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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장,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외 2편

LNCK 2014. 2. 4. 15:52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창22:1~8       2013.08.25.출처

 

아브라함의 인생은 창세기 11장을 기점으로 변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잘되고, 실수해도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하나님이 복주시고 함께 하시며

어디를 가든지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서 절정에 올라갑니다.

 

그러나 23장부터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들 이삭이 장가간 이야기와 아브라함이 새장가를 들었다는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창22장은 아브라함의 인생의 최고봉입니다.

아브라함이 인생의 최고봉에 올랐을 때에 하나님의 가장 어려운 시험이 아브라함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가장 위대한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창22장은 가장 큰 시험과 가장 위대한 승리가 기록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가인 메튜 핸리는 아브라함의 승리는 교회의 불가사의 중 하나

(one of wonders of the church)라고 말했습니다.

 

▲22:1절은 ‘그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창21장 사건 후에’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그 동안 어렵게 지내던 그랄 왕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어

블레셋 땅인 브엘세바를 얻게 되었고, 거기에서 평안히 여러 해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약 2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삭의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 알기 어렵지만

한 가지 힌트가 있습니다. 23:1절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었습니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사라가 죽을 때에 이삭의 나이는 37세입니다.

그러므로 창22장에 이삭의 나이는 37살 미만이고 어깨에 나무도 질 만하니

20대 중반쯤 되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과 비슷한 30세 라고 추정하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20여년 평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어려운 시험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과의 문제도 해결되고, 가정의 문제도 해결되고,

하갈과 사라 사이의 갈등의 문제도 해결되었고,

맏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자신의 사랑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삭도 20여세가 되었으니 아브라함의 마음도 이삭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되었고

그로인해 이삭을 향한 마음이 집착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하나님의 가장 어려운 시험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되고 평안하면 그것을 질투하여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골고다에서 죽일 사건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반드시 겪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로서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어려운 시험을 이기도 승리할 수 있도록

12~22장까지 온갖 말씀을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영적 성숙을 이루어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운 시험을 주실 때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준비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리고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더 큰 복과 평안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이겨내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았습니다.

 

히스기야 왕도 죽을 병에서 치료받고 난 후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사 38:17상).

 

성도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와도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창22장에 보면 세 가지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놀라운 명령입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의 놀라운 순종입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의 놀라운 믿음입니다. 차례로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놀라운 명령”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얼마나 기괴하고 놀라운 명령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은 성경에 나타난 가장 바람직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20여 년 동안 이삭을 양육한 아브라함의 마음은 아들인 이삭에게 완전히 몰입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표현하시는 방식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22:1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얻어서 20여년 키웠으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이 밀접한 관계가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삭과 하나님 중에 누가 더 아브라함에게 귀중한 존재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이삭을 살리고 하나님을 두 번째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하나님은 두 번째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려면 이삭을 완전히 포기하고,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시험’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혹, 다른 하나는 테스트 라는 의미입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을 유혹해서 죄에 빠뜨리는 일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약1:13~14

하나님은 악으로 유혹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유혹받는 것은 자기 욕심입니다.

이 분야는 하나님은 해당 안 되죠. 마귀가 해당되죠.

 

2)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시험입니다. test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사람이 하나님의 시험을 받게 되면, 그 사람 마음이 어떤지 다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은 두 가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과연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이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합격증이 창22:12절입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마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창22:12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지식의 근본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진실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임을

이 시험을 통해서 입증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어려운 시험이 올 때에 하나님을 1등으로 사랑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세로 대한다면

그 시험이 도리어 우리에게 큰 복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놀라운 순종”

 

두 번째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놀라운 명령에 보인 반응은 놀라운 순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 22:3).

 

아브라함은 아무런 질문이나 항의가 없습니다. 지체 없이 순종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순종을 시작했습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시 119:60).

 

사람에게 맨 처음 오는 생각이 하나님 생각이고, 두 번째 생각은 자기 생각이고,

세 번째 생각은 마귀 생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꾸 지체하면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거짓말도 집어넣고 의심도 집어넣어, 마귀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시험에 떨어지는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지체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아브라함의 순종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이고 항의가 없는 순종이고 진실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3. 아브라함의 “놀라운 믿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놀라운 믿음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 11:17).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는 믿음은 그 대상이 분명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천지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주신

인격적인 하나님, 아브라함의 인생을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불가능해보여도 그대로 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내가 아이와 함께 경배하고 함께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이라는

확고한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다시 살고 그때에는 죽지도, 썩지도, 병들지도, 쇠하지도, 추하지도 않습니다.

 

부활할 때는 영광스럽게 부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예수 믿는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납니다. 살아날 때의 영광은 다 다릅니다.

