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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워야 합니다

LNCK 2013. 11. 29. 15:53

뜨거워야 합니다 - YouTube

◈뜨거워야 합니다              눅24:13-32                 2007-07-10  출처보기

  

인간의 최대 발명품은 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로 인하여 모든 것이 발전해 온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붙음으로써, 기독교 국가들이 세계 최고의 국가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왜 기도합니까? 왜 예배를 드립니까?

여러분의 심령에 불을 붙이려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불이 붙으면 여러분의 인생은 환하고 건강해집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라는, 지금 거리로 보면 13㎞ 정도

떨어진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은혜 충만한 제자들이었지만

실의와 좌절감에 빠져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는 마지막 순간에라도

기적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실 줄 알았을 것입니다.

 

무덤까지 다 확인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두 사람은

근심된 얼굴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만 낙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도 엠마오로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장로님, 선교사님들도, 성가대, 교회학교, 여선교회에

그렇게 열심히 충성하던 분들에게도 엠마오의 길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려가는 그 길에 주님께서 늘 찾아오십니다.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의 문이 닫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왜 좋으신 주님이십니까? 내 마음의 상처 속에,

내 삶의 위기와 환난 가운데에 가까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수술을 앞둔 분들이 저에게 많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수술을 앞두고 겁내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칼로 배를 째는데 겁이 안 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그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줍니다.

“모든 사람은 수술실 밖에 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수술받는 그곳에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왜 좋습니까? 내가 감옥에 가면 감옥에도 함께 오십니다.

감옥에 같이 갈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도 오지 않는 길에도, 주님께서는 나를 찾아 오십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신 증거는,

내게 말씀해 주시고, 그래서 내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심령이 뜨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시면,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심령은 뜨거워집니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 성령충만함을 받은 하나님 자녀의 가슴은, 영혼은

뜨거워집니다. 그래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은 뜁니다. 그리고 뜨겁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저는 임종을 많이 보았고, 시체도 많이 만져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시신이 싸늘해집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자식이든, 부모든, 남편이든, 아내든 생명이 끊어진 피부는

차가운 쇠에 닿는 것과 같이 섬뜩합니다.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면서 서서히 식어가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다시 뜨거워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떠나가면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고

이 세상에서 차갑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힘 있게, 행복하게, 넘치는 축복 가운데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심장처럼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뜨거워지면 모든 것이 뜨거워지고,

내 영혼이 차가워지면 우리의 삶이 차가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사람은, 삶에 닥치는 시련을 그 뜨거움으로 극복합니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시련과 장애물을 많이 겪은 동물일수록

훨씬 더 건강하고 수명도 길다는 것입니다. 실험실에서 쥐를 길러 보면,

잘 먹이고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내게 한 쥐는 몸이 약하고 병에도 잘 걸리며

수명도 짧다고 합니다. 쥐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텔레비전에서 태국의 코끼리들이

농부의 손에 이끌려 중노동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한 일을 시켰습니다. 코끼리 한 마리가 트럭 몇 대의 몫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코끼리들은 밀림에 사는 다른 코끼리들보다 10년은 더 장수한다고 합니다.

하루 130~180㎏을 먹고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코끼리들은

병들어서 일찍 죽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시달리면서 긴장하고 힘들지만,

훨씬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산다고 합니다. 사자나 호랑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얼음덩어리 같은 이 시대의 문제점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발달했지만, 지식은 절대로 우리 인간의 삶을 뜨겁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사랑과 이해와 관용과 긍휼과 자비와 격려와 감사와

희망과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지식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긴장시키는지 모릅니다.

 

물질 또한 우리의 삶을 얼마나 차갑게 하는지 모릅니다.

물질은 이해관계입니다. 이기적입니다. 요만한 것 가지고도 싸웁니다.

 

농촌에서 여름에 물 댈 때가 되면 옆집과 싸움이 벌어집니다.

교인도, 물 대는 것 때문에 삽으로 옆집 사람을 찔러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주 살벌합니다.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형제도 부모도 자식도 없습니다.

물질주의가 이렇게 차가운 것입니다.

