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자가 울부짖는다 암1:1-2:16 출처, 편역 中文
Jason Tarn 2/3/2013
▲1.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아모스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1.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은 ‘주님의 사랑, 은혜, 용서, 크신 긍휼’ 같은 말들입니다.
물론 그 말은 진리요, 맞습니다만, 다만 우리가 성경적 균형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또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잘못된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오해란,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하시고, 사랑과 긍휼이 크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 신자들이 조금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죄의 심판, 형벌로부터 면제해 주실 것>이라는.. 그런 무사안일한 생각입니다.
또는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시는데,
뭐 그리 풀이 죽어 사느냐 하면서, 죄를 짓고도 뭔가 뻔뻔스럽게 살아감으로써..
세상 사람들로부터,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습니다.
2. 그리고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未신자들과 크게 다르게 사는 면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정이 깨어지는 비율이라든지,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살아보기도 하고, 그러다 헤어지기도 합니다.
또 미국인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 준 일부 금융 재벌들을 우리가 비난하지만,
어쩌면 미국시민 자신들이, 물질적 탐욕에 빠져서, 급속히 부유해 지겠다는 마음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같은, 고위험을 감수하고, 고수익 채권에 투자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신자, 미신자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교회의 번영신학이, 그런 고위험 투자를 간접적으로 부추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제 주장은, 우리가 아모스서 설교를 들을 때,
이걸 남의 얘기로 듣지 말고, 즉 세상 사람들 얘기로 듣지 말고,
우리 크리스천들의 얘기요, 바로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모든 예언서가 다 그렇지만, 아모스서도 ‘종교적 위선’에 대해서 강력히 설교합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름 남들 보기에 훌륭한 신자임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엄청난 위선적인 죄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그것이 죄인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종교적 위선.. 그게 어쩌면 나의 얘기도 될 수 있습니다.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신자’라고 믿고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내가 어쩌면 그 종교적 위선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알콜 중독과 술주정에 대해서 강하게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나란히 앉은 아주머니 둘은 ‘아멘, 댓즈 라잇’하며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이어서 ‘가십’하는 죄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오늘 설교는 조금 지겹군, 잔소리가 많네’
하면서,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이런 똑같은 ‘종교적 위선’을, 오늘날 내가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 아모스서의 예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성난 사자 같으신 면도 있으십니다.
제 Tarn 목사가, 아모스서를 앞으로 몇 차례 나눠서 설교할 터인데,
전체적으로 흐르는 부제(副題)를 한 가지 정한다면,
그것은 ‘성난 사자가 부르짖는다’입니다.
①아모스서 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시온에서 (사자처럼) 부르짖으시고,
예루살렘에서 (성난) 음성을 발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에 ‘사자’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3:4절과 연결지어 보면,
1:2절은 사자의 부르짖음입니다.
② 3:4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지요.
‘저가 먹이를 잡지 않았는데, 숲 속에서 부르짖겠느냐?
젊은 사자가 움켜잡은 것이 없는데, 굴 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여기 나오는 사자는, ‘길들여진, 온순한, 애완동물 같은 사자’가 당연히 아닙니다.
무서운 사자, 두려운 사자, 야생의 사자입니다.
③ 3:8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누가 겁내지 않겠느냐?’
보십시오. 사자가 지금 졸려서, 하품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심판주 하나님)가 당장 잡아먹을 듯이 덤비는 태세입니다.
④ 3:12절에 더욱 명확히 나옵니다.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 하나를 건져내듯이,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도 구출되기는 하지만
침대 모서리와 안락의자의 다리 조각만 겨우 남는 것과 같을 것이다.’
포악한 사자의 밥이 되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위 4구절에서 살펴본 바, <하나님은 포효하는 사자>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 신자들은, 하나님을 집안의 졸린 고양이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친 백성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공격이나 하실까?’
‘이방인에게는 포효하는 사자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잖아요?’
그래서 실제적으로, 오늘날 신자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포효하는 사자보다는, 졸린 고양이 이미지를 갖고 있고,
죄를 엄중히 심판하시는 하나님 보다는, 어떤 죄라도 기꺼이 용서하시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런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게 된 이유를 들자면,
교회에서 그렇게 편향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고, (선지자가 실종된 면도 있고)
자기 자신도, 아모스서나, 다른 예언서를 주의 깊게 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복 주시는 하나님’ 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이미지가 훨씬 더 많이 나타나는데,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편향적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편향적 이미지를 갖고 있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잘 길들여진 집안 고양이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그 분이 무섭게 사자처럼 포효하며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아모스의 예언을 무시했던 북왕국은
약 20년이 지나서, 베가 왕 때부터 앗수르에게 침입을 당하기 시작해서,
약 40년이 지나서, 호세아 왕 때, 앗수르에게 완전히 패망하고, 사슬에 결박을 당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무섭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자처럼 심판하신 것입니다.
▲3. 정말 평안한 때에.. 아모스가 심판의 예언을 발합니다.
그런데 아모스의 예언이, 더 먹히지 않았던, 어떤 시대적 상황이 있었습니다.
1:1절에 나타난 바, 그 때는 남유다는 웃시야 왕 때요,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있었지만,
북이스라엘도 상당한 국력을 갖추고 있었고,
또 경제적으로도, 솔로몬 이후 가장 풍요로운 때를 살고 잇었으므로
‘하나님이 복 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아모스의 예언처럼 ‘너희는 종교적 위선자들이다.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시려고, 사자처럼 포효하신다’
이런 예언들은, 정말 코웃음 칠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북왕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고,
북쪽으로 영토와 영향력을 점점 확대해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이렇게 강하게 된 결과인데,
아모스가 뭐라고 예언을 하니까.. 정말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모스가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대비하라고 예언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나라들이나 심판을 받을 줄 알았지,
하나님의 친 백성인 자기들이, 여호와의 날에, 심판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받을 줄로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에게부터 임합니다.
