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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조 장로님 간증 1/2

LNCK 2014. 3. 5. 11:31

◈주광조 장로님 간증 1/2                                          출처보기

 

 

 

 

▶일본의 신사참배가 가장 심했던 것이 지금 북한의 수도인 평양 교회였어요.

아마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국의 예루살렘’ 또는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 교회’

 

우리가 지금 1천2백만 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여러분들 자랑을 합니다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남북한 통틀어 예수 믿는 사람이 불과 50만도 안 되었어요.

그 중에 과반수가 넘는 28만이 바로 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양남북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평양은 그래서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우리 한국 교회에 대한 공격의 목표는

당연히 평양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양의 교회를 굴복시키는 것이

곧 전체 우리 한국 교회를 장악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평양 교회에 대한 핍박을 가장 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 역사를 통해서 잘 아시겠지만

한국 교회는 다 쓰러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처지에 빠져있던 한국 교회는

이런 시련과 환난을 이겨 내고,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 이겨줄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당시에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당시 평양 산정현 교회의 수석 장로님으로 계셨던 조만식 장로님은

한때 자신이 오산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있을 때

자기의 가장 사랑했던 제자 주기철이, 목사가 되어서

부산과 마산에서 신사참배 항거 운동에 앞장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몸소 자신이 마산까지 내려와서

자기 제자였던 주목사를, 자신이 섬기고 있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청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1년 전에 주목사와 조만식 교장선생님과 맺어졌던 인연으로 인해서

주기철 목사는 자신이 피 흘려 죽을 수밖에 없는 평양으로

1936년 입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는 십계명에 대한 제1계명과 제 2계명에 대한 범죄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 말씀은, 그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되어서

첫 번째 강단에 올라서자마자 외쳤던, 설교의 첫 구절이었습니다.

 

“내가 배운 바도 많지 않고, 신학적으로 아는 지식이 많지 않지만,

그러나 한국 교회가, 평양이, 이 신사참배의 문제로 인해서

만약 나의 피를 요구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앞장 서서 흘릴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그 날 이렇게 쓰러져가는 한국 교회에,

마지막 횃불을 밝혔던 것이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 담임 목사가 된지 1년 6개월 후에

교회를 새로 5층 건물로 크게 신축하고, 그 헌당 예배를 보기 직전에

그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인해서, 첫 번째 구속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해 1938년 가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27차 총회가 평양에서 개최되기 직전에

그는 두 번째로 잡혀가게 됩니다.

 

일본은 이 조선 기독교의 본산인 평양에서

총회로 하여금 신사참배에 찬성 결의를 공식적으로 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원활하게 진행하자면,

 

신사참배 찬성 안에,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으로 믿어지는 주기철 목사님을

사전에 미리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38년 9월, 전국 27개 노회에서 목사 장로 선교사 등 총대 193명이

이 날 총회에 참석하고, 그 (총회 대표) 사이 사이에 97명의 일본 형사가 자리 잡고 감시하는 가운데서

마침내 신사참배 찬성 결의안은 가결되고

한국 교회는 일본 신 앞에 굴복을 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27개 노회장 목사 27명이

우리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고, 제 발로 직접 걸어서

평양 신사에까지 가서, 일본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큰 절을 하는

한국 교회의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겼던 것이었습니다.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 결의가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그 날 밤 주기철 목사님은, 감옥 안에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통곡하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훗날 자신의 성도님들이 증언을 했어요.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버리고 말았구나.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내게서 떠나가 버리고 말았구나.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드리리이다. 드리리이다. 이 목숨이나마 우리 주님께 드리리이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내가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라.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끊으리요.

나에게는 오직 일사각오일 뿐이리라.”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의 문제로 자신의 믿음의 절개를 버리며

이렇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이 와중에,

주 목사님은 갑자기 평양에서, 경상북도 의성 경찰서로 압송당하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1938년 12월 내내, 주 목사님은 (의성?)경찰서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갖은 고문으로 몸이 찟기고, 손톱 발톱이 다 빠지고

하루에도 기절하기를 여러 번. 추위와 배고픔과 육신의 고통을 더해서

죽음의 고비를 몇 번씩 넘겨야 했습니다.

 

훗날 주 목사님이 평양으로 돌아오셔서 (잠깐 출옥)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성도들에게 이런 표현으로 설교를 했어요.

