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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기

LNCK 2014. 2. 3. 13:25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기 - YouTube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기           롬6:11              십자가 시리즈 22회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십자가 복음’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는데,

오늘 주제는 <성화의 십자가, 또는 회개의 십자가> 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고 깊이 묵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를 점점 십자가에 못 박고, 더 성화된 삶을 산다.. 이런 주제가 되겠습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오해

 

신앙의 길은, 자기가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대신 걸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크게 오해하는데

장로교가 특히 ‘성도의 견인’ 이라는 신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비행기 안에서 넘어지고 자빠져도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번 택한 자녀들은, 끝까지 천국으로 무사히 데려가실 것이다.

라는 그러한 신학적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을 극단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면

굉장히 자신의 영생에 해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자유 의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지요.

그런데 이 말의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으니까 (알미니안이라 해서요)

대신에 ‘자율’이란 표현을 쓰겠습니다. 자율. 사람은 로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이란 뭐고, 그 오해는 뭐냐? 마라톤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42.195km를 힘들게 달려가는데

   그 옆에서 물도 건네주고, 부채도 부쳐주고.. 그렇게 도와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옆에서 선수와 같이 달리면서, 계속 말로 격려하고,

     확성기를 들고 더 힘내라고 이야기도 해주고, ‘지금 오르막길이야. 속도 조절해.’

     이런 식으로 옆에서 계속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지, 자전거를 타고 가던지,

     차를 타고 가면서,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그 역할이 바로 하나님 역할,

     또는 예수님이나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견인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령님이 신자를 끌어주시는 것이지,

신자가 도로에 누워있는데, 자동차에 태워서 골인 지점까지 데려다주는 식의 ‘견인’은 아닙니다.

 

'견인'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이렇습니다.

‘성도의 견인’을, 영어로는 perseverance of the saints 라고 하는데,

“perseverance”라는 말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참고 견딘다는 말이지요.

디고, 내한다는 말입니다.

 

그 주체가 누구입니까?

신자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디고, 내하는 것입니다. 견인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마라톤 선수의 코치처럼, 선수가 견인 (견디고 인내)하도록, 완주하도록

계속 옆에서 격려하고, 끌어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 마라톤 선수가 골인 지점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옆에서 계속 격려하고, 인도하고, 목표 지점을 상기시켜주고

그것이 성령님의 역할이고, 결국 마라톤은 자기가 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성도의 견인’을 오해하는 것은,

자기는 마라톤을 뛰지 않아도, 자기는 지쳐서 길바닥에 푹 자빠져있는데

그걸 성령님이 질질질 끌고 가서, 이렇게 마라톤 결승선 까지 넣어준다?

-그것은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혹시 그 사람이 중단하고 있으면, 옆에서 ‘일어나요. 일어나요’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습니다.

또 혹시 그 사람이 정신이 혼미해져서 옆길로 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계속 ‘이것은 옆길이야 돌아와, 돌아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게 ‘성도의 견인’이요, 주님이 하시는 역할이에요.

 

그러나 결국은 제 발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에요.

제 발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성령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넘어지고 자빠져도 천국에 간다.’ 라는 개념은,

그가 진정한 회심을 통해, 회개하고 예수 믿은 사람은

천국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이끌어주신다.. 는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한 두 번 실족하더라도, 크게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는, 진정한 회개가 없이, 지적동의로 예수 믿은 사람도 있어요.

그들은, 아예 비행기(구원의 방주)에 들어오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비행기’(구원의 방주)에 들어온 사람도,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지만,

결국 달리는 주체/선수/책임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쓰러진 자기를 업고 달려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견인(견디고 인내하는)의 주체는.. 선수 자신이지, 코치가 아닙니다.

코치의 역할은, 선수가 견인하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견인’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의 완성으로,

골인 지점인 천국문으로 인도 하시지만

결국에는 제 발로 뛰고, 제 발로 걸어가야 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우리 역시, 자기 정과 욕심을 "내가" 십자가에서 다 못 박는

그런 싸움을, 그런 경주를.. 계속 싸우고, 계속 달려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신자는 자율적 존재이지, 로봇이 아니거든요. 결국에는 자기가 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뭐냐?

자기 옆에서 격려해주고/ 고함 질러주고/ 길을 인도 해주고.. 이렇게 해주시는 성령님이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에요.

 

성도들은, 자기 옆에서 격려해주고/ 고함 질러주고/ 그 길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그 길을 인도, 동행해 주시는.. 어떠한 격려자, 돕는 자가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놓으신 모든 일’들을, 자기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서,

가만히 팔짱 끼고 있는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 신학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 라고 외치면서

자신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며 살지 않는 것은

(즉,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치열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이 설교자 권연경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마약과 같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표현(마약)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그 ‘마약’이라는 말은,

당장은 기분이 좋지만, 결과적으로는 기분 좋게 살다가 ‘잘못된다’는 것이지요.