▲4. 하나님은, 이방을 심판하시지만, 자기 친 백성도 심판하십니다.
아모스서는 주변 7개 국가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암1~2장
아모스의 예언을 듣던 북왕국 사람들은, 처음에 환호하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대적 7개국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먼저)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수리아(아람),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성난 사자가, 그들 이방 나라들을, 먼저 심판하려는 듯이 울부짖습니다.
그리고 그 아모스의 심판의 예언은, 여섯 나라를 지나서 1:3~2:3
남유다에게까지 미칩니다. 2:4~2:16
그러니까 북왕국 사람들은 더 기뻐하며 환호했을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심리죠. 이웃사촌 남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니까,
(이방이 심판 받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3:1절에서, 북왕국은 충격을 받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이 돌고 돌아서, 결론적으로 북왕국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암3:9~10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실 직전까지의 7개국에 대한 예언은, 어떤 ‘예고편’에 불과했고,
아모스가 정말 겨냥하였던 예언/심판의 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들, 즉 북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과 하나님은, 항상 불신자들, 未신자들, 세상 사람들을 향해 책망하시는 것 같은데,
가만히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까, 신자들에 대해 책망하고 있고
다름 아닌 나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산상수훈 등 복음서, 또한 바울서신, 그 외 공동서신도 마찬가지고,
계시록의 7교회에 대한 서신도 마찬가지고
구약의 모든 예언서도 주로.. 신자들에 대해서 경고/책망/예언합니다.
세상 불신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지만, 그것은 비율로 보면 아주 턱없이 낮습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있느 교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세상 죄인들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신자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지금 북왕국 신자들이, 당황했던 것입니다.
앞에 7개국에 대한 심판 예언이 주욱 나오니까, 얼씨구 하고 좋아라 하다가,
3:9절부터, 아모스의 본론이, 북왕국 자기들에 대한 심판 / 예언인줄 알고
완전히 당황했던 것입니다.
바로 신자로 자처하고 있던, 신앙생활을 제법 잘 하고 있다고 하던 자신들을 향해
예언자가 심판의 예언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모스서의 중요한 주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갑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고, 열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며, 신자라고 봐 주지 않으십니다.
만약 봐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에 위배됩니다.
더욱이 내가 뭐 멏 대째 신자고, 내 직분이 뭐고, 내가 교회를 지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좀 봐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아예 접으라는 것입니다.
비단 아모스서 뿐만 아니고, 이것은 성경의 일관적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다. 정의롭고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세상 불신자보다) 오히려 더 크게 받습니다.
잘 믿는 사람일수록, 주님께 크게 얻어 맞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를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
더 큰 심판을 주어서, 그를 회개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이 확정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려두십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냥 버려두십니다. 그런 사람은 지옥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5.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봉’이 아닙니다.
내 멋대로 부릴 수 있는 애완동물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사자’의 이미지를 계속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1:2, 3:4, 8, 12.
오늘날 ‘스포일’된 신자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신자들에게 아모스는 경고합니다.
‘회개하고 돌이켜라.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이 사자처럼 너를 덮치실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습니다.
1:3절에, ‘다메섹(아람)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이스라엘 국경도시)을 압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무자비함, 그들의 압제, 그들의 비인간성 때문에
하나님은 다메섹(아람)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모스서의 뒤에 나오지만
이스라엘도, 자기 국민들 가운데 약자에게, 똑같은 무자비함과 압박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행악하는 이방만 심판하시라’고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로 볼 때,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 똑같이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방처럼 똑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더 이상 계속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알아들으시기 바랍니다.
▲6. 암1~2장에 ‘서너 가지 죄로 인해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반복되는데,
이 말씀은 ‘고작 서너 가지 죄만 지어도 심판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 가지 죄와 네 가지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서, 특히 합하면 7로서 완전수입니다.
그들의 죄가 완전히 채워졌다.. 는 뜻이 되겠습니다.
창15:16절에는, 그들의 죄가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암2:1, 4, 6절 등에 ‘서너 가지의 죄’란,
그들의 죄가 완전히 채워졌다. 7을 채웠다. 그래서 이제는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처음에는 돌이키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업신여기고, 계속 죄를 채운다면, 계속 쌓는다면,
결국은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댐의 물이, 가득 찰 때까지는 댐이 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댐이 터져 버리는데.. 그때는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그의 사랑과 인자는 영원무궁 하십니다. 창34:6 등
그러나 개인이나 나라가 심판을 받을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분량을 채웠을 때.. 비로소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서 반드시 ‘경고’하십니다.
마지막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요나와 니느웨가 그 예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그들의 눈과 귀가 가리워지고,
양심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과 그 경고를 무시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심판을 받을 때는.. 변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망도 못 합니다.
단지 운이 좋은 사람(하나님의 자녀)들은, 작은 잘못을 지어도, 작은 심판을 받고,
그래서 큰 심판을 면하고,
미신자들은, 심판을 즉시 안 받는 것 같지만, 나중에 큰 심판을 받습니다.
어쩌면 영벌에서 돌이키지 못하게 되는.. 그런 최후의 심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어쩌면 살아 생전에, 작은 심판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은, 최후의 심판, 영벌을 면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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