 

영적으로 생명이 끊어진 우리 인간이 지식을 좇아가고, 물질을 좇아가고,

과학을 좇아가다 보니 이 사회에 걷잡을 수 없는 냉해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농사지을 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냉해입니다.

1년 농사 잘 지었다가도 한 보름만 일찍 찬바람이 불면

그해 농사지은 것은 끝장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 냉랭해졌습니다.

차가워진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범죄가 점점 늘어가고,

청소년 탈선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너무 냉랭해졌습니다. 결혼식하기가 바쁘게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냉해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고, 주의 말씀을 듣고, 성령충만하면

모든 부부간의 냉해, 자녀간의 냉해, 이웃 간의 냉해가 치료됩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르려면 주님께서 내 안에 오셔야 합니다.

성령의 불만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교인의 머리는 차가워야 하지만, 가슴은 뜨거워야 합니다.

잘못된 교인은..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차갑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교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헨델은 56세에 병들어서 모든 영광이 떠나갔습니다.

어느 눈 오는 날 밤, 그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이 성령으로 뜨거워졌을 때 만든 작품이, 그 유명한 헨델의 ‘메시아’입니다.

 

베토벤도 실의에 빠졌을 때 주님을 영접하여 은혜받고 ‘심포니 넘버 9’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의 ‘심포니 9’과 헨델의 ‘메시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를 차갑게 만듭니다. 어디를 가도 차갑습니다. 엠마오의 길입니다.

교회에 나옴으로 심령이 뜨거워져 그 뜨거워진 심령으로 민주주의를 일으키고,

경제를 일으키고, 교육을 일으키고, 사회를 일으켜야 합니다.

 

기독교 국가가 잘되는 이유는 가슴을 뜨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뜨겁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는 심령의 불을 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사람을 만나면 동족인데도 차갑습니다. 눈빛이 무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불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문화도, 전부 불이 꺼진 것입니다.

앞으로 나라를 일으킬 사람은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죄의 길을 가던 사람도 예수를 믿으면 그 안에 성령의 불이 붙게 됩니다.

그 불로 인해 죄를 이기고 불의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도 불은 있지만, 그 불은 나쁜 불입니다.

정욕의 불, 교만의 불, 음욕의 불, 방탕의 불입니다.

이 불길이 타올라 자기를 태우는 것입니다.

 

가정을 망치는 것도 잘못된 불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불은 누가 끌 수 있습니까?

이 불을 끌 수 있는 길은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야 합니다.

성령의 불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도 성령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조용한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조용해도, 불 붙은 데가 있고, 불 꺼진 곳이 있습니다.

괜히 불 꺼진 데 가면, 자기가 더 꽁꽁 얼어붙게 됩니다.

 

친구를 사귈 때도 가슴이 뜨거운 친구를 사귀기 바랍니다.

결혼을 할 때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을 만나야 가정에 오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교회에 성령의 불을 붙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불을 끄는 것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한 시간이면 아주 차가워집니다.

그러나 불을 붙이는 것은 몇 십 년이 걸립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영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이라!”고 외쳤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일어난 이 성령의 불길로 영국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위기에 와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이 나라에 붙을 때, 이 민족이 살아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신 것처럼

이 시간 참석한 모든 성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 한마디에도 낙심하고 좌절하는 저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셔서,

세상의 어떤 힘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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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함께                    요10:1-15 1998/11/01                      출처보기 

 

▲오래 전에, 제가 어느 존경하는 교수님과 함께 성지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성지에 가 보면 큰 유익이 될 줄 알고 그렇게 다녀왔습니다.

특히 그 교수님과 함께 가면, 큰 도움이 될 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약 20여 일 거기 다녀오는 동안, 교수님은 말씀을 거의 안 하시고

오히려 교수님은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열심히 적고 그 하나 하나의 과정을

잘 따라가시기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 알기에, 이만하면 되었기에 다른 누구의 소리도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받아드리지 않는 것은

자기 발전에 저해가 됩니다.

 

우리는 나보다 더 나은 분이 있음을 알고 잘 받아들일 때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그 교수님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 분이 무척 훌륭한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내가 누군데.... 얼마나 많이 아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하는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의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분은 우리나라에서는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 한국의 지도자는 다 잘못되었다,

교회 지도자, 목회자도 다 잘못되었고, 존경할 사람이 없다' 고 했습니다.