 

▶은혜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내가 가만히 팔짱끼고 있어도, 무조건 우리를 천국에 데려다주는 그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 엡2:8

여기서 ‘은혜’라는 개념이 뭔가 하면

 

옆에서 격려해주고/ 옆에서 고함질러주고/ 확성기로 막 죄를 지을 적에 크게 말해주고..

그게 ‘은혜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하지만 결국 레이스 달리기는 자기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다 해 주시겠지’ .. 그건 은혜의 개념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도는, 살다보면, 끊임없이 죄의 유혹이 있고

사탄이 우리를 옆길로 인도 하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 즉 ‘옆에서 도우심’이지요.

 

그 은혜/즉 도우심을 받아서

결국 그 싸움은 자기가 제 발로 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전반적으로 가르치는 기독교의 진리인데

그러나 우리가 ‘초극단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으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만 외치다가

지금은 ‘약’기운으로 기분이 좋지만.. 나중에 이렇게 잘못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저는 그 의견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기

 

로마서 6장이 가르치는바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아간다.’ 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 그랬지요. :11

이건, 죄에 대해 굴복해라, 죄에 대해 져라.. 는 뜻이 당연히 아니고요,

죄를 이기라. 죄를 극복해라.. 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전체 문맥 가운데서 보면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죄를 이기는 삶을 산다.’라는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죄를 이기느냐?

‘죄에 대해,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는 겁니다.

 

▶신자는, 구원 받은 후에도, 죄악의 유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고

-또 내적으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적 죄성이 있어서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유혹에 노출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팔짱 끼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 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 이렇게 완벽한 성화로 나를 이끌어주시는 것이 아니고,

달리기/싸움은 ‘내가’ 해야 된다니까요.

 

-결정도 내가 해야 되고

-책임도 내가 져야 되고

-승리/실패의 책임도 내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역할은 도우시는 코치)

 

그럼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나?’

그러면 뭐 자기는 로봇이 되길 원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어떤 다른 동물이나 다른 어떠한 천사에게도 주지 않으신

고귀한 그 자율성, 인격성. 내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또 내 스스로 타락해서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그런 고귀한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어요. 시8:5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인격을 줘 놓고, 인간을 내버려두고 유기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내적으로 계속 확성기를 들고 우리 옆에서 고함치시고

같이 레이스를 달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이 결국에는

그 주님과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서

죄의 싸움에서 싸워나가는 것.. 그 주체와 책임은, 엄연히 ‘자기’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학을 오해해서, 초극단주의로 나가면

인간을 완전히 로봇처럼 만들어서

가만히 있어도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죄송하지만 그것은 마귀가 뿌린 미혹의 가라지요, ‘약’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성도의 견인 이라는 신학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이제 해외의 (독일 칼빈주의) 설교를 듣고서, 좀 교정하게 되었습니다.

 

마라톤을 제가 예를 들었지만 옆에서 막 이렇게

선수가 끝까지 목표지점까지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성도의 견인인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이 만약 안 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자기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 것이에요. 결국 달리기는 자기가 해야 되니까요.

 

▶그리고 성도의 견인을 다른 말로 하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라는 개념을 ‘거저 주는 것이다. 공짜로 받는 것’이다.

그런 개념으로만 은혜를 이해하고 있는데

 

‘은혜’라는 그 포괄적 의미 속에는, 그런 부분이 일부는 들어있을지라도,

‘은혜’라는 말의 일차적 개념은,

그 일을 하도록 옆에서 끌어주고/ 격려해주고/ 고함쳐 주고/ 도와주는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옆에서 끌어주고 고함쳐주고 해도, 자기가 안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옆에서 은혜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믿음의 선한 싸움은, 자기가 싸워야 되는 것이에요.

 

은혜라는 것이, 내가 로봇처럼 가만히 있는데

다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데려다주는 그것은

은혜라는 개념을 우리가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에서 살리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3절에서 한 번 더, ‘죽음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을 합니다.

 

즉 내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내가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갈2:20절과 똑같은 말입니다. 표현을 약간 다르게 한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음으로 다 구원해주신다.. 그것은 초극단주의입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이 바울서신 전체가 계속 말씀하고 하는 것은 뭔가 하면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야하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는데.’

 

그걸 짧게 말하면.. <성화의 삶은 사는 것>입니다.

 

참고로, ‘성화도,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셨다’는 주장이 있는데, 고전1:30

그건, 성경과 신학을 일면만 보는 것입니다.