해와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과 별들의 영광이 다르듯 부활시의 영광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부활시에 얼마만큼 영광을 얻느냐 준비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무궁한 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 22:7~8).

 

아브라함은 이삭의 곤란한 질문에 대답을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개입하셔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리라고 믿고

대답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대답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좋은 성품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갖가지 장애물을 극복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삭을 향한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이삭을 죽이려면 인간적인 사랑을 극복해야합니다.

다른 하나는 논리적인 모순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하시더니

그를 죽이라고 하시는 것은 모순입니다. “양립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고

논리적인 모순을 가지고 따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든 장애물을 다 극복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방해하는 것을 믿음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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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창22:9~14       2013.09.01. 출처

 

서론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10여년 쓰고 폐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폐차장에서 운전석 밑에 있는 뭔가를 잡아당기니 트렁크가 열리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10여년을 타면서 그런 기능이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생 하나님을 섬겨도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하나님에 관해 알게 되는 진리도 있습니다.

 

창22장에서 이삭의 나이를 20대로 보는 사람도 있고 10대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37세 미만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20세 전후였을 것입니다.       주1)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나이도 120세 전후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20세가 되어서도 하나님에 대해 계속해서 배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알아야 할 진리가 많은 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한계도 없고 지루함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70세에 하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50여년을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경험했지만

12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배워야 할 하나님의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배우는 것에는 나이 제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노년기가 되어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워나가시기 바랍니다.

 

◑1.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배운 교훈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배운 진리는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무슨 뜻이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신다’(God sees)는 의미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God provides)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배운 교훈은,

하나님이 보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보고 계신다는 진리를, 아브라함보다 먼저 깨달은 여자가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종인 하갈입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사실을 알고 자기의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방황하다가 샘물에서 물을 먹고 주저앉아 있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사라에게로 돌아가서 복종하라’는 말씀을 듣고

하갈은 돌아가서 이스마엘이 장성할 때까지 평안하게 잘 지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 16:13).

 

하갈이 방황하면서 아이를 어떻게 낳고 기를 것인가 염려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로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샘물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브엘’은 우물이라는 뜻이고, ‘라해’는 살아계신 분이란 뜻이고

‘로이’는 나를 감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브엘라해로이’라고 하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우물’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신의 여종 하갈보다도 이 진리를 늦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두 가지를 보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럼에도 이삭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는지,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마음이 있는지를 다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다 보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사람은 얼굴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왕상 8:39).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고 드린 기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하나님이 다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정직해야 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필요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대신해서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시더라도 기도로 구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뭐가 부족하십니까?

건강이 필요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물질이 필요하신 분도 계실 것이며

명예가 필요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돈도 명예도 다 싫고, 마음의 평강이 필요하다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공급해주실 능력이 없으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사람은 저런 필요가 있구나”하면서 안타까워만 한다면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실뿐만 아니라 친히 공급해주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배운 진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보실 뿐만 아니라

친히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3).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수양을 공급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9~10).

 

아브라함이 폼으로 찌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이삭을 죽이려는데 하나님의 공급이 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1).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찌르려고 하는 순간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불러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까 수양이 수풀에 걸려있어서 이삭 대신 단 위에 올려놓고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급의 때를 사람이 미리 알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급의 때를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2년 뒤에 10억을 주시겠다고 가르쳐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때부터 은행에서 빌려다가 쓰고, 하나님께 10억을 받기도 전에 다 쓰고

오히려 빚을 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공급의 때를 알려주시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면 공급의 때를 맞이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1).

 

하나님은 우리의 해가 되시고 방패가 되십니다.

그리고 정직히 행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보시며

공급해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가 있으시면 하나님의 공급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 이레’는 무엇을 예표하는 것인가?

 

▲먼저 ‘모리아 산’은 무엇을 예표하는 것입니까?

세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1) 대상 21:25~26 “그 기지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여호와께서 번제단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역병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역병을 내린 이유는 다윗이 사단의 격동을 받아서 이스라엘 인구를 계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왕이 인구 계수를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냐면 인구를 계수하다 보면 숫자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사단의 격동을 받아 인구 계수를 한 죗값으로 7만 명이 역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잘못은 제가 했는데 왜 백성들을 이렇게 많이 죽이냐고 묻자

하나님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에게 금 육백 세겔을 주고 타작마당을 사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속죄의 장소(place of atonement)입니다.

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바로 모리아 산입니다.

 

2) 역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리아 산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것입니다.

모리아 산은 속죄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집이 세워진 장소(place of Lord’s house)인 것입니다.

 

3) 요19:17~18.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이 가운데 못 박히시고 두 강도가 양쪽에 못 박혔는데

여기가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고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이며 모리아 산입니다.

