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는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지만, 엘리사는 병들어 죽었다.
그런데 방법은 다르지만, 떠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엘리사 선지자가 떠나면서 한 시대를 장식했던 선지자들은 다 떠나갔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나오지 않았다.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엘리사가 병석에 누웠을 때 요아스 왕이 찾아와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말한다. 왕하13:14
이 말이 우리 귀에 익숙하다.
일찍이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보고 엘리사가 외쳤던 말이다.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왕하2:12
하지만 엘리사의 경우와는 달리, 요아스 왕에게는
하늘에서 겉옷이 떨어지지도 않았고
엘리사의 영감을 이어받을 사람도 없었다.
엘리사가 죽으면서 선지자의 시대는 끝나고 만다.
요아스 왕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 눈물을 흘려야 된다.
이와 같은 선지자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요아스 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한국교회를 일군 주의 종들이 점차 은퇴를 하고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다.
그분들은 한 시대를 장식한 분들이다. 70년대에 교회를 개척해서 키운 분들이다.
한국교회의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낸 인물들이다.
교회의 부흥이 그냥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다.
어느 나라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같이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이룬 나라가 없다.
전 세계 교회가 주목했다.
교회성장의 비결을 배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한국을 찾아오던 시대가 있었다.
외국의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가르칠 때, 한국을 언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시대를 대표했던 거의 모든 분들이 은퇴하거나 돌아가셨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연 선배 목사님들의 영적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이어받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알 수 없다.
▲신세대 목사들은 이전 목사님들보다 교육을 더 많이 받고 지적 수준이 높다.
유학도 다녀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영적 파워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떠나간 후 이스라엘의 분위기와도 같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해야 될 부분이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은 뭘 모르고 있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여론이 영적인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무조건 비판만하면 되는 줄로 생각한다.
마치 과거 군부독재를 비판만 하면 칭찬을 받을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자기 영적 능력이든, 자기 믿음의 능력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남의 실수에 대해 비판만 할 줄 아는 사람 천지다.
영력=비판력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는 말은 이제 효력이 없다.
그 말은 엘리야가 승천할 때 딱 한번 효력이 있었다.
그 때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임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간 요아스 시대에,
그 말은 추억거리가 됐을 뿐
더 이상 똑같은 역사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지금 세대가,
선배 세대의 신앙, 철학,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구호를
똑같은 표현과 말로써, 그대로 외친다 하더라도,
본문의 요아스가 되뇌는 구절과도 비슷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는 말은 똑같지만,
효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요아스는 지금 자기 시대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아야 되는데
그러나 그는 그만한 재목이 아니다. 그에게는 그만한 담대함이 부족하다.
엘리사가 두 가지 상징적인 세러모니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한다.
하나는 활을 쏘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화살로 땅을 치게 하는 것이다.
왜 땅을 치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요아스는 땅을 세 번 치고 그친다.
그걸 보고 엘리사가 노한다.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사건이다.
요아스의 소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중에 화살로 땅을 치라고 했을 때
엘리사가 바라던 대로 오륙 번을 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 대부분은 오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대충, 적당히 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적당히 하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도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 요아스와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불필요하다"라고 생각한다.
요아스의 그러한 생각이 엘리사를 노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이 적은 것을 볼 때 분노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구절을 통해 배워야 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대충"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완전하지 않은 승리는, 승리가 아니다.
왜 누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누구는 경험하지 못하느냐?
본문 요아스의 사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적극적인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문제시하는 세상에 문제가 있다.
우리의 적극적 성격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긴요한 도구인 것이다.
.................................................
◈성공 같은 실패 요12:26 재발행
*출처 :「잊혀진 제자도」The Great Omission 달라스 윌라드, 윤종석 역,
pp.135~150. 이 내용을 축약, 재작성. 미진한 부분은 직접 본문을 읽어보세요!
왜 오늘날 현대 미국의 기독교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쇠퇴하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와 해결 방안을 정직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독교의 본질인 <내면적> 신앙에서 벗어나
너무 <외적, 가시적 성공>으로 치중하다 보니...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속으로는 영적인 힘을 다 잃어버렸다는 주장입니다.
항상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런 글은 내가 내 방향을 잘 잡아나가자는 것이지,
남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편집자
◑사역의 계승이 어렵다.
▲핵심 알맹이가 빠진 성 프랜시스 유적지 관광
아시시에 가면, 거기 모인 사람들 입에서 성 프랜시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그를 기념하는 유적지의 기념물도 많고,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즐비하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성 프랜시스가 품었던 불을, 팔거나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를 흠모해서 거기를 찾아온 많은 관광객들 중에서,
성 프랜시스의 성품과 그의 정신적 유산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정신 유산은 다음 세대에 계승되기가 무척 어렵다.
역사 속에, 간혹 영감과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 나타나서,
자기의 한계를 훌쩍 뛰어 넘어, 그 시대에 큰 인물이 된다.
다윗 왕, 소크라테스, 성 프랜시스, 마르틴 루터, 존 웨슬리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에게는 정말 “뭔가”가 있었다. 그들은 남달랐다.