 

마라톤을 예로 들면,

‘골인 지점까지 가도록, 길을 열어 놓으시고, 쉽게 갈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수 대신 직접 뛰어주신다고 믿는 것은.. 초극단적(잘못된)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긴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내가 죄를 이기고자, 치열하게 성화를 위해 싸운다’는 뜻이지요.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고, 마음으로 믿고만 있으면.. 저절로 성화가 다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으니까, 그 못 박혔다는 사실을 믿는 도우심으로)

내가 치열한 성화의 싸움을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과,

그걸 안 믿는 사람과의 차이가 뭔가요?

 

1)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롬6:2절.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다.. 라는 사실을

내 마음에 믿고/ 내 마음에 생각하고/ 내 마음에 묵상하고/ 내 마음에 되뇌고,

 

이렇게 하는 것은.. 은혜(도우심)를 많이 받는 것이지요.

 

2) 그 성화의 싸움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또 자기의 본성도 이미 변화되었으니까요. 새 창조가 일어났으니까요.

 

그런 생각,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생각 전혀 없이,

‘내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 라는 생각 전혀 없이  1)

또는 자기 내적 신분의 변화가 전혀 없이           2)

  

성화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은,

아주 힘들게 싸우는 것이고,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으며, 내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다.’ 라고

여기며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그래도 그 성화의 싸움을 조금 쉽게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자기 스스로 자율이라고 그랬습니다. 자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율의 성품을 갖고 싸우지 않고, 내팽개쳐 놓는다면

괜히 이렇게 ‘약’을 맞은 것과 같이, 기분 좋게 살다가

결과가 나중에는 굉장히 안 좋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라.’

이것이 이 설교의 주제이지요. 로마서 6:2절과 또 11절에 나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라’

그 어떤 죄악의 유혹이 올 적에

자기 마음이 ‘아 내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

더 줄여서 말하면 ‘나는 죽었다.’ 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실제로 고부간의 갈등이 있어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대해서 크게 시험이 들 때가 있고

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서 크게 시험이 들어서

각자의 입장에서 욕이 나오고, 고성이 오고 가며,

심지어는 어떤 물리적인 행동까지 나올 때가 있는데

 

그 직전에 로마서 6장 11절, 또는 2절을 자기 속으로 암송하고 되뇌이는 것입니다.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다.’

아니면 갈2:20절. ‘나 아무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사람은 첫째로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다니까요.

죽은 사람이 힘이 없는데 무슨 고성을 지를 수 있으며

무슨 물리적인 어떠한 행동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동료간에 갈등, 또 직장 상사로 부터의 부당한 꾸지람,

이런 것을 받을 적에,

우리 인간적인 어떤 혈기와 육정은, 그냥 사표 던지고 나가버리던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의자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이러한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에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라는 말씀을 속에서 되뇌일 적에.. 제가 서두에서 마라톤이 예로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자동적으로 다 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결정은 자기가 내려야 되고,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에요.

달리기는 선수인 자기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율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 자율성, 자기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에요.

      이건 신적인 능력에 버금가는 능력이고, 동물이나 천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시8:5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어떤 성화의 단계를 점점 더 밟아서 천국까지 가는 그것이

      주님의 뜻인 것입니다.

      치열한 성화의 싸움을 싸우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 말입니다.

 

 

◑요일3:2절의 해석

 

요한1서 3:2절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when he shall appear, we shall be like him; for we shall see him as he is

 

많은 사람들이 위 구절을 이렇게 믿고 있는데요,

‘우리가 이렇게 세상에 살 동안에 제 멋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래서 이제 천국에서 눈을 뜨면, 또는 부활 때가 되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부활해서, 예수님을 완전히 본받은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싸워야 하는 성화의 싸움을, 다 이렇게 면제시켜버립니다.

가만히 있어도.. 뭐 힘들게 성화 안 해도,

내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면,

내가 그리스도와 같이 변해 있을 것인데..

 

뭐 하려고 힘들게, 이 세상에서 성화의 싸움을 하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특히 장로교인 가운데 대세인데요.

 

그런데 위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처럼 우리가 변화된다’는 말씀은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죽는 육체를 갖고 있는데,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부활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유한한 육체를 갖고 있다가, 나중에 천국에서 영원한 부활체가 된다.>

그러한 뜻입니다. 즉 '육체의 변화'입니다.

 

거기에 ‘성품의 변화까지 자동으로 예수님처럼 닮게 된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저는 성경을 확대 해석한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appear 하시면..’ 요일3:2

이 말씀은, 예수님이 mortal body가 아니라, 임모탈 바디로 나타나신 것,

즉 예수님이 영원한 부활체로 나타나신 것이고, 우리도 그런 영원한 부활체를 입게 된다는 뜻이지요.

