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믿음은 모험입니다

LNCK 2014. 5. 24. 21:23

◈믿음은 모험입니다             막1:16~17, 마10:16                  인터넷에서 스크랩, 정리

                                                         *<모험> 관련글 모음              *원제목 RADICAL ADVENTURE

 

*주제 요약 /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조상들은, 모험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모험 쪽을 선택하라는 뜻은, 물론 아니고요, 그건 돈키호테 식 만용이고요

하나님은, 택하신 믿음의 사람들을, 모험으로 내 모시는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비겁하게 불순종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믿음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죠.

 

‘오십보 백보’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 사람들의 기량이나 수준은 서로 엇비슷합니다.

그런데 리더/믿음의 조상 반열과 계보에 들어가는 사람이

일반 신자들보다 남다른, 딱 한 가지 특징/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의 모험으로 내모실 때, 초청하실 때,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던졌다는 점 - 바로 그것 하나의 차이입니다.

아브라함, 다니엘, 모친 마리아, 다니엘의 세 친구, 바울, 기드온.. 전부 다 그랬습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군대 이야기를 자랑처럼 내 놓습니다.

전장 터에 갔다 온 사람들은, TV에 나와서 ‘간증’을 합니다. 생생합니다.

 

오늘 내 삶에는 ‘믿음의 모험에서 오는 무용담/간증’이 있습니까?

만약 지금 그게 없으면.. 천국에 가서도 별로 할 말도 없을 것이며.. 환영도 못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험’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모험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요10장에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비유하는데

그분은 우리를 잘 돌보시는 참 목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선한목자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모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마10:16절에서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이 보장되고, 가장 안락한 삶을 살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실제 그분의 부르심에서, 우리들 제자의 삶은, 필연적으로 모험적이 됩니다.

그분의 부르심에서 우리의 삶을 흩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첫 번째 부르심을 받았던 시몬과 안드레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그런 모험으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삶으로 부르십니다.

그들은 어부였지만, 사람을 낚는 일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도서 <래디컬>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David Platt 著

 

인도네시아에서 온 한 형제를 만난 적이 있는데

수마트라 섬 북부의 바탁 족 출신이었다.

그는 자기네 부족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몇 년 전에 선교사 부부가 마을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했다.

당시만 해도 주민들은 모두 무슬림이었다. 늑대 소굴로 들어간 양이 따로 없었다.

족장은 이 선교사 부부를 잡아서 죽인 후 토막을 냈다.

 

몇 년 뒤, 또 다른 선교사가 들어와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살해된 선교사 부부가 하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다.

 

족장은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귀 기울여 들어 보니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삽시간에 온 부족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형제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수마트라 섬 북부에

약 3백만 명 이상의 바탁 족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David Platt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라면 서슴없이 첫 번째 선교사 내외와 같은 길을 갔을까?

기꺼이 잡혀서 살해되고 토막 나서, 후속 선교사가 온 이후에,

모든 부족이 회심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도록 터를 닦을 수 있었을까?’

 

이것이 마태복음 10장이 오늘의 그리스도인 하나하나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은 첫 번째 선교사 부부처럼, 가장 먼저 위험 속으로 달려들 수 있는가?”

 

나중에 오는 이들이 그 희생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죽음을 무릅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희생이, 아직은 복음에 적대적인 수많은 미전도 종족들이

언젠가 마음을 돌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전제 조건이라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모험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세계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우리의 권리 포기가 ‘radical action’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제자의 삶은, 그 첫 단추부터 모험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커튼 뒤의 인생, 아직 우리가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말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에게 ‘radical action’은 ‘그물을 던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삶의 모험은 ‘사람을 낚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는, 이 말씀을 다 이해하고 좇아갔을까요?

그들의 미래를 알 수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험이었습니다.

 

 

◑살 떨리는 모험 여행

 

‘모험’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있는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쥬라기 공원> 등입니다.

혹은 아프리카의 밀림을 누비는 사파리가 생각나지요.

 

과거에 제가 한 번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관광 열차를 탔던 기억이 납니다.

‘쥬라기 공원’의 세트장 사이를 누비며, 공룡들 사이를 지났고,

클라이맥스는, 열차가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모험 adventure 열차’인 셈이지요.

 

우리가 ‘신앙의 모험’을 생각할 때,

그 정도 수준의 모험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13:45~46

 

얼마나 큰 모험입니까?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진주를 삽니다.

결국, 그 진주가 가짜라면 그의 인생이 파산하지 않겠습니까?

얼0마나 가슴이 떨리는 순간이겠습니까? 자신의 전 인생을 건 일이니 말입니다.

 

가슴 떨리는 일 만큼 확신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모험적일 수 있는 것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던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을 낚는 일이 얼마나 가슴 벅차게 하는 일이겠습니까.

 

순종하며 모험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히11:8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모험적인 삶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이미 그의 삶을 축복으로 바꾸어 놓고 계셨습니다.

 

우르, 하란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지만,

그곳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모험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은,

얼마나 큰 모험이었겠습니까!

 

잘 먹고 잘 자는 것, 잘 입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에게는

이 ‘모험으로의 순종’이, 이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도저히 이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모험적인 인생은 히11:6절의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는 모세가 모험적인 삶을 살았던 이유를, 또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6

 

모험적인 인생을 사는 믿음은, 눈에 보이는 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이미 받았음을 알고 떠나는 것입니다.

 

 

◑모험은.. 하나님이 등을 떠미실 때.. 불순종하지 말고, 순종하는 것

 

모험은, 무작정 위험한 곳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등을 떠미실 때에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등을 떠미시지 않으신다면.. 굳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해 동경 집회를 마치고, 간증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팀멤버 중의 한 사람이 모스크바에서 동경으로 날아와 참석했습니다.

