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남은 고난 채우기

LNCK 2014. 2. 2. 17:19

https://www.youtube.com/watch?v=Jo2y32URY94 

◈남은 고난 채우기             골1:24, 히2:10                     십자가 시리즈 21회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 '남은 고난'을 기뻐한 바울사도 - 그 후의 열매를 바라보니까.

 

▶위 말씀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적에 ‘다 이루었다’하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완전한 것입니다.

 

그게 뭐 98%의 고난을 받으시고, 2%가 남겨져서

우리가 그 남은 2%의 고난을 받는다.. 그런 뜻이 아니고요,

 

여기서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러니까 ‘교회를 위한 고난은 아직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구속사역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은

교회가 존재하는 그날까지, 즉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바울처럼, 그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로 감당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골1:24a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라고 그랬습니다.

 

즉 <교회를 위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인데,

그것을 사도바울은 기뻐한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눈을 씻고 다시 보십시오. 기뻐한다니요. 기뻐할게 따로 있지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그 분의 몸된 교회도.. 사랑했고..

사랑하니까.. 그 교회를 위해 당하는 고난도.. 기뻐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기쁨이 없는 것은,

사실은 사랑이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대부분 십자가를 피해서 가려고 합니다.

왜요?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 몸된 교회를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기뻐한다'고 한 것은, 십자가 고난이 기쁘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 이후의, 맺어질 열매를 바라보니까.. 십자가 고난 중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기쁘게 내다보았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고난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기 때문이에요.

무슨 열매입니까? 영혼구원의 열매/ 제자양육의 열매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이죠. 그 자체가 즐겁다는 것은 아니고요,

그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생길 열매를 바라보니까.. 즐겁게 감당할 마음이 생기는 거죠.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한국교회가, 이때까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을 것인가..

그 싸움을 해야 되는데, 그 싸움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얼마나 축복을 받을 것인가..’ 그 싸움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방향을 잘못 잡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허송세월을 낭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네 등에 복보따리를 가득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 입니까?

‘나를 따라가면, 너희가 보물섬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 고난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즉 ‘교회를 위한 고난’도 반드시 매 시대마다 있습니다.

 

    우리가운데 이 고난을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주님께서 강권해서 고난의 잔을 마시도록, 그 고난을 피하지 못하도록

    성도를 인도해 가시기도 하시고,

 

    또 성도 각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적에

    그 은혜에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자기가 자원해서 고난의 길을 가기도 하는데요.

 

어쨌거나 No cross No crown, No crown No cross 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영광도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열매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아무런 열매도 없으면

즉 영혼 구원을 거의 시키지 못하거나, 영적인 제자양육을 전혀 하지 못하면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왜 그렇다고요?

그의 일생에.. 십자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뭐 좋은 차를 타고, 비싼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일은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든지/말든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을 살적에

정말 난 이제 10년을 돌아볼 적에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았던 사람만

‘아 나는 후회 없이 내 인생을 살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가 감당하며, 자기 삶 속에 채우며 살았던 바로 그 사람만이

    후회 없는 삶, 값진 삶, 정말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남은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신기하게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 그랬습니다. 골1:24

기쁜 마음으로 그 고난을 자기 몸에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떻게 믿어야, 그 수준에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아 고난 없이 되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내가 정말 뭔가 후회 없는 삶을 살고,

내가 뭔가 골로새 교인들의 영적인 결실을 기대할 때

그 과정에 십자가와 그 고난은 반드시 필수적인 거구나..’

 

그래서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당할 적에

사도바울은 속으로 빙긋이 웃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 이제 반드시 골로새교회에는 열매들이 나타나겠구나.’

그걸 볼 줄 아는 영적인 안목이 있으니까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물론 모든 교회를 위하여,

당하는 그 괴로움을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 채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 고난을 받을 때.. 성도의 온전함이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물이 위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비슷한 말씀이 히브리서 5장 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이 구절들을 언뜻 보면, ‘주님은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었다’ 라는 식으로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었다.’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 라고 할 때,

뭔가 예수님이 약간 불완정한 것이 있으셨는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예수님이 순종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래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원래 완벽하게 순종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온전하심이 언제 잘 드러나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온전하심이/ 순종하심이.. 더 완벽하게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순종하시고 한 번도 불순종한 일이 없으시지만

그 예수님의 순종하심이 언제 가장 잘 드러나느냐..

예수님이 그 고난의 십자가에 순종하실 적에,

그 예수님의 순종하심이 더 확실하고 완벽하게 잘 드러났다..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으므로써 법적으로 의롭게 된 자녀이지만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 됨/ 아들 됨/ 그 의로운 성도됨이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십자가는,

의인의 의인됨을 드러내고, 성도의 성도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자녀의 하나님 자녀 됨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요,

 

이 세상에서 교회의 영광이 무엇이며, 성도의 영광이 무엇이며,

정말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무엇인지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고난을 통과할 때”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존경하는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목사님, 문준경 전도사님

그 외 여러 순교자들과 옥중 성도님들이 계시는데요.

 

그 분들이 원래 신앙이 좋으신 분들입니다.

원래 신앙이 좋으신 분들이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뽑아서 그 길을 가게 하신 것이죠.

 

그런데 그 분들이 원래 신앙이 좋으신 분이셨는데,

그 분들의 그 신앙의 온전함, 그 영적인 하나님의 형상,

그것이 언제 가장 잘 드러났는가 하면..

 

그 분들이 옥중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또 순교를 당하실 적에,

그것이 가장 아름답게 잘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라도 하나님께서 고난을 성도에게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요,

그가 고난을 당하므로 말미암아.. 자기의 사명을 가장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3. 고난을 받을 때..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께 가장 큰 사명이었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많이 해도, 예수님이 만약 십자가 한 가지를 불순종하셨다면

그건 98점이 아니라.. 0점이죠.

