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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조 장로님 간증 2/2

LNCK 2014. 3. 5. 14:17

◈주광조 장로님 간증 2/2                                          출처보기

                                                                                                                *주기철 목사님 관련글 보기

 

▶1941년 어느 날, 일본 경찰이 어린 저(막내, 주광조)하고, 할머니하고,

어머님 셋을 아버님 면회하러 오라고 불렀습니다.

 

80세가 넘은 저희 늙은 할머니에게는, 절대로 면회를 안 시켰어요.

혹시 무슨 충격을 받을까봐요.

 

그런데 그 날은 할머니까지 모시고 오라고 해서, 저희들이 무척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날 갔더니, 그 유부장이라는 형사 부장이, 저희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잘 오셨습니다. 오늘 주 목사님을 풀어줄 테니까 모시고 나가세요.’

 

우리는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풀어준다고 하니까.

‘아 그래서 할머니까지 오시라고 했구나.’

그는 뒤돌아 웃으면서

그런데 저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뭐 주목사가 이뻐서 풀어주는 게 아니에요. 보기가 싫어서 풀어주는 것이니까, 그런 줄 아세요.’

이렇게 농담도 한 마디 하더니, 그 다음 말이 재미가 있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풀어주면 고맙다는 표시는 해야 할 것 아니냐.

그 표시는, 지금 택시를 불러서 주목사를 태워서 보내 줄테니까

모시고 가다가, 경창리라는 동네에 잠깐 차를 세우고,

주 목사님이 차에서 수고스럽게 내릴 필요도 없어요.

 

차 안에 앉은 채, 창문만 열고,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고, 가족들만 함께 가는 것이니까.

그 창문 밖으로 바라보이는 평양 신사를 향해서,

그저 고맙다는 표시로, 그저 고개만 한 번 숙이고 가라’고 말이죠.

 

물론 어머님도 그런 조건으로는 모시고 안 가겠습니다.

물론 아버님도 그런 조건으로 내가 나가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자 지하 삼층 고문실로 저희들 세 사람을 안내를 해서 내려갔습니다.

조금 이따가 저희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왔더라고요.

 

저희를 보는데서 공중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네뛰기 고문이라는 건데요.

형사 몇이 나오더니 그 방에 있던 몽둥이, 칼, 그런 기구들을 들고서 두드려 패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치면 저기로 날아가고, 그렇게 두들겨 패더라고요.

 

뭐 경황이 없어, 아버님이 몇 대 맞았는지 기억이 안나요.

그러다가 한 스무대 정도 더 맞았을까요?

아버님이 축 늘어지더니, 공중에 매달린 채 그렇게 기절해버리고 말더라고요.

 

그런데 아버님이 기절하기 훨씬 전부터

제 옆에 있던 할머니가 고문 시작할 무렵에, 벌써 뒤로 휙 나가자빠지면서 기절해버리고

그 옆에 있던 저희 어머니는 고개 돌리더니, 정말 정신없이 기도만 하시더라고요.

 

아버님이 공중에 매달리니까, 형사들이 끈을 풀어서 땅에다 뉘여 놓고

찬물 몇 바가지 끼얹고 일으켜 세워서

조그마한 책상 위에 아버님을 딱 뉘여 놓고,

그리고는 책상을 우리 있는 데로 막 밀어놓더라고요. 아마도 쳐다보라는 뜻인가봐요.

 

형사 하나가 노란 주전자에다가, 검은 호스로 물을 받아서 가지고 오더라고요.

한 형사는 새빨간 고춧가루를 두 대접을 주전자에 넣어서

그것을 이제 아버님 입에다가 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님이 조금 저항하시는 것 같았는데

거즈 수건으로 코랑 입을 막아놓으니까, 숨을 쉬기 위해서 결국 코가 막히니까

입으로 숨을 쉬는데, 그러니까 물이 다 들어가더라고요.

얼마 있으니까 배가 불어오르고, 조금 있다가 축 쳐지면서

아버님이 그대로 기절하시더라고요.

 

배 위에다가 형사 둘이 웃으면서, 하나는 올라타고 하나는 짓누르는데

처음에는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하여간 구멍을 통해서

그 빨간 물을 다 토해내게 하는데 일으켜, 세워서 저희를 쳐다보게 했어요.

 

옆으로 자꾸 넘어지시니까, 형사 하나가 받쳐서 저희들을 쳐다보게 하고.

그렇게 하고 형사 둘이 이쪽으로 오더니

그때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저희 어머님한테 달라붙었습니다.

 

1941년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 대동하 전쟁을 일으켰던 그 해였습니다.