정말 올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마음을 주셨던 모양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 그러면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그 집사님에게

상황은 결코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과거 집회의 체험이

그녀로 하여금 결단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모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경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즉 그의 등을 떠미신 이유는,

누군가를 만나게 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일이 이루어질지 모르는 가운데

그녀가 만났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순종하며 동경으로 날아왔답니다.

 

첫날부터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실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기 시작했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모험이 시작된 것이죠.

 

그런데 한 명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답니다.

수십 년이나 만나지 못했던 중학교 동창생이, 선교사의 부인으로 참석을 한 것이죠.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확신이 왔는데,

정작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더랍니다.

 

복도에서 마주치고, 아는 척을 하려고 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친구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것을 깨닫게 하셨답니다.

 

‘그래,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는 네 주위에 항상 있었단다!

네가 나를 알아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나타났지만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구나!’

 

자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순간에도

늘 옆에 계시던 하나님을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솟아오르더랍니다.

 

그녀의 모험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나게 하셨던 그 동창과

마지막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는 장면은

동경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모험적인 인생은, 위험만 따르는 게 아니라, 감동을 줍니다.

감동이 무엇인가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에 감동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기에 감동적입니다.

 

 

◑모험인데 평안합니다. 불안하지 않은 모험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부르심 이전에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야고보에게 고기를 잡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의 직업을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고기를 잡던 그 실력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이제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말씀이죠.

이제 그들의 인생은 모험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어떻게 쓰실지는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이기 때문이죠.

 

▶모험의 길은 불안하지만, 성령의 GPS가 주어져 있습니다.

 

모험적 인생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GPS는 위성과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의 현 위치를 정확히 알려줍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당장 서 있는 도로밖에 볼 수 없지만,

GPS는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한꺼번에 지도 전체를 볼 수 있고

경로에 있는 교통 혼잡까지 고려해서, 우회도로를 제안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GPS는 실시간 길 안내를 제공합니다.

어떻게 길로 들어서야 하는지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안내하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 바로 알아차리고 새로운 경로를 안내합니다.

 

물론 성령님은 GPS보다 훨씬 복잡하고 신비로운 분이지만,

GPS의 비유로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요14:26절을 보세요.

“보혜사 곧 하나님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의 삶이 래디컬한 모험을 시작할 때,

참으로 신기한 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평안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평안함이 없으면, 모험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바로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결과를 요14: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가 인생의 모험을 떠날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기를 자원할 때만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도서 <래디컬>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자 David Platt의 간증입니다.

 

오랜 내전으로 극심한 빈곤 상태에 빠진 수단을 처음 방문하려고 했을 때다.

당시 약 3천 달러 정도의 여행 경비가 필요했다.

 

게다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내륙을 자유롭게 여행하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행이 탈 경비행기를 전세 내기로 했는데

그 일에만 며칠이 걸렸다.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자매가 다가와서 속삭이듯 말했다.

 

“차라리 그 여행 경비를 수단 사람들에게 보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목사님이 열흘 정도 함께 있어 주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도움될 것 같은데요.”

 

그 질문을 붙들고, 나는 깊이 고민했다.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지 않고 여행 경비로 써 버리는 것이 과연 낭비일까, 아닐까?

우리는 그곳에 꼭 가야 하는가?

 

그 고민은 수단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은 돈을 들여서, 거기로 갔습니다.)

그리고 현지에 도착해서, 앤드류라는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비로소 풀렸다.

 

앤드류는 지난 20년 동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태어나던 날부터 전쟁을 보고 배웠던 이 청년은

수단 사람들이, 그 고통과 박해를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가장 암울한 시기에 구호품들과 도움을 주었던 수많은 이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했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도움에 감사하면서도, 우리가 누구를 진정한 형제라고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누구죠?”

 

“가장 어려울 때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죠.

목사님, 여기까지 와서 함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의 급소를 찔린 기분이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실 때

금은이나 현금, 수표 따위를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다가왔다.

하나님은 자신을, 독생자를 보내셨다.

 

잠시나마 직접 가는 대신 송금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물질만 보낸다면 어떻게 복음을 소개할 수 있겠는가?

물질만으로 모든 필요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할 만큼

피상적인 믿음을 가졌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동참하고 싶다면

물질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1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을 바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복음은 우리가 그러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순간부터

모험적 인생을 살게 됩니다.

모험적인 삶은, 우리가 직접 모험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인생을 흥분하게 하는 일이며,

다음 세대를 변화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장차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몰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축을, 우리에게 옮겨 놓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은, 이제부터 모험적이 됩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이기에 아주 ‘래디컬’ 합니다.

이 모험에 뛰어드는 순간 우리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인도해 갈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믿음은 뛰어내릴 때 생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믿음이 안 생깁니다.


제 아이가 어릴 때,

제가 아이를 나무 위나 계단 위에 얹어 놓고,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래서 받아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아이는, 겁이 나서, 쉽게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머리로 알기는 아는데, 믿음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한 번 뛰어 내렸습니다. 제가 아이를 받아 주었습니다.

무사했고요, 재미있었습니다.

그 후로 두 번, 세 번 하고 나더니

제 아이는, 이제 재미를 붙여서, 계속 높은 데서 뛰어내리려고 했습니다.

제가 힘들어서 그만 하자고 해도, ‘아빠, 저 가요!’ 하며 계속 뛰어내렸습니다.


제가 지금 믿음은 뛰어내릴 때 생깁니다는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믿음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면서 가만히 서 있을 때.. 생기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