교계 지도자들에게 가까이 가면, 오히려 낙심하기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했습니 다.

 

그런데 그 분 자신은 '자기 아버지가 가장 존경스러운 분이며

자기 아들이 가장 자랑스럽고,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모른다' 고 했습니다.

 

마치 북한에서 수령에게 하는 것처럼, 눈물을 철철 흘리며

아버지를 자랑하고, 자기 자식 자랑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 분에게는 좋은 아버지요, 자랑스러운 자식일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 아버지나 아들을,

자기 가정에 있는 분을 우상처럼 받들고 하늘처럼 높이고 높여야 할 분을 높이지 않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다듬어지지 않는, 교육을 잘못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존경할 분이 그렇게 많이 있는데, 어떻게 존경할 분이 없다고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얼마나 존경할 분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적어도 남에 게 말할 때는, 자기 가정에 대한 (자랑)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이 세상에 살 때, 내 집, 내 생각, 내 하는 일, 내 결정, 나의 하는 일은

완전하다는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잘 받아들이는 것이 평화로운 관계가 되게 합니다.

 

대통령을 모신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라가 잘 될 때는

대통령이 신문이나 백성들의 이야기,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데

 

나라가 잘못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절대로 듣지 않고

본인의 이야기만 주장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럴 때 그것은 뉘우치고 반성하고 고쳐야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을이면 뱀이 땅으로 들어가는 데, 이 때 뱀을 많이 잡는데

땅군(뱀 사냥꾼)들이 능선에 삼 사백 미터 그물을 쳐 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가서 수 십 마리의 뱀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도 뱀을 많이 잡았지만, 뱀의 성격이 그물에 걸리면 물러서지 않고

그 물이 죽나, 내가 죽나 하면서 대항을 한다고 합니다.

짐승들이 거의 다 그렇다고 합니다.

 

덫에 걸리면, 조그만 철사에 걸리는 것도, 얼른 뒤로 물러서면 되는데

그냥 앞으로 계속 전진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짐승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망하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이야말로, 양보하고 포기하고 뒤로 물러설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삶을 보면 얼마나 잘 물러서셨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니, 뒤로 물러서고 또 도망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물러 서셨습니다.

‘내가 누군데 물러서나!’ 라고 하는 것은 좋은 길이 아닙니다.

 

가정이 평화로우려면, 만약 남편 이 소리 지르면 그냥 독창하라고 하면 됩니다.

거기에 불협화음 넣으려고 같이 소리 지르지 말고,

만약 아내가 소리 지르면 '소프라노구나' 하면서 그냥 독창하라고 들어줘야 합니다.

그냥 실컷 노래 부르세요 하고 가만 놔두어야 합니다.

 

이 길만이 길이 아니고, 이 사람만이 사람이 아닙니다.

이 직장만이 직장이 아닙니다.

 

▲저도 선을 두 번 봤습니다. 지금 집사람은 두 번째 사람입니다.

처음 선 본 사람에게는 제가 차였습니다.

처음 선 본 그 사람과 몇 번 말이 있은 다음에,

그 신부 집에서 저에게 미리 약속한 어느 사과나무 밭에 서 있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옷을 잘 입고, 사과나무를 가지 한 가닥을 부드럽게 잡은 후에

멋진 포즈를 잘 잡고 잘 보이도록 서 있었는데, 그 분이 나를 그만 찼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섭섭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까,

지금 결혼해 사는 분이 열 배 나 더 예쁘고 비교할 수 없이 착한 귀한 분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길만이, 이 사람만, 요것만 잡아야 하고

양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어떤 분야도 잘 안 됩니다.

 

기업도, 연애도, 학문도, 정치도, 경제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더 좋은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생활에 고생하다가 그 직장에서 나왔으면

그 쉬는 기간을 인생의 십일조라고 생각하고, 그 기간을 쉬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하고 계시다가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기다리면, 더 좋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한 것이

있음을 믿고, 더 찾으며, 기다려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