그들이 그토록 큰 역사를 이뤄낸 것도,
그들을 중심으로 여러 운동과 단체들이 생겨난 것도,
바로 그들에게는, 남다른 비범한 “뭔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남다른 “불”이 내재해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 나가면서,
남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그것을 역사에 남겼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추종자들과 인재들이 모여들고,
그들의 활동을 계승하려는 기관이 생겨나면서,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했다.
그런데 이들 후계자들이 시작한 사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창시자가 가졌던 불과 비전에서 조금씩 이탈해 나간다.
머지않아 그 기관은 창시자의 불과 비전과는 거의 관계없는,
무늬만 남은 기관이 되고,
과거 창시자가 생존할 때처럼 활발히 움직이지도 못하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쓸쓸이 사라져 버린다.
▲이런 현상은 교계, 사회가 마찬가지다.
종종 창업주의 정신과 열정이 살아 움직이던 기업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후계자가 등장하면서
창업주 1세대의 정신과 열정을 승계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창업주의 퇴장과 함께,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간판을 내리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부흥사 찰스 피니는 오벌린 대학을 설립했다.
이 대학 말고도, 많은 크리스천 대학들이, 다음 세대로 지나가면서
설립자의 마음의 불과 정신 유산을 계승하지 못하고,
세상 대학과 거의 마찬가지의 길로 가버렸다.
그 이유를 한 번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성공 같은 실패
기독교계에 유행하는 말로 ‘성공 같은 실패’라는 말이 있는데,
(내적 내공이 없이, 외적으로만 버젓하게 성공하는 것은, 결국 실패라는 말)
정말 뼈가 있는 말이다.
▲사람만 모여들면, 불이 꺼져 버리는 성향
처음에 그 신앙 운동이 출발할 때는, 당연히 “뭔가”가 있다.
사람들의 깊은 내면의 필요를 채워주는 ‘불, 정신자원, 사랑’ 등이 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거기로 모여들게 된다.
거기서 나눠주는 불, 비전, 사랑의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그 ‘불, 비전, 사랑의 온기’를 꺼버리는 역할을 해 버린다.
(저자는 그 구체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지만, 대충 짐작 할 수 있음)
그래서 처음에는 ‘불, 비전, 온기’로 시작했던 많은 사역단체들이
시간이 지나면, 일세대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기념품이나 팔고, 사람들이 와서 한 번 휙 둘러보고 가는 장소로 전락한다.
사람만 많이 모여들면... 처음의 상태에서 변질되더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는 당연히 ‘그러려니...’ 할 일이지, 깜짝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신기한 기적이 될 것이다. (사람이 다 그렇지, 별 수 있나?)
이런 ‘쇠퇴’의 원인은,
*자원의 부족은 당연히 아니고, (오히려 자원은 늘어났고)
*‘바른 교리’의 문제도... 사실은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라서, 사실 그런 쇠퇴를 감지하기조차 매우 어려운데,
본질적으로 ‘내면적인 문제, 즉 불, 비전, 사랑의 온기의 문제’이다.
즉, 예전 같은 불, 비전, 열정, 뜨거움이 미묘하게 식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창시자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과거와 같은 “진동”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나와야 회원들이 감동되는데,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약화되다가
마침내 중단된다는 것이다.
그 ‘내적 불, 비전,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고갈되어버림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과거의 명성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사역이 점점 형식화/화석화 된다.
이런 현상은 일세대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성경에 사울, 아마샤, 웃시야 같은 왕들이 그 예)
2세대 등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점차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다윗-솔로몬-르호보암, 여호수아-타락한 다음 세대)
과거 개신교 역사를 보면, 모든 ‘교단’들도 거의 예외 없이 이런 길을 갔고,
오늘날 개별적인 ‘기독교 단체, 구제기관’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매너리즘에 빠지고, 내면적 열정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과연 뭘까?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만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돌하는 것은 없다. -헨리 나우웬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선의의 봉사가(사역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비전 등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역을 통해 자기가 성공하려 하고, 입신양명, 자아실현 하려고 할 때 그렇다.
사역이 잘될수록, 실제로 그런 위험에 더 잘 빠지게 된다.)
▲잘 되다가... 교만해져서... 망하는 패턴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왕들 중에, 재임 초기에는 부흥 운동을 일으키다가도
성공한 다음에 실패하고, 퇴임이 좋지 않은 왕들이 많이 등장한다.
일례로 웃시야를 보면,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대하26:16
웃시야가 강성해 진 것은, 재임 초기에는 하나님을 힘써 섬겼기 때문이다.
웃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대하26:4~5
그래서 ‘성공 같은 실패는 없다!’는 말이 생겼다.
차라리 성공 안 했더라면, 실패도 안 했을 터인데...
▲다시 한 번 패턴을 정리하면,
개인이나 단체가 처음에 뜨거운 헌신을 해서 상당한 외적인 성공을 낳는다.
외적인 성공은 자기들에게 자부심을 주지만, 심해지면 교만하게 만든다.
