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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LNCK 2014. 5. 28. 10:01

◈다 이루었다             요19:30        14.04.18.  인터넷설교 스크랩, 녹취, 출처보기

 

※후반부가 아주 중요합니다. 놓치지 마세요.

위에 파랗게 색칠한 부분을 클릭하시면, 동영상에 바로 연결됩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머리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요19:30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여섯 번째로 하신 말씀, 즉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위대한 승리의 선언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고통의 절규도 아니요,

육신의 고통에 대한 고백도 아니요,

그 당시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강도들, 군병들, 예수님의 어머니,

그 주변에 있었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 주어진 고백도 아니라,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 인류에 선언하신 예수님의 승리의 고백이에요.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뜻.

 

▲1. 승리의 선언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은 죽어가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한탄이 아닙니다.

이것은 승리자의 선언인 것입니다.

 

기진맥진하여 이제 죽어가는 사람이 이제 죽음이 다 끝났다.

이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이제는 다 끝이다. 그런 고백이 아니에요.

 

이것은 죽음을 이긴 승리의 고백이에요.

그리고 그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요,

그 분의 죽음이 목적이 있는 죽음이라는 것. 계획에 있었던 죽음이라는 것.

의도된 죽음이라는 것.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고,

그 분이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는 거예요.

 

▲2. 자기 인생의 목적을 다 이루심.

사람은 죽음 앞에 서면, 정신이 불안정해지기 마련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자신의 영혼이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그 언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죽음을 보면,

그 죽음 앞에서도 너무나 뚜렷한 고백, 정확한 기억, 그리고 분별력 있는 단어로,

자신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 말을 남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

아버지여 내 영혼을 내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라고 운명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죽음 직전에 무슨 말을 남기고 가는가가

그 사람의 인생을 표현해주는 것이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렇게 고백하고 죽었다고 하죠. “다 끝났어.”

그 엄청난 고난과 부귀를 누렸던 영국의 여왕도 그 허무함 속에, 허탈감 속에,

이제는 다 끝나버렸어.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결코 의미 있었던 인생만은 아니라는 한탄이 섞여있는 거예요.

여한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후회가 남아있고 아쉬움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33세의 짧은 인생을 사시며,

대개 삼십 세가 지나면 이제야 비로소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고민하는 그 때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무덤 앞에서, 우리의 나머지 마지막 유언을 누군가가 적는다면

우리는 어떤 유언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인가요?

여러분은 유언을 혹시 준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문학가 조지 버나드 쇼라는 사람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죠.

‘우물쭈물 하다가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던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람은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진정으로 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통해 죽기 위해 오셨고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라고 고백하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2014년 고난 주간’을 지나면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요 생명이지만

이 한 말씀이, 저의 마음을 일주일 내내 울리고 또 울렸습니다...

 

▲3. 구원사역을 다 이루심.

100%인성을 지니고 사신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자기 인생의 목적을 다 이루셨지만,

“다 이루었다”는 이 말씀에는, 더 깊고 오묘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속사역을

다 이루셨다는 뜻이요, 위대한 선언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한 말씀만 우리가 믿고, 올바로 주장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예수님의 한 말씀만 우리가 진정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능력으로 가득할 줄로 믿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예수님의 승리의 고백,

십자가 위에서, 죽음 직전에, 예수님이 남기신 이 다 이루었다. 라는 이 고백을

우리가 진정 믿는다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우리의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후회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로 <구원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대위임령> 즉 The Great Commission의 사명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사역>은.. 십자가에서 다 완수되었습니다.

거기에 내가 뭘 더 보탤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고, 그 후에 구원의 완성의 길이 남아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구약 4천년 전부터, 창3:15절부터 예언된

인류의 <구원사역>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과연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우리의 신앙을 결정하는 거예요.

 

신앙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공로로) 의롭게 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룸으로써 하나님께 은총 받는 것은, 다른 종교지

우리가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종교는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하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 위에서 내가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도 없고, 내가 이룰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죄를 벗어나게 하시고,

사단을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놓은 것 위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거예요.

 

조심스럽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든다면,

과거에 한국에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공기업에 들어가거나, 대기업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직장에서, 가만히 있어도, (연공서열로) 계속 승진하고, 계속 올라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직장이 그런 성격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번 입사만 하면, 잘 자르지도 않고, 본인도 그냥 평생직장으로 다닙니다.

 

그 기업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기업이 너무 실적이 좋고, 다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신입사원에게는 ‘다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자영업과 비교를 해 보세요.

대학을 졸업한 그가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고, 만약에 자영업을 시작했다면,

다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뭐든지 밑바닥부터, 자기 손으로 일일이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일일이, 자기 힘과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능력으로 애를 써도, 다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 구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믿음 생활의 모든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믿고 사는 것. 그것이 믿음 생활이에요.

어떤 분에게 무엇을 믿느냐고 그러면 ‘그냥 믿어요.’ 그래요.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뭘 믿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웃고 말아요.

 

믿음은 우리의 태도이기 전에, 우리의 열심이기 전에

무엇을 믿느냐.. 그 내용이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믿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 라는 이 말은

헬라어로 한 단어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테텔레스타이.”