 

모리아 산은 그렇게 높은 산이 아니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람이 보기에 꼭 해골처럼 지형이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덕을 예수님 당시에는 해골을 의미하는 골고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 안에 있고 골고다 언덕은 성 밖에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골고다 언덕은 불과 300m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성벽을 쌓기 전에는 한 장소였습니다.

성벽을 쌓으니까 성전은 성 안이 되고, 골고다 언덕은 성 밖에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이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곧 골고다 언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죗값을 위해서 속죄하신 속죄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리아 산의 제사’는 무엇을 예표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해 네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이삭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어떻게 바칠 수 있었습니까?

 

제자 중 한 목사가 목회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울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목사가 가서 아무리 위로를 해도

당신은 아들이 안 죽어봐서 모른다며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위로해도 안 되니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집사님, 이제 그만 우십시오. 집사님은 둘 중에 하나가 죽었지만

하나님은 집사님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셨는데, 하나님의 심정은 생각해보셨습니까?”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그제야 울음을 그치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이삭 외에도 육신의 자손이 많았습니다.

이스마엘도 있었고, 사라가 죽은 뒤 그두라에게서 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언약의 자손은 이삭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기꺼이 바쳤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면 당신의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주셨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아브라함이 이삭을 기꺼이 드린 것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삭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삭의 나이는 약 20세이고 아브라함은 약 120세이니

아버지가 묶을 때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아버지가 나무를 벌려놓고 그 위로 올라가라면 올라가고

묶으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드린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8).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의인이 된 줄로 믿습니다.

이삭의 순종은 예수님의 순종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서 택하신 백성의 죗값을 대신 갚으시고 대속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8).

 

가나안농군학교의 교장 김용기 장로님은 어렸을 때 잘못해서 어머니가 불러다가

종아리를 걷으라고 한 적이 있답니다.

그래서 종아리를 걷으니까 어머니가 눈을 감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았고 회초리 소리가 크게 나는데, 이상하게 자기 종아리는 안 아픈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자신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린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을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자신을 대신 때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김용기 장로님은 어머니 앞에 엎드려서 잘못을 빌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죽어야 마땅한 자리에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넷째,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 걸어가는데 삼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삼일 뒤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다 수양을 공급받아 이삭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한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이삭이 살아난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인간의 필요를 보시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공급해주심으로

속죄를 성취하신 복음의 진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대신 죽은 수양은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확실한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완전히 똑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영안이 전혀 떠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모리아 산에서와 골고다 언덕에서의 복음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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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상급    창22:15~24      2013.09.08.     출처

 

서론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 자신에 관한 계시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창 22:15).

아브라함을 첫 번째로 부르신 것은 창22:1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창 22:11).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불순종해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고 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3:1).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지만

예수님은 또다시 말씀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중 아무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며 찾고 또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참된 목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왜 두 번째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느냐?

그 이유는 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이 왜 상을 받게 되었으며

또 아브라함이 받은 상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아브라함이 받은 상급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6~18).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상급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상급을 받게 된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수양을 주셔서 수양으로 대신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한

그 마음만을 보시고도 실제로 행동한 것과 똑같이 상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만 보시고도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왕상 8:18). 이것은 솔로몬이 한 말입니다.

 

아버지인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다윗은 피를 많이 흘린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는 다윗의 선한 마음을, 하나님은 기쁘게 보시고 복을 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 21:2~3).

 

렙돈은 화폐 단위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작은 단위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시며 상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면 이 가난한 과부의 마음은 1억이 있으면 1억을 드리고, 10억이 있으면 10억을 드리고 싶은데

두 렙돈 밖에 없으니까 두 렙돈이라도 드리면서 아울러 마음을 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보시고 가장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상급을 받으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됩니까?

선한 의도, 선한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돈이 없지만, 있어도 안 낼 것이라고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은 드릴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제게 복을 주신다면 마음껏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만 먹어도 그 마음과 의도를 보시고 상급을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 8:12).

마음만 있으면 그 마음이 있는 대로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 마음을 선하게 가지시길 바랍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자기 아들 이삭보다 더 존귀한 존재로 대접하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대접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접하는 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접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우리가 드린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상급은 공짜가 아닙니다. 상급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느냐에 따라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 9:6).

적게 심으면 상도 적고 많이 심으면 상도 많은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보니까 19세기 초 영국 런던에

아브라함 부쓰(Abraham Booth)라는 훌륭한 침례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아내가 성홍열(Scarlet fever)이라는 병에 걸려 죽게 되자

부쓰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아내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저의 자녀도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부쓰 목사님의 아내를 완치하시고 23년을 더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시 18:25~26).