 

여러 성도님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 어려운 지옥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하룻밤 자고 나면, 동지 목사가 죽어서 들것에 실려 나가 버리고

며칠 후에 한 젊은 목사님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미쳐서

입었던 옷을 다 버리고 알몸으로 뛰쳐나가고

 

7개월이 지난 사이에, 70여명의 모든 동지가

혹은 죽어서, 혹은 불구가 되어, 혹은 병자가 되어

나머지는 다 일본에 항복하고 옥문을 나서는데

 

끝까지 혼자 남아서 그들과 투쟁했을 때

받았던 정신적인 고독과 외로움,

그것은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어쨌든 7개월간에 이 고통을 이겨내고 무혐의로 석방을 받아서

1939년 6월,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평양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그 날이 마침 주일날이었어요. 바로 교회로 차를 몰았고요.

그리고 11시 대예배 시간이 가까워오자, 그는 감옥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 걸치신 채

산정현교회 강단 위로 바로 올라섰던 것입니다.

 

주 목사님의 석방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던 평양의 성도님들 2000여명.

그리고 평양의 3개 경찰서의 고등계 형사 수 십 명이 주위를 포위한 채,

7개월 만에 돌아온 주기철 목사님의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인지

모두가 다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날에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가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말씀이었습니다.

 

▶평양으로 돌아오셔서 약 7개월간 집에 머물렀습니다.

주 목사님은 총회의 신사참배 찬성 결의가 불법이라고 외치며

동료 교역자의 부끄러운 배신에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면서, 일본 제국과 투쟁을 하셨습니다.

 

일본 경찰은, 산정현 교회 제직들에게

주 목사를 강제 해임할 것을 강요했지만

장로님들에 의해서 이것이 거부당하자

 

그들은 그 해 (1939년) 9월 주기철 목사님을 다시 네 번째로 구속하고

평양 노회로 하여금 강제로 소집을 하게 해서

주 목사를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에서 파면처분 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항거하는 산정현 교회의 성도들을 수 없이 잡아가고

결국 교회가 너무 저항을 하니까

산정현교회에 들어오는 입구에다가 큰 못을 쳐가지고

교회 문을 완전히 폐쇄 처분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8.15 해방이 있을 때까지

    산정현 교회 문은 다시는 열리지 못했고요.

 

    온 교인들은 지하 교외, 갖은 교회로 숨어 들어가서

    주일날만 되면 멀리서 교회 건물을 쳐다보고 눈물짓거나

 

    새벽녘에 교회 처마 밑에 와서, 안에는 못 들어가니까,

    밖에서 붉은 벽돌을 붙잡고 이슬을 맞으며

    눈물을 흘리며 새벽기도를 드려야 했던 5년간에 환난이

    그 이후에 지속되었던 것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5년)

 

▶교회 문을 폐쇄한지 며칠 후에, 형사들이 목사관 사택으로 쳐들어왔어요.

그때 어머님이, 아버님과 더불어 감옥에 들어가 계시고

늙은 할머니이 저희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형사들이 뛰어 들어오더니,

있는 살림 다 끄집어내서, 자기들이 끌고 온 손수레에 전부 다 옮겨 싣고

목사관 사택에서 저희들을 추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얻어놨던 조그만 방, 한 칸짜리 방에

저희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강제로 이주를 시켰어요.

 

할머님이 안방 문고리를 붙잡고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내 아들 주 목사 올 때까지 나는 이 집을 지켜야 한다’고 막 버티니까

형사 하나가 오더니, 할머니를 안고 대문 밖으로 나와서

그 진흙길 위에 그대로 굴려버리고 말더라고요.

 

이로부터 저희 자녀들도 5년간 8.15 해방이 될 때까지

이 집, 저 집에 유랑 생활을 하면서 쫓겨 다니면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그 후로 5년 동안 지속되게 되었습니다.

 

▶1940년 4월 목사관 사택에서 추방되고 난 다음에

아버님이 처음으로 가석방이 돼서, 목사관 사택이 아닌 허름한 셋방으로

아버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회유는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도 폐쇄되고, 당시 목사직에서 파면 처분 당해서, 이제 목사도 아니에요.

그러니 당신이 설 강단은 없어요. 또 들어줄 성도들도 없어요.'

 

‘주목사, 이제 설교로 외칠 자리도 없고, 외쳐 봤자 이제는 별 수 없지 않냐.

당신만 신사참배 안 하는 것, 우리가 보고도 모른 척 묵인을 할게.

그게 죄라고 남에게 선동만 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가족과 더불어 남쪽 고향(마산)으로 보내줘서 편안하게 살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주목사님은 자신의 평안, 그리고 가족의 행복마저 거부했습니다.