 

이것은 수동태 완료형인데, 동사원형은 ‘텔레오’입니다.

그 뜻은 ‘끝나다. 성취하다. 완성되다.’ 이죠.

수동태 완료형으로 하면 ‘(완전히) 완성되어졌다. 다 이루어졌다.’가 되죠.

 

그런데 스펄전 목사님이 말하기를,

‘이 한 단어에 복음의 모든 내용이 다 담겨있고

이 한 단어에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담겨있는 단어이다.’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 한 단어를, 우리가 다 설명하고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다보다 더 깊은 광대한 의미가 담겨있는 이 한 단어.

이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되었던 단어라고 합니다.

특별히 네 가지 직업군의 사람들에게 많이 사용되었는데

 

①첫 번째로, 당시에 종들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라고 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어떤 일을, 임무를 맡깁니다.

그러면 그 종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주인이 뜻하는 대로

그 일을 다 완성한 이후에, 주인에게 가서 보고를 해야죠.

 

‘주인님, 제가 하라고 하신 일을 제가 다 했습니다.’ 라고 할 때

그 종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테텔레스타이. 주인님, 다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단어를 사용하신 의미는 뭘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이 땅에 종으로 오셨고,

종으로 오시되 우리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순종하심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고백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테텔레스타이.’

 

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대 제사장의 기도를 이렇게 드리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일을 다 이루어 finished

이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을 다 ‘이루다, 완성하다’

이게 동일한 단어에요.

 

요4장34절에도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finish

 

그렇게 사시다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마지막 이야기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는 드려진 마지막 보고의 고백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의 뜻을 쭉 이루어 오시다가,

마지막 십자가에서, 그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완성하셨다는 선언이었죠.

 

②두 번째로, 이 단어는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이 자주 사용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드리러 올 때,

제사장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 재물이 흠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재물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흠이 없을 때, 완벽할 때,

온전한 제물일 때 제사장은 말합니다. “온전하다. 흠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제물이다. 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의인이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의인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의인이셨습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온전한, 완전한, 죄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 예수님과 함께 가까이 지냈던 베드로가, 그가 뭐라고 고백했는지를 보십시오.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벧전1:19

 

예수님은 정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한 제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인류의 구속을 위한 영단번의 제사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왜 십자가가 능력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흘려진 그 피는 죄가 섞여있는 피가 아니라,

죄가 없으신 완전한 분의 피였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대속할 수 없기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 분의 완전하신 피가, 우리를 구속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 분은 ‘테텔레스타이 (다 완전히 이루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만일 죄가 있는 죄인이 십자가에 못 박혀 테텔레스타이 라고 말했다면

그 말은 효력이 없어요.

왜요? 죄인인 자가 마땅히 자기의 죄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요.

 

수많은 종교 제도와 수많은 그러한 희생으로도 씻을 수 없는 우리 죄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피로 완전히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그 분의 피.

그래서 그 분은 테텔레스타이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③세 번째로 이 단어는 예술가들이 많이 사용했던 단어라고 합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다 만들어 놓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한 발자국 뒤에 물러서서 그 작품을 보면서

‘만족한다. 이제는 완성 되었다. 이제는 끝이다.’ 라고 말할 때

그 단어를 고백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테텔레스타이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이 역사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역사를 움직이신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에 나타난 모든 예언들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들이 이루어졌어요.

창세기 3장 15장에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올 것이다.

그 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 분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 분 앞에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그를 예비할 것이다.

그 분이 왔을 때는 태어났을 때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올 것이다.

 

그 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입으로 절대 불평하거나 분노하거나 하지 않고

잠잠한 양같이 그 고난을 담당 하실 것이다.

뼈가 꺾이지 않은 채 죽임 당할 것이다. 부자의 묘실에 안치 될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예언이 다 성취되었다.. 그 말이에요.

 

구약의 모든 예언과 예표들이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되었다면

이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앞으로 주어질 신약의 모든 약속들,

다가올 예수님의 재림,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 그 모든 예언도

또한 모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재림의 때, 예수님은 또 다시 ‘테텔레스타이’라고 말씀하실 것이에요.

 

④네 번째로 이 단어를 썼던 사람들은 상인들이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상인들이 거래하면서 빚을 지지 않습니까.

빚을 지면 그 빚을 갚지 못하면, 그 집에 종으로 살아야 되요.

또 빚을 갚지 못하면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 빚을 갚아야죠.

 

그런데 그 상인이 자신의 돈을 마련해서 그 빚을 갚았을 때,

Paid in full (다 갚았음) 이란 영수증으로 써줄 때,

그 영수증에 적혔던 단어가 테텔레스타이. 다 지불 되었다.

영수증과 같은 그런 효과가 있는 단어가 바로 테텔레스타이.

다 지불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못 해서 빚을 많이 졌는데,

어떤 예수님 같은 구세주가 나타나서, 그 빚을 대신 다 갚아주었다면,

속이 시원해지지 않습니까? ‘다 갚았다’고 적혀있는 영수증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떠는 사람이 없어요.

