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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바닷가의 노래 / 김성수

LNCK 2014. 4. 24. 14:49

◈유리바닷가의 노래                계15:1-4                김성수 목사님 계시록 61강 (축약, 편집)

                                                                                                 *원제목 : 주를 두려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

◑성도는 유리바닷가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아래 본문에 보면, ‘천상’에서 (‘현실’을 포함합니다.)

유리바닷가에서 찬양을 부르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계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위 15:3절에서 ‘모세의 노래’라고 했지요?

유리바다를 건너서 천국에 다다른 성도들의 노래는,

홍해를 건넌 출애굽 백성들의 노래, 즉 모세의 노래와 내용이 아주 흡사합니다.

 

여러분께서 출애굽기 15장을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는,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의로우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애굽을 심판하신 하나님을,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높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로 노래를 마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 계시록 15장 3~4절이

정확하게 출15장의 그 노래를 요약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신약의 구원 사건의 모형입니다. 계시록은 완성이고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모세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를

바로 그 노래의 앞장인 출14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출14:27-30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었더라.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자신들의 대적인 애굽 사람들이 그 홍해에 다 빠져 죽게 된 그 심판의 자리에서,

자신들은 안전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이 양쪽으로 벽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홍해 바닷가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애굽 사람들의 시신을 보고

이 모세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 홍해 바닷가의 이스라엘, 천상 유리바닷가의 성도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그 홍해 바닷가의 사건을, 보고 경험 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우리의 대적들은 이미 already 결박을 당했고

그들은 멸망해 버릴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도

유리 바닷가의 찬양을 “지금"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가 똑같이 홍해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때때로 홍해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홍해가 저주와 심판의 바다가 되지만

여러분에게는 그 홍해가 구원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일관된 논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앞에서 울부짖었던 것처럼

우리의 앞길에 놓여 있는 그 홍해를, 절망의 장애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홍해에 여러분을 빠뜨려 죽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앞장을 서시고, 그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그 홍해를 다 건너고 났을 때, 이스라엘에게, 그 홍해가 여전히 장애물이었나요?

아닙니다. 그 들이 홍해를 다 건너고 난 뒤에는

그 장애물이었던 홍해가 바로 이스라엘의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저 홍해에다가 우리를 다 빠뜨려 죽이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홍해는

‘우리의 대적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옛 사람, 옛 성품,

이런 것들을 죽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였구나.’ 하고

오히려 그 상황들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홍해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경이로우심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배우게 되고, 그 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홍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배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찬양의 내용1. ‘두려우신 하나님’을 찬송

 

(계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그런데 위 본문 4절을 보시면

그 찬양의 내용 중에 ‘두려우신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 분은 두려우신 하나님’이라는 찬양을 합니다. ↑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그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십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의 힘과 권위를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대방이 정말 권위와 힘이 없거나, 아니면

그 상대방에 대해서 전혀 지식이 없을 때, 두려움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정말 권위가 없으신 분이십니까? 권세가 없으신 분이세요?

그런데 왜 여러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그 분을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겁 없이 막 사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하나님보다 상위 권위에 올라앉아서

그 분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막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위에 상위 권위가 없는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막 삽니다.

그게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상위 권위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늘 최고 권위자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게 속성 화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제가 우리 청년들에게 마음이 아프지만 일부러 라도 혹독하게 몰아치는 것은

‘우리 청년들이 부모와 떨어져서 미국에서 유학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칫 자기 마음대로 게으르게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25장에 보면, ‘1달란트 받은 종’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고작 1달란트 받았다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달란트’는 화폐 또는 무게의 단위인데, 약 35 Kg입니다.

금 1달란트면, 어마어마한 값어치이며,

은 1달란트만 해도, 현 시세로, 근로자의 약 20년 봉급과 맞먹는 가치입니다.

 

아무리 작게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주님께 최소한 1달란트는 받았는데, 1달란트도 못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정말 ‘큰 값어치’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땅에 파묻어 놓는 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모두 최소 20년+ 시간은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한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두었다가는.. 큰 일납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있지만) 내가 한 달란트를 혹시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가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받은 달란트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 찬양의 내용2. ‘하나님께 영광’ 을 찬송

 

계15:4↑에서 ‘영화롭게 하다, (헬. 독사조)’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유리 바닷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 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

하고 찬양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고, 

또 그 사실을 찬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알고 있어야

우리가 지금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WBC야구 대회에서 4번 타자가 홈런을 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나요?

월드컵 축구에서 골게터가 결승골을 넣고 잔디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하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아니면, 자녀가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아니죠)

 

하나님은 그 자체가 영광이요, 존귀함이요, 거룩이요,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들 그 분의 영광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시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럼 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우리가 지난 수요 성경공부에서도, 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수요일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지점은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공부했지요?

 

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지점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더 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내용을,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께 영광’이란? - 구원받음의 영광과 찬양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영광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엡1:11-12)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된 것,

즉 우리가 구원 받은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전에 읽은 요17:22절을 잘 보면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다’라고 하시죠?

 

    그럼 우리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예수님도 죄에서 구원을 받으신 건가요? ↓

 

▲2. ‘하나님께 영광’이란? - 순종의 영광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죄가 되시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이 의롭게 만드시지 않으시면

영원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망에서 살리시고, 그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셨고

그 안에 들어있는 우리가 함께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신 유일하신 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분께 순종한 삶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순종의 삶, 십자가의 삶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순종해서),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빌2:5-12)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적용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열광과 감동(일종의 영광)을 찾기 위해 운동 경기장을 찾습니다. 

수만의 인파가 혼연일체가 되어 한 목소리로 응원할 때

사람들은 뜨거운 열광과 감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거기엔 열광은 있지만, 영광은 없습니다.

간혹 감동이 있어도, 인간적인 감동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이 부는 곳에는, 신령한 영광과 거룩한 감동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음악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전공자도 있고, 아마추어 음악 동호인회도 있습니다.

일부 음악인들은, 정말 피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성대나 연주 실력을 퇴보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또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피나게 연습해서 연주를 하는데..

거기엔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영광’같은 영광은 없습니다.

잘 하고, 뛰어난 연주이기는 하지만, ‘영광(헬. 독사)’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자녀들은,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스러운지요!

찬양.. 조금만 연습해서, 조금만 잘 불러도.. 거기엔 영광 glory이 임합니다.

설교.. 조금만 자신이 신실하게 자기 삶을 준비하고, 설교문을 준비하면,

거기엔 주님의 영광이 임재로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우리 경험에 의하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에는

보통의 경우, 조용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크게 소리치며 화답하는 면도 있겠지만요)

오히려 그 반대로 주님의 영광(=성령의 임재)이 임하시면.. 장내가 일순간 조용해집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예배자들은,

조용한 가운데,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큰 소리로 찬양하다가요..)

 

오늘날 교인들은, 큰 집에 살면서, 외제 차를 굴리면서,

‘예수 믿으면 이렇게 복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다’ 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교인이 지지리 못 살고 가난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사고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광은,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영광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장로님의 삶에서 나타난 영광입니다.

 

오늘날에도 일부는, 교회적으로

자기들의 숫자와 건물의 위용으로, 영광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받은 그 ‘한 달란트’를 통해서도,

당신은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그 성도의 영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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