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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LNCK 2014. 2. 3. 14:30

(5)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 김영준 목사 YouTube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시편16:8-11             13.12.08설교스크랩

 

◑인생은, 규칙대로/ 교과서대로 되지 않습니다.

 

▶요즘엔 태권도도 아니고 합기도도 아니고 격투기가 유행입니다.

만일 누가 호신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저는 격투기가 가장 강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강도와 싸움이 붙었다고 할 때,

누가 태권도나 유도의 규칙대로 싸울 것 같습니까?

 

실제로 사람들이 싸울 때에는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고

그냥 길바닥에 뒹굴어 씨름을 합니다.

도장에서 배운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옛날에 한번은 신문을 보니까, 어떤 태권도장 사범이 하얀 띠 학생과 대련을 하다가

복부를 발로 맞고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범님이 처음 시작하는 학생에게, 복부를 얻어맞고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실제 인생의 현실에는 어떤 규칙이나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생의 시련은 반칙으로 다가옵니다.

‘이건 반칙이다’라고 항의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그리지 않았습니까?

영화 초반에 미군병사들을 태운 상륙정이 노르망디 해안을 향해 다가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의 작전계획은 상륙정이 해안에 도착하면

상륙정의 문을 열고 병사들이 차례대로 질서 있게 상륙정에서 하차하여

해안선을 향해 진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륙정의 문을 열자마자, 적군의 총알이 빗발처럼 날아오기 시작해서

병사들이 상륙정을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전사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작전계획은 처음부터 빗나갑니다.

 

그래서 병사들이 어떻게 합니까?

상륙정 앞문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옆의 난간을 넘어서 물속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총은 다 빠뜨리고, 겨우 젖은 몸만 물에서 빠져 나오는데,

스타일이 구기지만 살려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적군은 내가 내 계획대로 전투를 수행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작하는 순간부터, 내 계획을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도 이수하고,

일대일 양육도 받고, 직분도 받고, 봉사도 하고, 성경통독도 하고,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고 우리의 믿음을 반영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내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내가 믿음으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

믿음이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은.. 결국 시련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믿음의 시련은 혹독하게 다가옵니다.

믿음의 시련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믿음 자체를 위협합니다.

‘너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하나님이 정말 계시느냐?

네 기도가 과연 소용이 있느냐? 그만 두는 게 낫지 아니하냐?’ 본질적인 것을 흔듭니다.

 

욥이 시련을 당할 때 그의 아내가 한 말이 핵심을 찌르는 말이에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시련의 본질이에요.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믿을 것이냐 포기할 것이냐, 적나라한 상황입니다.

 

이럴 때는 우리의 계급장이 소용없습니다.

목사라고 봐주는 것도 아니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직분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흙탕에 뒹구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시련이 규칙대로 질서정연하게, 교실에서 배운 대로 다가온다면

이기지 못할 사람이 없지만.. 배우지 않은 방법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우아하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주일날 깨끗한 옷을 입고, 가족들과 차를 타고 오순도순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뭘 모르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인은 화장 하지 않은 생얼굴과, 제대로 빗지 않은 머리 모양 그대로

아무 옷이나 입고 새벽기도회에 와서 부르짖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세상에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진짜 신앙인은 조리 있게 또박또박 기도 하지 않아요.

진짜 신앙인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도와주세요.’

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기도를 잘 한다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잘 하는 기도에요.

 

▶우리는 예측 가능한 삶을 선호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도

신앙이 우리의 삶을 예측 가능하고 안전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돈도 더 잘 벌고, 애들도 공부를 더 잘 하고, 가족도 더 평탄하고.

그것이 대부분의 성도들의 기도제목입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그런 목적이 더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상당히 부르주아적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은 학원(투자-얻음?)에 다니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계획을 송두리째 바꾸신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성도들은 경악할 것입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앙훈련 제1호는 우리의 첫 계획부터 빗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과 같습니다. 첫 순간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럼 계획은 불필요하다는 얘기냐? 계획을 짜지 말라는 얘기냐?

여기에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첫째는 어차피 우리의 대부분의 계획은 별 볼일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무시하시는 게 오히려 다행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당신의 계획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래 생각했던 것과 멀리 떨어진 곳에 우리를 데려다 놓으시고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래서 지시한 땅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땅에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까? 기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첫 발걸음부터 혼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이곳으로 가라해서 갔는데,

그 땅에서 환영해주고 환영파티를 열어주고 이래야 되는데

가보니까 그 땅에 기근이 있더라...

