모른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은,

<성령으로 깨달은바, 말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되,

자기 인간적 생각과 기준과 판단으로,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니까,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교파가 나눠지고, 진리의 기준이 세워지지 못합니다.

 

이 혼란 가운데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위 구절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2:27

 

모 교단 입장, 모 교수 입장.. 그걸 따르기보다는,

각자 자기 안에 내주하신, 성령이 가르치시는 대로, 배우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단 입장, 어떤 신학 입장을 무조건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그 상반된 내용을.. 성령님 앞에 가져가서.. 조용히 묻고,

성령님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날 한국의 WCC 문제로 인한 혼란에, 어떤 답이 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은 물론, 자기가 거듭났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교리적으로 독선적이거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변도로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자기의 극단적 진리를, 참 진리인양 가르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깨닫고, 가르치는 사람은, 거기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혹시 바로 당신이 그 극단적 주인공 일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정확하지 않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심각성을 철저히 인식하고,

자기에게 혼란되는 부분을, 성령님께 진지하게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위 요일2:27절은, '성령님이 반드시 가르쳐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비진리를 가르쳐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시지 않습니다. 결코.

 

그러므로 지금 내가 주장하는 바, 진리라는 것을

성령님 앞으로 가지고 가서, 여쭈어 보시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내 주장을 너무 세게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전에,

나와 다른 이의 주장을, 무조건 잘못 되었다고 반박하기 전에,

우리 각자가, 이 문제를 가지고, ‘진리의 영’의 판단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16:13

이렇게 우리 각자가, 진리의 성령의 인도로, 진리 가운데 인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조건 싸우는 투사가 되기 이전에요)

 

▲노후의 사도요한은, 남겨진 제자들에게

‘말씀’의 중요성에 관해서, 편지를 남기기 원했습니다. 요일1:1

 

그렇지만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또 갑론을박이 생기고

교회가 나눠지고, 일부가 비진리로 인도되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요일2:27절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날 우리는 ‘원래의 교회’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모두가 ‘원래의 교회, 본질적 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말씀은,

태초부터, 교회의 시작부터 함께 하셨고,

지금까지 내내 동행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말씀, 둘은 하나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성령으로 가르침을 받은’ 말씀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혼란이 있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말씀’, ‘말씀’ 논하지만, 그 말씀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말씀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우리는 술취한 자처럼, 비틀거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갖고서도, 술취한 자처럼 비틀거릴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자기 인간적 지혜로 말씀을 해석할 때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고서, 말씀을 해석해야 하겠습니다. 엡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