 

예배당을 빼앗겼던 성도들이, 아버님의 석방 소식을 귀담아듣고선

그때부터 저희 집으로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결국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방도 너무 비좁고 마당도 너무 비좁아서

하루에도 열 번씩 교대로 성도님과 더불어, 아버님이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목사님은 그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외치셨습니다.

“우리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 고초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는데

내가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는 오직 일사 각오일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그 향기가 남아있습니다.

 

이 몸도 더 늙기 전에, 더 시들기 전에

우리 주님 제단에 바쳐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당신의 늙은 어머님과,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이

주목사님의 가슴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의 설교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썩 같은 마음이 무너지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에 그만 순교의 길에서 뒤돌아서는 자도 많이 있습니다.

이 육신에 얽힌 정에서부터 저를 좀 벗겨주시옵소서.”

 

주목사님의 순교의 뒤안 길에는, 이런 인정에 대한 애환이 잔잔히 깔려있습니다.

 

▶금년(2004년)이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꼭 60년 되는 해입니다.

오늘 같은 날, 그리고 주일 날.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주기철 목사님을 예로 인용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그 분들은 주목사님이 얼마나 의지가 강한 믿음의 용사요,

하나님에 대한 절기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가족의 행복마저 거부했던

그런 순교자로 불리우고, 또 그렇게 설교의 예로 인용한 줄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저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인 평범한 성격이었고

너무나 인정에 약했고, 그는 너무나 눈물이 많았던 그런 분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닥치는 그 고문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도, 물론 견디기 힘들어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이 굶주림에 쫓겨 다니는 모습에,

남의 처마 밑에 가마니를 깔아놓고, 거기서 주무시고 있는 자기 어머니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시던 주 목사님(저희 아버님).

 

아버님이 잠시 출소해서 집에 계시는 동안

새벽녘에 종마루 마당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시던 저희 아버님의 눈은, 그래서 퉁퉁 부어있었고,

불안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막내둥이 저(주광조 장로, 설교자)를 껴안으시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시면서(아이를 안아주시며) 엉엉 소리 내어 우시던 저희 아버님.

저는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막내 아들인 제가 기억하고 있던 아버님 주기철 목사님.

평범한 여자의 한 성실한 남편이었고

아이 넷을 두었던 자애로운 저의 아버님 이었습니다.

늙은 할머니를 모셨던, 효성이 지극한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다만, 다만..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예수님을 향했던 그의 믿음이.. 이 모든 것에 우선했을 뿐이었습니다.

 

▶1939년 9월, 아버님은 네 번째로 잡혀가던 날 아침이었어요.

주목사님은 어머니하고 겸상으로 식사를 하시고

저와, 바로 위에 형님(3남)하고, 할머니하고는, 옆에서 둥근 상에서 밥을 먹었어요.

 

그날따라 어머님이, 아버님한테 아주 맛있는 밥을 해서 드렸는데

아버님이 제 숟가락을 입에 넣더니, 무릎을 탁 치시면서

‘이 밥이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안방 문이 와장창 열리면서, 고등계 형사 두 명이 구둣발을 신은 채로 안방으로 뛰쳐 들어와서

오랏줄(포승줄)을 뱅뱅 돌리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주목사 지금 밥 먹는 것 중단하라, 그건 네가 먹을 밥이 아니고

네가 먹을 밥은 우리가 준비해 놓았으니 가서 먹으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아버님은 한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계셨어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그들 앞으로 뛰쳐나가시며

‘나는 이왕에 하나님 앞에 바친 몸’이라고 하면서, 담대하게 손을 내미시는 (날 묶어서 가라고)

그런 주기철 목사님을 여러분들이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한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있던 아버님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평양에는 부엌하고 안방 사이에 쪽문이 있어요.

그 쪽문으로 뒤로 내빼더라고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이 그 때 도망을 가기 위해서 거기로 뛰었는지,

기도하던 동쪽 마루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거기로 기도하기 위해서 갔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 길로 뒤로 내빼버렸어요.

 

그날 자신이 어디 갈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아버지가

동쪽 마루에 들어와서, 가운데 기둥이 하나 있었어요.

기둥을 껴안으시고 그대로 쓰러지신 채

마치 어린아이가 울듯,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어요.

 

뒤 따라가던 저희 어머님이, 뒤에서 아버지를 끌어안으시고

두 내외가 같이 쓰러지셔서 우셨는데

저는 그 때 저희 아버지가 우시면서 하시던 그 기도의 모습이

도저히, 평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더는 이 육신으로 제가 못 이겨내겠습니다.