첫 순간부터 아브라함은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나? 하나님이 정말로 계시나?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닌가? 흔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실 때가 많아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기고 영웅이 되어 돌아올 때

돌아오는 퍼레이드에서 벌써 사울 왕이 다윗을 두려워하고 시기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창을 던지지 않습니까?

 

다윗은 흔들렸을 것입니다. 분명히 사무엘 선지자가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었는데

내가 분명히 믿음으로 골리앗과 싸워 이겼는데,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인가?

내가 잘못알고 있었나? 내가 착각하고 있었나? ..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앙훈련 제1번은, 우리의 첫 계획부터 빗나가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이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학술적인 것이 아니고, 어떤 인생의 교양이 아니고

 

우리가 인생의 모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붙들고 신뢰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신앙의 훈련은 고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생의 시련이 그만큼 잔혹하기 때문입니다.

 

 

◑변칙적인 인생을 만나면.. 그냥 적응하세요.

 

▶노르망디 작전을 다룬 또 다른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상최대의 작전>이라고,

그 영화는 좀 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에 루스벨트의 아들 루스벨트2세가 원스타 장군으로 나옵니다.

 

그가 상륙정을 타고 1차로 노르망디 지역의 어느 해안에 상륙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상륙한 곳은, 원래 계획했던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엉뚱한 곳이었어요.

 

부관들이 염려합니다. ‘뒤따라오는 부대가 원래 계획한 곳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루스벨트 장군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그들도 이곳으로 올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We will start the war here.’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이것은 실화입니다. 상륙정 조종사가 잘못해서 우리를 엉뚱한 데에 떨어뜨렸다느니,

누가 계획을 이렇게 짰느냐느니, 일진이 안 좋다느니, 재수가 없다느니,

배를 타고 나가서 다시 시작하자느니... 이런 말 하지 않고

‘이곳에서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원래 바랐던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에요.

인생이 어떤 규칙을 좇아, 예측 가능한 규칙을 좇아 우리를 대우해주지 않았습니다.

반칙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학교에서 배운 것들,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좋든 싫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고, 이곳에서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됩니다. 이곳에 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면

우리가 어디에 떨어지든 그건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음부의 문 앞에서 도우시는 하나님

 

*음부 : 무덤, 죽은 자들이 가는 곳, 히브리어로 스올

 

오늘 본문말씀 10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할 때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인생의 최후의 보루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한 발 더 밀리면 죽는다, 한 발 더 밀리면 망한다, 한 발 더 밀리면 끝이다..’

인생의 최후의 보루에 다다른 것처럼 느끼는 대부분의 경우는 엄살이지만

 

엄살이 아니라, 정말로 음부의 대문 앞에 온 것처럼 현실로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 시편 저자처럼 고백해야 됩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니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요, 그리스도인의 최후의 보루에요.

 

우리가 살다보면 위기의식을 느낄 대가 있어요.

‘이러다 망하지 않을까? 죽지 않을까? 굶어 죽지 않을까? 이대로 끝나는가?’

겁이 나고 의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위하여 존재하시느냐? 내 기도를 들으시느냐?

내 형편을 아시느냐? 하나님이 정말 나를 도와주실 것이냐?

 

음부의 대문 앞에 다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내버려 뒀더라면,

아브라함은 옛날에 벌써 아내 사라를 빼앗겼을 것이고, 자식 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만일 음부의 대문에서 하나님이 돕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요,

나왔더라도 광야에서 다 굶어죽고 망했을 것입니다.

 

음부의 대문 앞에서 하나님이 돕지 않았다면

다윗은 임금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임금이 되었더라도 쫓겨났을 것입니다.

 

만일 음부의 대문 앞에서 하나님이 돕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입니다.

 

음부의 대문 앞에서 하나님이 돕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믿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보루에요. 밀리고 밀려서 더 밀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최후의 보루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그 보루를 기반으로 해서.. 우리는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우유 통에서 발로 젓는 것과 같습니다. 주1)

 

장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발 젓기를 멈춥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음부에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불평의 대부분은 엄살이지만

때로는 음부의 문까지 가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는데

그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습니다.

친구도 도움이 안 되고, 배우자도 도움이 안 되고,

도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하고 체념하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하면 죽지 않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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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 통에 빠졌어요.

우유 통이 너무 깊어서 도저히 빠져나올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는 체념하고 그냥 우유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마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발로 우유를 저었습니다.

한참 지났더니 그 우유가 뭐가 되었게요? 치즈가 되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기반으로 껑충 뛰어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