(점수로 예를 들어 죄송합니다만, 어쨌든 알기 쉽게 하기 위해 그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무리 다 이렇게 다른 면에 다 잘해도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그 십자가, 그 고난의 길,

그걸 마다하고 다른 것 아무리 많이 순종해봐야..

98점이 아니라, 0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 또 바라시는 그 열매는

성도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에서 열매를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됨의 그 온전함과, 그 고상함과, 그 존귀함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그렇게 증거witness하고, 전도testimony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무슨 밍크코트를 입고 다니고, 로스로이스를 타고 다닌다고

그게 성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선교사는 이렇게 말해요.

‘에이 그래도 선교사가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좋고 큰 집에 살고 이래야.. 선교가 되지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무 가난하게 살면, 선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지인들이, 가난한 선교사를 보고.. 뭘 보고 배우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여기 국내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좀 출세도 하고 부자로 살아야,

세상 사람들에게 좀 체면이 서고, 남들 보기에도

예수 믿었더니 역시 잘되는 거보니까, 우리도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전도가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게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와 자기 자녀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나타내기 원하시는 영광

그런 세상 영광이 아니요,

그건 예수 안 믿어도, 불교 믿어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세상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 각자를 통해서 보여주시기 원하시는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이요,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발산되어지는, 그러한 아름다움과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고 히브리서 11장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더라.’ 라며 기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니까, 딱 질려버리는 (좋은 의미로) 것이에요.

 

그가 뭐 롤스로이스를 타고, BMW를 탔다고 질리는 게 아니라,

무수한 핍박과 고난이 오는데도

꿋꿋이 자기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질려 버리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짧은 인생을 가장 의미있게 살려면..

지금부터 10년이 지나서, 10년 그거, 금방 지나가고 맙니다.

내 인생을 되돌아볼 적에, 가장 후회가 없고, 아니 보람되게 살았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 그건 ‘십자가의 길’로 살 때입니다.

 

인생이 80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기는

20년에서 ~ 길면 30년에 불과합니다.

 

봄, 최초 20년은 성장의 기간이었고,

여름, 40세까지는, 준비의 과정이고,

가을, 40대에서 60대 그 사이 20년.. 거기가 황금기 Golden period입니다.

겨울, 나머지는 마무리하는 시간이죠.

 

그 황금기를, 한 사람도 전도 못하고, 한 사람도 제자양육 못하고,

그냥 보내버리는 사람들이 아마 무수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그 사실 자체도 몰랐고, 그런 메시지도 듣지 못했고,

그런 기도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나중에 하려니까.. 자기가 늙어서.. 뭐 70살, 80살 돼서 뭘 할 수도 있습니다만,

옛날처럼 왕성하게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씀은

빌립보서 2:5~11절에 나타나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구절인데

11절에  ‘그리하여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여차여차해서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계시록 11장에도 두 증인이 나오는데

두 증인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순교로 비참하게 죽었더니 남은 자들이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그 순교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라고 계11: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비싼 차를 굴리고 뭐 밍크코트를 입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그 십자가의 길을 갈 적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도에게/ 그의 종들에게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만약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만약에 내 삶에 어떤 말 못할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사도바울처럼 기뻐해야 됩니다. 왜요?

 

이 고난을 통해 누군가가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추수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10절에도 ‘고난은 여호와의 뜻을 성취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심을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라.’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는 데는

여호와의 종이 상함을 받게 되고, 질고를 당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고, 주권적으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릴 때, 그 씨를 보게 되며..’

씨가 뭐에요? 영혼 추수가 일어난다는 거죠.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실 적에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영혼 추수, 그 너머에 있는 성도됨의 영광,

그 너머에 있는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일들을 바라보며, 기쁘게 그 길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화

어떤 미국 선교사가 네팔의 콕스부족에 가서, 19년 동안 신약성경을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 부족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면, 그 부족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네팔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안티감정이 팽배한 과정에서

그 부족사람들이 미국 선교사를 도와서 성경을 번역하는데 가담하면

다른 부족사람들이, 그 선교사 편에 선 자기 동족을, 자꾸 핍박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 가지 핍박과 어려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19년 만에 신약 성경을 다 번역한 후에

선교사는 이런 감동적인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이러이러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기간 동안에,

 

이 일과 관련해서 누군가 감옥에 수감된 날짜에다 신약성경 장수를 나누어보았더니

신약성경 한 장을 번역하는 동안, 누군가 9.3일 동안 감옥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해서 누군가 걷고 차를 타며 이동한 거리에다

번역된 신약성경장수를 나누어보니, 신약성경 한 장을 번역하는데

누군가 75km를 움직여야 했습니다.

 

75km를 걷거나, 차를 타고 움직이는 그러한 수고를 통해서

신약성경 한 장이 번역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260장(신약 전장)을 곱하면 얼마입니까?

상당한 이동거리를 오가는 수고아 고생..

또 네팔이 산악지역이라서, 다니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극심한 고난과 수고가운데서, 신약성경번역이 19년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뭐 신약성경을 번역해야하는 필요성은 다 알죠.

그래서 번역을 시작했더니.. 툭하고 신약성경이 저절로 완성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투옥을 당하고, 누군가 동족 부족인 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누군가 산을 오르락내리락 걸어 다니거나, 차를 타고 다니며 고생을 하고

온갖 희생을 한 이후에.. 비로소 신약성경이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네팔에서는 아니더라도, 오늘 우리도 누군가 이러한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누군가의 수고가 있을 적에, 그들은 기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 이런 수고가 있는 것 보니까, 장차 영혼 구원이 있겠구나.

추수와 열매가 있겠구나.’ 라는 것을 내다보며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일을

우리가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은 내용을 지킴 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