당신의 나라로 저를 빨리 좀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엉엉 소리 내어 우시던 저희 아버님.

 

그 아버님을 뒤에서 껴안으시고, 같이 흐느껴 울부짖었던 저희 어머님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 전 성도님들이 목사님 한 분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목사님이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교인들은 다 어쩌라는 것입니까.'

 

두 내외가 기둥하나 붙잡고 쓰러지시면서 그렇게 우셨는데

그때 제가 보았던 저희 아버님의 발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인 주기철 목사님의 진정한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아버님이 다섯 번째 마지막으로 연행되어 가던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길이 자신의 마지막 길이라는 어떤 예감이 들었던가 봐요.

 

형사한테 양해를 구하고, 다시 안방으로 와서 늙은 할머니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께 하셨던 마지막 작별 인사는 딱 이 한 마디였습니다.

“어머니, 하나님께 어머님을 맡겼습니다.”

 

그리곤 할머니의 손을 붙잡으시고는,

‘우리가 다 할머니를 위해서 통성기도를 하자’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 불효한 자식은 제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합니다.

오, 주님 제 어머니를 주님께 의탁 드립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는

자비하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더 나을 줄 믿고,

내 주님께 내 어머니를 의탁하옵고

이 몸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들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겠습니다.’

 

그날 아침 우연하게 저희 집에 산정현 교회 성도님들 한 20여명이

아마 새벽 아침 일찍 예배 보러 찾아 왔던 것 같아요.

 

잡혀가시는 아버님의 모습에, 마당에 서서 고개를 다 푹 숙이고 있었어요.

목사님이 거기를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노인 성도님 한 분이

앞으로 나와서 주 목사님 나가는 길을 막아버리고, 그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떨리는 음성이었습니다. 아주 더듬더듬 하는 목소리였습니다.

세상의 어쩔 수 없는 이 흐름을 탓하면서

 

‘목사님 현실이 이러니까, 그저 조금만 양보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목사님이 조금만 양보하면, 그저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될 텐데.

이제는 목사님 건강도 생각 하셔야지요. 가족들도 돌봐야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인들도 좀 보살펴주셔야지요.

 

밤낮 감옥 안에만 들어가 있으면, 우리 성도들은 다 어쩌란 이야기입니까.

목사님 그저 조금만 양보를 해주십시오.’

 

아버님은 그 성도들 앞에서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며

‘아니요.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데, 이 길을 이렇게 막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 다 같이 예배나 봅시다.’

 

교인들 다 앞으로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일 좋아했던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 찬송가를 1절부터 5절까지 다 같이 불렀습니다.

 

      제 기억에는 제가 이 세상에 나와서, 아버님 등에 엎혀서

      제일 처음으로 배워서 불렀던 찬송가 같기도 해요.

      그만큼 아버지가 이 찬송가를 좋아했어요.

 

이십 몇 년 전에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가 영화로 제작 되었을 때

제가 그래서 영화의 제목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고 그렇게 붙였습니다.

 

그 찬송가 1절에서 5절까지 다 부른 다음에,

목사님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성경 한 구절을 찾아 읽어주었습니다.

아모스 8장 11~13절 말씀이었어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라’

 

이 성경을 읽어주신 다음에, 아주 짧게 그가 이 세상에 남겼던 마지막 설교를

불과 20여명의 산정현 교회 성도들을 앞에다 놓고

그것도 바깥마당에서, 마지막으로 해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이제 당하는 이 수욕을, 이 고난을 내가 이제 피했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로움과 내 평안과 내 즐거움,

그리고 내 영광까지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그 고난의 잔은 어디에다가 두고 왔냐고 물으시면

내가 훗날 주 앞에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져야할,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했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내가 준 내 유일한 유산인 내 십자가를

너는 어디다가 두고 왔냐고 물으신다면

내가 훗날 주 앞에 부끄러워 뭐라고 대답을 해야겠습니까.

 

나에게는 오직 일사각오일 뿐입니다.

주님은 골고다의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나에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생명보다 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며

누구든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오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산정현 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면 끝나버릴 이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 봉양 누린다면, 그 아니 또한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들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비겁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나의 정절을 지키고자 합니다.”

 

▶1940년 여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잡혀가서

일본 경찰은 최후의 발악으로 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갖은 고문을 다했습니다.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지옥의 고통이

그의 피를 말리고 그의 뼈를 으스러뜨리고

그의 육신이 때는 지날 대로 지났습니다.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일경이 저희 가정에 대한 핍박이 아주 심해졌어요.