평양 경찰소 지하실 고문실에서 그들이 여자한테 하는 고문이 어떤 고문인지

제가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명드릴 길은 없습니다만

어쩌면 열 살난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처참했던,

사실 저희 어머님 볼 그럴 용기도 없었어요. 반대로 저희 아버님 쪽을 보았습니다.

 

'뭔가 아빠는 해줄 것이다. 엄마가 저렇게 당하고 있을 때, 아빠가 뭔가 해줄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당하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아버지는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눈과 눈 사이로 아버님하고 어머님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고

아버님이 너무나 야속해서, 그리고 아버님의 그 무심한 표정에

저는 오히려 제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절망의 증오와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으로 하여금 이 처참한 광경을 서로에게 보여줌으로써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결국은 주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는

그들의 술책이였습니다만

아버님이나 어머님이나 심지어 늙으신 저희 할머니까지, 그 고통을 잘 이겨냈습니다.

 

▶할머니는 집에 돌아와서 한 2주간 식음을 전패하셨고

정신이 나가서,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동네 밖으로 뛰쳐나가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우리 주목사 살려내라’고 막 소리를 지르고,

 

어머님은 ‘저 어머니 정신 나갔는데 길 잃으면 큰일 난다’고

모시고 들어오라고.. 그래서 저희들은, 하루에도 열 번씩

집을 나서면서, 짜증을 내면서, 저희 할머니를 집으로 데리고 오곤 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고문당하는 충격을 보았을 때, 제 나이 불과 10살이었습니다.

그날 면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집에서 일 도와주시는 여 집사님 두 분이 계셨는데

오늘 무슨 일 있었냐고 자꾸 묻더라고요.

 

그걸 뭐라고 설명을 하고 대답을 해야겠습니까. 그래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어요.

하룻밤 자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서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실어증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더라고요.

 

제가 한 3개월 고생을 했고, 그 이후에 아주 심한 말더듬이가 되어서

첫 마디 하려면 1분간 덜덜 떨어야, 겨우 한 마디씩 하고는 했습니다.

8.15 해방된 후에 한 2개월 지나서야, 제가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늙으신 저희 할머니의 혼절에도 불구하고

주목사님이 그렇게 끝끝내 버텨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아버님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아내의 처절한 고문을 지켜보면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

어린 자식의 울부짖음 속에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게 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이 주기철 목사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인정 없는 모습으로 변하게 했던 것이었을까요?

 

그까짓 말 한 마디만 잘 해주었다면, 온 가족이 얼마나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당신도 그렇게 힘든 고문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고,

할머님이 매일 밤 그렇게 흐느껴 울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저희 형님들, 우리는 아들이 4형제였어요.

 

▶첫째 아들 주영진

장남 주영진은, 이 당시에 아버님의 뒤를 이을 준비로

일본 동경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감옥에 들어간지 다음 다음 날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당했어요.

평양에 돌아와 일본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주영진 전도사님, 김덕성 사모님 순교사

 

20일만에 잠깐 풀려나왔을 때, 저희 어머님이 새벽기도에 안수기도를 해주더니

도망을 시키더라고요.

‘너는 다시는 평양에 돌아오지 말아라. 너희 아버님의 죽음만 족하지 너까지 죽을 필요가 없다.

우린 반드시 광복을 찾고 다시 독립되는 날이 오겠지만

그 날이 언젠지 모르니, 그때까지 너는 숨어서 살며 이 고비를 넘겨라.’

 

그로부터 5년간 8.15 해방이 될 때까지

큰 형은 팔도강산 안 간 곳이 없었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8.15 해방 이후, 이 형님은 경상남도 기장에 조그마한 어촌에서

열심히 고기 잡는 어부가 그의 직업이었습니다.

 

8.15 해방 이후에 평양에 돌아오셔서, 아버님의 뒤를 이어 목회를 했습니다만

6.25 때 끝내 평양을 지키다가, 아버님의 뒤를 이어 또한 순교를 했습니다.

 

    형님이 순교하고 난 20년 후에, 1974년 1월 저희 형수도 복음을 전하다가 총살을 당했고요.

    그 형님의 아들과 딸, 즉 제 조카가 둘이 있는데

    평양에서 추방당해서, 지금 함경북도 산골짜기에 수용소에서

    아주 힘든 삶을 지금 살고 있다는 소식을.. 최근에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든 큰 형님은, 그렇게 아버님의 뒤를 이어서 순교했습니다.

 

▶둘째 아들, 주영만

아버님이 다니고 있던 오산학교에 그대로 다니고 계시다가

역시나 퇴학처분을 당하셨고요.