그 다음부터 외적인 성공에 더 높은 목표를 두고, 거기에 몰두하게 된다.
외적인 성공, 업적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갈채와 존경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면적인 불, 비전, 사랑은 점점 식어져 간다.
그것은 남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칭송도 크게 못 받는 것이니... 개의치 않는다.
대중들은 그저 큰 건축, 대중 집회, 이런 가시적 성과에 더욱 환호를 보낸다.
결국 사역은 본질을 잃고, 규모는 커졌으나, 내면이 약한 결과를 가져온다.
여전히 눈 먼 대중들은 그에게 환호할지 모르나, 본질에서는 점점 멀어져 간다.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외적 사역)만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내면적 신앙)과 충돌하는 것은 없다.
라고 헨리 나우웬이 갈파한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을 그가 꿰뚫어 본 것이다.
▲특히 주변에 모여 든 사람들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시자들보다는,
그들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일 수가 아주 많다.
그들은 창시자를 존경하고, 섬기며, 예우를 갖추어 대접한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그 단체에서 측근으로서 갖는, 권리와 특권을 누린다.
창시자와 측근들은 상생相生적으로, 이런 권리와 특권을 나눠가질 수 있다.
▲물려줄 신앙/정신유산이 대단히 중요하다.
진정한 측근과 제자는,
창시자의 불, 비전, 사랑, 정신자원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재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분야에서 창시자도 별로 물려줄 것이 없고,
측근과 제자도, 창시자로부터 별로 물려받을 것이 없다면... 실패하는 것이다.
결국 서로 물려주고 받는 것이 ‘건물, 재정 등 외적인 자산’만 될 때,
그 다음 세대에서 소멸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아닌가!
그래서 ‘제자양육’의 결과는, 다음 세대인 제자 세대에서 판명 나게 된다.
진짜 여호수아 같은 뛰어난 제자가 나오면... 그는 모세 같은 훌륭한 스승이었고,
그 다음 세대에 사역이 점점 소멸된다면... 그는 평범한 스승이었다고 평가 받는다.
‘외형적 자산’만 물려받은 제자는... 얼마 못가서 허덕이게 되고,
일세대가 이룬 큰 외형적 업적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글의 주제는, 외형적 결과에 너무 연련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했고, (↔외모)
무한하신 우주를 가지신 전능자께는, 사실 인간의 업적이란 그게 그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형, 성취, 가시적 업적을 본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거기에 유혹을 받아, 뭔가 보여주려고 한다.
내 역량을, 가시적 업적인 <건축, 재정, 숫자> 등으로 자꾸 나타내려 한다.
그래서 <‘사역’이 도리어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앞서 나우웬이 지적했고,
<성공 같은 실패는 없다>는 말이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자기 혼자 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인데,
온 성도를 어떤 외형적, 가시적 프로젝트에 끊임없이 드라이브(몰고)해 간다.
그 행사에 열심 내는 사람은 ‘참 신자’, 아니면 ‘나이롱 신자’...
이런 분위기는 사회 전반적으로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위화감 느끼는 그 사람도 문제지만, 그것을 제공한 측도 다소 책임이 있다.
더욱이 시대조류가 ‘외형적 성공, 가시적 성과’를 중요시 하는 문화 가운데서
거기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 과정process, 이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깨닫지도 못하고 떠내려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현상을 정직하게 지적한 저자 달라스 윌라드는 용감한 선지자이다.
▲자존심을 내려 놓으시라! (달라스 윌라드의 권고)
기독교 사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 자기 개인 소유 사업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열심히 봉사하되, 자기가 무한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즉 그 사역 아래 숨어 있는, 자기 야심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저자 윌라드 교수는 ‘자존심을 내려놓아라!’고 권고한다.
구역장을 하더라도, 내 자존심이 있으니까, 몇 명은 끌어 모아야 한다는 그 자존심!
내 나이가 몇 살이고, 내 경력이 이러하니, 이 정도 규모는 해야 한다는 그 자존심!
사람들이 외적으로 자꾸 나타내려는 이유가,
<자기 자존심> 구기지 않으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내면적 신앙, 정신자원은 다음 세대로 계속 승계된다.
그래서 외적인 사역 규모가 작아서 비록 자기 자존심을 구기더라도,
내적인 불, 영혼 사랑, 비전, 열정 - 이런 것들을 목표로 삼아라고 권한다.
결국 내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은- 불, 사랑, 인격, 비전, 열정 등 내면적인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역하셨다.
그래서 그 분의 사역은 다음 세대로, 다음 세대로 계속 지속되었다.
적어도 3세기 말까지는(콘스탄틴 대제 이전) 그렇게 계속 지속된 것이다...
저자는 매너리즘에 빠져서 쇠퇴해 가는 기독교의 근본 원인과 처방을
나름대로 뛰어난 관찰과 혜안으로 정직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조금 듣기 싫은 부분도 많지만,
이런 내용을 다 배운 다음 세대들은,
아예 처음부터 올바른 방향을 잡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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