 

우리가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자비로움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약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데 하나 드리면 하나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 배, 억 배로 갚아주십니다.

 

제가 보니까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남에게 똑같이 비판을 받고

남을 못살게 구는 사람은 자신도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선한 마음을 먹고 하나님을 최고로 대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최고로 대접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선한 마음을 먹으시고 최고로 하나님을 대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상급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미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Confirm) 받은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창22:16~18절은 재확인된 하나님의 언약이고

20~24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2. 재확인된 하나님의 언약

 

창22:16~18절은 새로운 약속이 아닙니다. 창22장 이전에 세 번이나 더 약속되었습니다.

그 약속이 창22장에서 재확인되고 확증된 것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7~18).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할 것이고

대적의 문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을 얻는다’는 것은 성을 빼앗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성들을 빼앗아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된다는 약속을 하나님이 확증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삼중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별과 모래처럼 번성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약속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2013년 현재 유대인의 인구가 약 1,400만 명입니다.

한국 인구보다는 작지만 한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1,400만 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 유대인들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100대 기업 중 40%가 유대인 소유이고

미국의 7대 영화사 가운데 6개가 유대인 소유입니다.

또한, 미국의 5대 은행 가운데 체이스 맨하탄, 뱅크 오브 아메리카, J.P. 모건 체이스

이렇게 3곳이 유대인의 소유입니다.

 

미국의 언론은 대부분이 유대인 소유이고

국제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주식을 사서 단기간 이익을 내고 빠지는 헤지펀드로 유명한

조지 소로스도 유대인입니다.

우리나라에 IMF가 온 것도 헤지펀드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이만큼 큰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도 유대인에게 잘못 보이면 정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전 세계를 유대인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히틀러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에 전 세계를 장악하였고

노벨상을 받은 사람 중 22%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창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말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아브라함의 씨가 두 번째로 의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귀의 일이 파괴되고 천한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9).

 

그리스도께서 속한 성도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사단을 물리치고

천하에 복음을 증거하여 축복을 나누는 일꾼들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창22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확증된 것이 왜 중요합니까?

창12:2~3절에서는 단순히 약속만 주어졌습니다.

창15장에서는 쪼개어진 짐승을 횃불이 지나가는 언약 의식과 함께 약속이 반복되었습니다.

창17장에서는 할례 의식으로 언약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창22장에서는 동일한 언약이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서 확증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창 22:16).

하나님이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을 입어 죄사함을 얻는

구원의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눅 1:72~7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로 보증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맹세를 해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해야 됩니다. 이것은 애국심을 갖고 살겠다는 맹세입니다.

대한민국 백성으로 나라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원에서 맹세해야 됩니다. 재판할 때 거짓된 위증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증거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 맹세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히 6:16~17).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아내가 의심할 때

남편은 자기가 진짜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하나님께 맹세컨데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남편이 이렇게 말하면 아내는 그 말을 믿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맹세는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3~14).

하나님 외에 더 높은 분이 없으니까 당신의 이름을 가리켜 맹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의를 입어 천국에 들어가고 부활하며

천국에서 영원히 축복을 누리며 산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맹세하셨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은 진실이라고 맹세하셨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맹세는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 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22장에서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3. 실현되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언약은 맹세가 있기 이전부터 벌써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낳았더라” (창 22:20~24).

 

나홀은 아브라함의 동생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게 아들 세 명이 있었습니다.

70세에 맏아들 하란을 낳았고 130세에 둘째 아들 아브라함을 낳았고

130세 이후에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을 낳았습니다.

 

나홀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다가 밧단아람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곳을 ‘나홀의 성’이라고도 하고 하란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소식이 온 것입니다.

나홀의 아내인 밀가로부터 여덟 아들을 얻었고 첩으로부터 네 아들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홀도 야곱처럼 열두 명의 아들을 얻었다는 소식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홀의 열두 아들 중 브두엘입니다.

브두엘의 딸 리브가는 창24장에서 이삭의 아내가 되고 야곱의 어머니가 되고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할머니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브엘세바로부터 800km나 떨어진 밧단아람에서도 (리브가의 출생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별과 모래처럼 많은 자손이 나오고 그 줄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는

언약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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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그 동안 어렵게 지내던 그랄 왕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어

블레셋 땅인 브엘세바를 얻게 되었고, 거기에서 평안히 여러 해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약 2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삭의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 알기 어렵지만

한 가지 힌트가 있습니다. 23:1절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었습니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사라가 죽을 때에 이삭의 나이는 37세입니다.

그러므로 창22장에 이삭의 나이는 37살 미만이고 어깨에 나무도 질 만하니

20대 중반쯤 되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과 비슷한 30세 라고 추정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