8.15 해방 될 때는 일본으로 숨어들어가서 구두닦이와 배달(택배) 일을 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셋째 아들, 주영해

서울 한 교회에 장로님으로 계시다가 12년 전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분도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퇴학처분을 당했습니다.

 

16살 때 어머님이, 고향(마산)에 가까운 부산에 가서,

너 혼자 삶을 개척하라고 내보냈습니다. 부산 애린원이라는 고아원이 지금도 부산에 있습니다.

 

그 고아원에 3년 동안 살면서, 낮에는 나무로 통을 만드는 공장의 직공으로 있다가

8.15 해방을 맞이해서 불행하게도 해방이 된 다음에

이 형님은 연령이 초과가 돼서, 다시 학교로 복귀를 못했어요.

그것이 평생 한이 되어서, 아주 힘들게 어렵게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마 이 형님을 제일 예쁘게 봤던가 봐요.

이 분의 아들이 지금 목사(주승중)가 되어서,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님과

큰 아버지 주영진 전도사의 뒤를 이어가고 있고

 

셋째 형님의 딸 셋이 전부 다 목사 사모가 되었습니다.

 

▲넷째 아들 주광조 장조 (설교자)

오늘 여러분 앞에 간증을 하고 있는 저는

아버님이, 제가 7살 때 감옥에 들어가셔서, 13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기간이 저한테는 초등학교에 다닐 기간이었습니다만

세 형님들이 다 학교에서 줄줄이 퇴학 처분을 받아서

아예 저는 처음부터 학교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문턱을 두들겨 본 것은, 8.15 해방이 된 다음

14살 때에야 비로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던 13살 때, 제 직업이 평양 어느 치과의 급사.

그 넓은 마루에 걸레질을 하면서, 치과 기공소에 심부름을 다니며,

한 달에 27원씩 월급을 받아서, 늙은 할머니와 어머님의 입에 풀칠을 해 드렸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가졌던 갈등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남들 다 하는 것 처럼요.

그 날 아버님이, 물 흐르듯이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가듯이

저희 형제들에게 그렇게만 (타협) 해주었더라도

우리 형제가 하늘 아래 고아가 되어서

이렇게 세상을 방황하여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우리 아버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힘겨운 삶을 남겨주고

자신조차 이렇게 어려운 가시밭길 같은, 고난의 길을 외롭게 걸어가야만 했던 것일까요.’

제가 젊은 시절에, 이런 질문과 이런 방황이 끝없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화된 것은, 그로부터 아주 먼 훗날 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주 목사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으로

제가 다시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

이 힘들고 어려운 질문의 해답을 얻기는 했습니다.

 

▶그 처참한 고문 장면이 있고 난 한 달 후에

1941년 8월 25일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경찰서에서 평양 형무소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형무소에서 3년 동안 일본과 투쟁을 하시면서, 자신의 믿음을 그대로 지킵니다.

형무소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하는 것은

혹시 여러분 안이숙 여사가 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옥살이 7년. 마침내 주목사님에게 마지막 순교의 날이 찾아옵니다.

1944년 4월 21일 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다섯 시간 전에, 형무소 소장의 특별 주선에 의해서

저희 어머님과의 단 둘이 마지막 면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면회 직전에 형무소 소장이, 저희 어머님에게

면회 끝나고 난 다음에 곧 병보석으로 풀어 줄테니,

모시고 나가서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하면 곧 회복될 것이라고

비로소 선심을 썼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미 주 목사님에게 해놓았으니까

두 분이 잘 면회하면서 의논에서 결정하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간수의 등에 업혀 나왔던 주기철 목사님.

한 간수가 저희 아버님을 업고, 두 간수가 양 쪽에서 엉덩이를 받치고 나왔는데

그 아버님을 맞이했던 저희 어머님 오정모 사모의 첫마디는 이랬습니다.

 

“주 목사님,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목사님의 승리가 바로 우리 한국 교회의 승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이겨내도록 2천여 온 성도님들이

오늘도 밤을 지새워가며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그 말에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렇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오.

늙은 어머니와 내 어린 자식들을 당신에게 부탁하겠소.

내 하늘나라에 가서 산정현 교회와 조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조선 교회와 조선을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아무 미련이 없다는 듯이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혀 뒤돌아서서

어머님이 그때야 비로소 ‘형무소에서 내 보낼터이니, 의논해라’는 말이 기억이 나서

그게 미련이 있어서, 아버님의 등 뒤를 향해서 외쳤습니다.

 

‘목사님 마지막으로 무슨 다른 부탁할 말씀은 없으십니까?’

 

간수의 등에 업히신 아버님은,

그때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저희 어머님을 쳐다보시더래요.