그 영수증이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고 기쁨을 가져다주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지불되었다. 그러므로 평안하라.

이 완전한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에게 선언하시는 거예요.

영수증과 같이 우리에게 써주신 거예요.

 

예수님이 일부만 갚으시고, 우리가 나머지를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갚아주셨다. 테텔레스타이.

 

비슷하게 ‘구속’이라는 단어도 비즈니스에서 많이 사용 되요.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렸던 사람을 다시 찾아온다는 거예요.

우리는 죄를 짐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종으로 팔려있었어요.

사단의 종이 되어있었어요. 아담의 몸 안에 갇혀있었어요.

그 사단으로부터 우리를 다시 사기 위해서는, 대가가 지불 되야 해요.

 

그것은 죽음이라는 대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율법의 저주가 다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 모든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고

우리에게는 이렇게 선언하셨어요. 영수증을 써주셨어요.

“다 이루었다. 다 지불되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십자가를 가리켜, ‘십자가는 하나님의 피뢰침이다.’

그런 표현을 썼어요.

우리 교회에서 피뢰침이 아마 두 개가 있는데,

천둥 번개가 치면 그 번개를 흡수해주는 피뢰침이 있는 곳이 안전한 거예요.

 

여러분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의 낙뢰가, 진노의 우레가,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진노를 다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피뢰침으로 그 진노를 다 해소시켜주고

우리에게는 깨끗이 해결되었다. 테텔레스타이 라고 선언해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가 우리 역사에 우리 인생에 피뢰침이 됨을 믿고

십자가 아래로 피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번개, 진노의 우레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

하나님이 내려주신 해결책입니다.

 

▲마치는 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 못하신 일을, 남은 일을,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예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완전한 죄의 용서, 완전한 구속, 완전한 죄사함,

사단으로부터의 승리, 죽음으로부터의 승리,

이 승리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신 주님의 승리 위에서, 죄를 이겨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한 땅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땅을 정복하며 누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승리를 누리며, 그 위에서 그것을 체험해가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완전히 베풀어주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내가 지불해야만 믿는 습성이 있어요. 그 원리가 바로 보험이잖아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저축을 하면 나중에 마땅히 권리가 있는 거예요.

 

이 신앙생활을 보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만큼 해줄 것이다.’

 

우리가 행한 어떤 의로움, 어떤 공로, 어떤 행위도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를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는 받아가지시는 것이에요.

우리는 확신 속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승리 속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매일 매일 신앙생활 속에

“다 이루었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깊게 다시 한 번 재확인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확신이 흔들리고 죄악 가운데 쓰러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 죽음을 이기셨다. 사단을 이기셨다. 죄로부터 승리하셨다.

다 이루었다. 이것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는 다 이루셨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성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완전히 안정된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서론/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일곱 마디 말씀은, 한 말씀 한 말씀이

참으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①제일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비아 돌로로사 길을 걸어가시며

계속 끊임없이 단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하셨던 그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시제를 보면 단 한 번만 말씀하시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모욕하는 자들을 용서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중보의 기도였고, 또 용서를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원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②두 번째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바로 자신의 옆에 있던 한 강도의 구원을 선포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역시나 이 또한 자신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죽어가는 한 사람을 위한,

또 다른 사람을 위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③세 번째 말씀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내 어머니이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육신의 어머니를 맡겨드리는 그 예수님의 효성,

예수님의 사랑, 한 여인을 향한 마지막 그 돌봄과 사랑을 표현하시는

예수님의 이타적인 말씀이었습니다.

 

④예수님의 고통이 깊어갈 때 예수님은 네 번째 말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제 죽음의 고통에 임박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끊어지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당해야 할 그 진노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셨기에,

그 지옥의 고통과, 아울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끊어지는 고통,

그 고통을 담당하셔야만 우리의 죄를 된다고 하시는 것이기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그 고통을 겪지 않고는

십자가에 구원의 사역은 완성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절규의 고백이었습니다.

 

⑤다섯 번째는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어쩌면 네 번째 고백은 예수님의 영적인, 정신적인,

아버지 하나님과의 그 단절되는 고통에 대한 절규라면

이 다섯 번째 고통은 육신의 모든 고통을 한 마디로 표현한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은 목마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셨어요.

‘내가 목마르다.’

우리가 목이 축축해서 목마르다고 할 때와 동일한 표현이에요.

 

목만 마르셨겠습니까.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어떻게 목마름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에게 부어진 그 모든 육신의 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어쩌면 우리가 일상생활에 늘 물 한 잔 마시는 목마름으로

너무나 그 고통의 표현을 최소화 하신 것이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고통도 극대화 시키지 않습니까.

작은 고통도 큰 고통으로 확대화 시키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죽음의 고통을, 그 육체의 모든 고통을 단 한 마디로,

‘내가 목마르다.’ 얼마나 우리 예수님은 겸손하셨고,

자신의 모든 고통을 그렇게 축소시켜서 말씀하실 수 있는지요.

 

그 목마르다는 단 한 단어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육신의 고통을 표현하셨을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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