즉 육신적 변화이지.. '인격까지'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화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로마서 6장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우리 성도에게 성화를 요구하고 있고,

예수님도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48

 

죽고나면.. 다 자동적으로 예수님 인격으로 변화된다면

뭐.. 성화의 말씀이.. 성경에 나올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를 믿은 이후로,

‘자기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며’ 롬6:11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여기면서’ 갈2:20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는, 그 어려운 성화의 삶을 우리에게 요구 하실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성화되지 않고서, 내가 가진 인격 그대로 천국에 갔다고.. 가정하면

거기가 천국이 안 되는 것이지요. 거기가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계속 고함지르고, 싸우고, 화내고, 거짓말하고,

이간질 시키고, 또 당 짓고, 또 흘기는 눈과, 야릇한 눈빛과..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진 인격 그대로,

전혀 변화되지 않고서 천국에 갔을 경우에는,

거기는 천국이 아니라, 아수라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아예 천국에 입장을 시키지 않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들어와서, 천국이 아수라장이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신앙 안에서, 영적으로 성화되고 성숙된 그 사람을

주님께서 구원의 완성으로 이루어, 천국에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돈 많이 버는 부자가 중요 하겠지만, 

      천국은 온 길 바닥이 황금 길이라고요.

 

      중요한 것은, 우리 성품이 온전하고 성숙하게 되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그리스도를 본 받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요.

 

 

◑같은 주제 반복입니다.

 

▶로마서 6장 4절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예수님과 함께 장사 되었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갈2:20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그랬지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장사 된거야’ 라고 믿는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기는 자기가 해야 되는 것이에요. 레이스는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대신 삶을 살아주고, 누가 내 대신..

내가 쓰러져서 달리지 못 하거나, 옆길로 가서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데

 

우리 아버지가 내 대신 뛰어서 결승선에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합격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 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늘 되뇌이고 믿으면서

내가 뭐 인터넷 중독이라든지, 또는 TV중독이라든지,

이러한 유혹 앞에 맞딱드려졌을 적에

자기 속으로 계속 그 말씀을 되뇌이는 것이지요.

 

‘그렇지, 내가 죽었어. 나는 죽었어.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몸이야.’

이렇게 되뇌는 것이, 우리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롬6:2, 4, 11절 말씀을 그저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는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고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할 적에는.. 구원의 완성도 이루지 못하여

결국 내 죄성을 고스란히 그대로 갖고서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로마서 7:2절에서 바울은 또 하나의 비유를 드는데

남편과 사별한 여자의 비유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메인바 되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예를 들어, 전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 재혼했는데

전 남편이 만나자고 전화하면, 절대로 나가서 만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전화가 온다면, 자기 전화번호를 바꾸던지, 이사를 가던지..

아니 새롭게 재혼한 사람이, 자기 가정에 충실해야지요. 예를 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에요.

전 남편인 마귀와는, 청산이 법적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믿고, 그냥 로봇처럼 팔짱끼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실을 믿고서, 내가 성화의 삶을 내 몸으로써 살아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발로 그 길을 걸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사람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자부심이 자기 성화의 삶을 사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상당한 도움을 준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휴일 날에 학생들이 하루 종일

신나고 요란하게 파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학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일상으로 되돌아갔습니다.

2차, 3차 외박도 나가지 않고, 밤이 되니까, 다 도서관에 있던지, 자기 기숙사에 있던지

다시 공부로 돌아가더라.. 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낮에 막 파티하고 축제하고 놀았으면

저녁에는 뭐 2차, 3차 이렇게 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보니까, 학생들 사이에 ‘우리에겐 프린스턴 스피릿이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프린스턴 학생이니까. 내가 이렇게 마구 놀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프린스턴 학생이니까 조금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예를 든 것은, 신분의 변화, 법적인 변화의 예를 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람은

‘나는 죄에 대해서는 전 남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새 남편이다.’

이런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은 자기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까 옛 사람처럼 살 수 없다.’ 라는

어떤 긍정적인 자기 어떠한 자화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고 살 적에, 어떠한 자기 행위가 뒤 따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행위가 뒤 따르는 것을 6장 11~13절에 계속해서 바울은 설명하고 있는데

 

‘이제는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또는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우리 성도들 가운데에 특히 초극단주의적 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자율성이 없어요.

 

저는 그것을 ‘마귀의 미혹’이라고 보는데

그래서 이 설교를 하신 권목사님은 ‘그런 신앙은 마치 마약과 같은 것이다.

기분 좋게 살다가 나중에 잘못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비행기 안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다 해주실 것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해주신다는 것은

옆에서 달리기 하는 선수/신자를 보고,

곁에서 코치가 격려해주고, 고함 질러주고, 수건이나 부채로 막 부쳐주고,

물 가져다주고 ‘뛰어라, 달려라’ 이렇게 도와주지만

결국 달리기는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리기를 하는데 있어서 한 가지 도움이 되는 것이

‘내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달리는 사람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달리는 사람하고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