그리고는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좀 먹어 보았으면."

 

이것이 그가 살아서 하셨던, 마지막 말씀이 되었습니다.

 

면회를 입회했던 형무소 소장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 면회 장면과

그리고 그 부부간의 대화에 너무도 감동을 느꼈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님보고, 빨리 좀 모시고 나가라고,

빨리 가서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사정을 했는데,

‘안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안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실 뿐입니다.’ 한 마디로 거절을 했습니다.

 

8.15 해방되기 1년 4개월 전, 아버님과 어머님의 면회가 있고 난 5시간 후에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주기철 목사님은, 7년간에 감옥살이 끝에 평양 형무소 차디찬 감옥 안에서

한 사발의 따뜻한 숭늉을 그리워하시며.. 이렇게 순교 하셨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습니다.

 

▶그 다음 토요일 날, 사과 궤짝을 임시로 엮어 만든 관에다가

아버님을 모시고 리어카에 태워서, 상수리에 있는 저희 셋방으로 돌아와서

시신을 방 한 가운데에 뉘여놓고, 어머님이 알콜 한 병을 약솜에다가 적셔서

상처 난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씻어내려 가면서, 시신을 씻고 수의를 갈아입히시더라고요.

 

온 교인이 방에 꽉 차고, 마루에 꽉 차고, 마당에 꽉 차고,

들어오는 골목에도 꽉 찼어요.

입관 예배를 보려고 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늙은 할머니는 아버님의 가슴을 껴안고 있었고

저는 아버님의 발을 붙잡고 있었어요.

 

제가 당신의 육신이 보고 싶어서,

푸른 죄수 옷을 슬쩍 들어 올려서 저희 아버님의 발을 보았는데

발톱이 전부 빠져 뭉그러져 울퉁불퉁한, 시커먼, 세상에 그렇게 보기 싫은,

그렇게 흉한 발은 처음이에요.

 

저는 너무나 당황해서, 바로 그 죄수옷으로 아버님의 발을 확 덮어버렸어요.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조금 있다가 이 발을 씻기 위해서,

이 발을 씻을 때, 온 교인들이 그 아버님의 시커먼 발을 다 볼 것 같더라고요.

그게 어떻게 그렇게 부끄럽고 창피했던지 말이죠.

 

이것을 보여주면 안 되는데.. 하면서, 그것을 꽉 붙잡고 있었어요.

어머님이 위로부터 시신을 다 닦고, 마지막에 발을 씻을 차례가 되어서

‘광조야 손 치워라’ 하는데, 제가 손을 치울 수가 없었어요.

 

치우지 못하는 이유를 어머님께 설명을 해드려야 하는데

3년 전에 아버님, 어머님이 고문당한 그 충격 때문에, 제가 실어증으로 말을 제대로 못해서,

그 날도 말이 안 나와서 말을 못했어요.

 

어머님은 사정도 모르고 제가 발만 자꾸 붙잡고 있으니까

‘광조야 손 치우라니까 왜 그래?’ 나무라면서 제 손을 확 밀어버렸는데

아버님의 발이 보이는데, 어머님이 이렇게 보시더라고요.

 

그리고 그때 비로소 13살난 꼬마의 제 마음을 읽어서 제 귀에다 대고

‘광조야, 미안해’ 하셨습니다. 다시 가리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교인들이 보지 못하도록 발을 조금 올려서 아버지의 발을 씻기시고

흰 버선을 신겼습니다.

 

늙은 할머님은 아버님의 가슴을 껴안고 그대로 있었는데,

이제 입관해서 입관예배를 봐야 한다고

교인들이 저희 할머니에게 사정을 해서 좀 풀어주세요 그러는데

‘내일 아침까지 내 아들하고 오래간만에 같이 잘란다’ 그러면서

그대로 껴안으시면서 놓지를 않으세요.

 

시간이 너무 흘러서, 결국 어머님이 어쩔 수 없이

할머님하고 아버님 사이를 강제로 띄어 놓았는데

늙은 할머님이 며느리한테 그만 아들을 빼앗겼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그때부터 갑자기 가슴을 치시면서 대성통곡을 하시더라고요.

 

‘당장 죽은 주목사 살려내 놔라’면서.

온 교인들이 저희 어머님 때문에 울음을 삼키고 울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늙은 할머님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전 교인들이 그만 다 울음바다가 되어버렸어요.

 

울음소리가 너무 커지고 너무 오래 계속 되니까

시신 한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저희 어머님,

방을 쾅쾅 때리고 관을 쾅쾅 치면서, 교인들을 책망하는 거예요.

조용하지만 아주 엄숙한 모습이었어요.