교인들이 저희 집에 출입하는 것을 전부 다 막기 시작하고

쌀 배급 나오는 것을 중단하다보니까, 그만 먹을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님은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굶느니, 차라리 우리 금식기도 하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한 달에 한 서 너 번씩, 삼일 금식기도.

주일마다 매일 하루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그때 너무나 배가 고팠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그러한 사람이거니 해서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좋은 때가 오지 않겠느냐'. 어머님은 늘 그랬거든요.

'광복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걸 기다리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허리를 졸라매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저희 어머님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아버님 면회를 가고는 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저를 빼놓고 혼자서 자꾸 숨어서 가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아버님의 그 고문당한 비참한 모습을

불과 일곱, 여덟살난 꼬마인 저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어머님이 면회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대문에서 어머님 들어오면, 어머님에게 삿대질을 하고 대들어서

‘어머니 왜 혼자 면회가. 나도 아버지 보고 싶은데, 왜 어머니 혼자 면회 가냐고,

나도 아버지 보고 싶으니 데리고 가라고’ 막 소리를 지르고서는

어떨 때는 제 발로 막 어머니 정강이를 차면서 막 떼를 쓰고 그랬어요.

 

물론 아버님을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아버지를 꼭 만나야 했던 목적은, 전혀 엉뚱한데 사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들의 명분이 하도 당당하니까

결국 어머님이 어쩔 수 없이, 막내인 저를 데리고 가고는 했습니다.

면회를 갈 때마다 어디다가 숨겨놨는지 하여간

아버님에게 드릴 양식은 꼭 준비해 놓았더라구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행여 식을까봐 보자기에 싸고, 타월에 감고 가슴에 품고

그렇게 하고 가지고 갔어요.

 

그러나 아버님은 늘 그 음식을 드시다 마시고 남겨서

옆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막내둥이 저를 쳐다보시면서

결국 숟가락을 놓으시고, 음식 그릇을 제 앞으로 밀어주시면서

‘광조야 너 이거 먹으라’고 밀어주시고는 했습니다.

 

아버님에게 한 술 한 점이라도 더 드시게 하고 싶었던 저희 어머님.

얼굴에 오만 인상을 다 짓고요. 눈알을 굴리면서 저보고

그 음식 받아먹지 못하도록 계속 신호를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얼굴 쳐다 볼 생각도 안 하고

아버님이 내밀어주시는 음식을, 그냥 다 낼름낼름 받아먹었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만나러 가야했던 진짜 이유가, 물론 아버지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은

아버님이 내밀어주시는 그 음식이 정말 탐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저도 너무너무 견디기 어려워서요.

먹을 것을 보며 침을 삼키는 아들의 애절한 눈망울에, 그만 수저를 놓으시고

그것을 제 앞으로 밀어 주시는 분이, 제 아버님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면회 때마다 아버님이 정상적인 몸으로 제 발로 걸어 나올 때는 극히 드물었어요.

남이 엎어오거나, 부축을 받고 나오실 때가 훨씬 많았어요.

 

꼭 한 번 제 기억에는 제 아버지를 누가 잡아주는 분이 없어서

삼층 계단으로 벌벌 기어오시다가, 면회실 문을 열고 네 발로 벌벌 기어들어왔어요.

 

어머님은 냉정하게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가서 아버지를 잡아 일으켜서, 의자에 앉히시고 면회를 다 마쳤는데

그 날따라 어머님이 면회를 빨리 끝냈어요.

 

그리고 아버님을 들여보내고 난 다음에

그 삼층 계단에서부터, 그렇게 정말 넘어질듯이 빨리 뛰어내려오더니

경찰서 문 밖을 나서서, 길가에 가로수를 껴안으시고

그 다음에 쓰러지시면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아마도 아버님이 네 발로 기어들어오는 그 모습에, 너무나 마음이 상해가지고

그러나 형사나, 자기 남편 앞에서 눈물을 피하고 있다가

면회 끝나고 난 다음에 밖에 나와서, 그렇게 통곡을 하셨던 저희 어머님을

저는 아직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면회 끝나고 난 다음에 옷을 갈아입히고, 헌 옷을 찾아서 나오지요.

그 헌 옷의 솜에 묻었던 피와 고름과 그 악취,

그것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가슴을 치시며 우셨고

어머님은 뒤 돌아 앉아 눈물을 닦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는 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