 

“장로님, 집사님,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에요.

주목사는 결코 나약해서, 무식해서, 힘이 모자라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할 길을, 피하거나 도망칠 수가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서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당한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장례식 날, 저는 바깥 변소 간에 들어가서요.

안에서부터 문고리를 잠그고, 변소 안에서 혼자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뭐냐고,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어요.

 

우리 어머님, 저희에게는 늘 이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금식 기도하고 철야 기도하고 새벽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주신다’고요.

 

저는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 7년 동안 그 힘들었던 그 금식 기도의 응답이,

뼈하고 가죽 밖에 남지 않은 저 아버지의 모습이냐고.

 

내 아버지는 진짜 바보라고,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있냐고,

다른 목사님들 다 잘 먹고 잘 사는데,

다른 목사님의 아들 딸들, 다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고, 학교도 잘 다니는데

내 아버지 오죽 못났으면

자기 자식들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고, 자기는 저렇게 죽어가느냐고'

저는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했어요.

 

그러나 하마터면 끊어질 뻔 했던 한국 교회의 믿음의 전통을, 단절 없이 이어지게 하고

60년 이후에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내다보며,

또한 오늘날 이 교회의 젊은 청년들 여러분들의 이 예배 드리는 이 모습을 위해서

바라보며 기대하고 기대하며, 그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찢기는 아픔에 신음하며, 붉은 벽돌(감옥) 너머로 가족을 너무너무 그리워했던, 그런 분이었어요.

 

아마도 당신의 긴 세월 동안 당했던 육체적 고통과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그 아픔과

목사로서 노회에서 파면 처분을 당하고, 친구 목사들에게는 왕따를 당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양들과는 오랫동안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런 모든 괴로움이

아마도 주목사님을 몹시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주목사님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

왜 아버지로 하여금 그 어렵고 힘든 가시밭길을

그는 혼자 외롭게 걸어갔던 것이었을까?

 

아마도 반드시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단호한 그의 믿음 때문이겠지요.

이는 설교 중에 ‘일사각오’라는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주목사는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켰어요.

거기에 이런 저런 상황윤리나, 시대의 형편을 접목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모보다, 처자식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했기에,

그것을 위해서 그 나머지를 포기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뒤돌아보고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주 단순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뿐인데

 

그로 인해서 그의 인생은 가시덤불이 되었고

그의 몸은 찢길 대로 찢겼고,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그냥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했고요.

하나님이 하지 말란 것은 하지 않은, 그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어찌 보면 저희 아버님이 너무너무 미련해 보였던, 그런 아버님같이 보이기도 했어요.

조금만 머리를 굴려서 조금 적당히 (타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아버님은 그런 적당한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스럽게 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저 4남 주광조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질문에 해답을 얻었고요.

아버지의 그 고난의 선택의 정신과 사랑에,

감사와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 아들의 아비가 된 후에야

어린 자식을 뒤로 하고 홀로 죽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아버님의 그 고민, 고뇌를

이해하게 되었고요.

 

제가 한 여인의 남편이 된 후에야

병든 아내를 뒤로 하고, 홀로 죽음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님의 그 마음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이제 제 나이 일흔 세 살입니다. (주광조 장로님, 2011년 소천)

이제 와서 60년 전에 저희 아버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은

옛 추억이 아프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정에 등을 돌렸던 내 아버님의 원망 때문만도 아닙니다.

 

아버님이라는 이름이 내게 주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아버님의 대한 사랑과 존경이 제 눈가를 적시는 거예요.

 

     저는 주기철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요.

     자신의 믿음을 세상의 명예와 평안으로 바꾸지 않았던,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말로써 예수 사랑을 주장하지 않고

     행동으로 예수 사랑을 보여주었던 당신을,

     말없이 죽음에 이르는 투쟁을 통해서 후배인 우리들에게

     ‘죽음에 이르도록 믿음을 지키라’는 가장 큰 교훈을 주셨던 주기철 목사님,

 

<예수 사랑, 나라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자기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그것을 실천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주기철 목사님,

그런 믿음의 선배를, 오늘 저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존경합니다.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순교는 누구나 다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전부 다 그렇게 순교 할 수도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내린 큰 축복이라고, 저는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오늘 우리의 시대에 볼 것 같으면

우리는 <순교적인 정신>은 꼭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이 되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서

우리는, 앞서가신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그 순교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서

 

정말 내 자신 하나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나라를 구하고, 우리 교회를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일을 해야겠다는 그런 각오를, 그런 결단을,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의 그 믿음의 간 길을

다시 한 번 뒤따라가면서, 깊이 결단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