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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4

더 성숙으로 나아갑니다 / 정원

LNCK 2014. 5. 29. 14:31

◈더 성숙으로 나아갑니다                  히6:2                   출처

 

히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평화롭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느끼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인지,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비워지고 모자란 탈진한 상태인지..

그것을 느끼는 민감한 감각이 필요합니다.

 

스마트폰의 충전 잔량에 대해서 예민하게 생각하듯이..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도, 그런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깊은 충격이 되고,

아무 것도 아닌 상황에도 짜증이 나고..

그러한 현상은, 내가 영적으로 완전히 방전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그럴 때 ‘나는 왜 이럴까. 왜 이 모양일까.’

그렇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잘못된 열매를 맺고 망가지는 것은

내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것이구나..

내 속에 영적인 충만함이 거의 바닥난 것이구나..

이것을 깨닫고, 다시 주님께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을 바라보고

‘주여 오시옵소서. 내 심장에. 내 인격 가장 깊은 곳에 오시옵소서.’

 

이렇게 주님 앞에 앉아서, 오래 기다리면 주님께서 오십니다.

내 속의 상태를 인식하고 주님으로 가득 채우기를 바라며

오직 주님을 향해 갈급하고 굶주린 마음으로 나아가면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것이

아래에서 말하는 <가나안에 들어간 신앙>입니다. 약속의 땅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성패는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가까운가/ 먼가..

주님의 기름부음이 끊어졌는가/ 충분한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평화가 깨졌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이고

모든 재앙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재앙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영성(신앙)은 무한하게 계속 발전될 수 있습니다.

신앙이 발전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즉 애굽이나 광야에 거하는 사람일수록)

분노나 낙심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오고, 절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느끼고 근원을 이해할수록

멀리서 마귀가 진격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공격이 오기 전에 미리 방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첫째 단계는, 자기 마음이 문제인 것을 전혀 모르고 환경 탓, 남 탓만 하고

둘째 단계는, 자기 마음의 문제를 깨닫고 씨름하고..

셋째 단계는 평화를 경험하고, 자신이 누린 평화를 공급하게 됩니다. (가나안에 이른 상태입니다.)

 

점점 밖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분쟁과 재앙이 오기 전에 미리 느끼고, 사람의 상태를 느끼고

나라의 운명, 사람의 길과 방향을.. 예민하게 파악하는 영적 분별력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왜 마음에 풍랑이 일어나는가요?

 

그것은 주님과의 거리 때문에,

주님이 사시지 않고, 내가 주인되어 살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내 심장에 보좌가 있는데 거기에 내가 앉아있어서

내가 마음대로 움직이면

그것은 곧 마귀가 보좌에 앉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좌정하시면, 노력할 필요 없이, 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조금 전까지 그 심했던 풍랑이 잔잔해집니다.

가만히 있었는데도 마음에 기쁨이 오고, 사랑이 올라옵니다.

 

머리 아프고 마음에 화가 나고 불안하고 답답할 때

무조건 무릎 꿇으세요.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또 움직여서 사단이 역사했군요.

저는 보좌에서 내려갑니다. 내 마음 중심 보좌에, 당신이 오시옵소서.”

 

‘배에 예수께서 오르시매 풍랑이 잔잔해졌더라..’

여기서 새로운 미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의 생각 속에 세상의 가치관, 육적 가치관이 많아요.

많은 거짓 사상에 오염되어서, 자신의 영혼이 파괴되는 자체를 모릅니다.

 

돈이 있으면 편하다.. 돈이 크다..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하는 생각이 얼마나 마귀의 사상이며,

흑암의 권세에서 오는 잘못된 사상인지 모릅니다.

 

아는 것이 많아야 성공할 거야... 후원자가 있어야 잘 될 거야..

이런 모든 것은 다 생각을 좀 먹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지위나 돈이 아니고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심장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예수를 정말 좋아하는가,

아니면 자기의 영광을, 세상의 사랑을, 명예를,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가..

 

정결함을 사랑하는가, 더러움을 사랑하는가..

교활함, 이기적인 마음.. 그 중심 가슴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의 노력과 머리의 애씀으로는,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기 심장이 주님을, 세상보다 더 사랑함으로써 깨어날 때 가능합니다.

 

진정 주를 사랑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도, 성숙되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오직 순수하게 주님이 임하셔야 하고 주님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교회 안에 사람의 기운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막 높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너무 신앙이 훌륭해요.. 깊어요..”

이러한 높임을 허용하고 즐기면.. 자기 영혼이 파괴됩니다.

 

마귀는 너무나 교활해서 사람의 공명심, 열등감..

그런 것을 만족시키고, 허탈한 자기 영광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신앙, 영성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갈망하고 예수께 미치는 것을

특별한 신앙으로, 아주 깊은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 모든 존재가,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과 눈물을 견딜 수 없어서

하루 종일 그리움이 일어나는 것은.. 희한한 사람이 아니고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것이 원래 인간이 창조된 목적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주를 갈망하는 자들이 없는 가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마귀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따라합시다.

“예수를 중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행복하고,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너무 너무 행복하다.

목숨을, 모든 것을 잃어도 전혀 아깝지 않다.”

 

여러분. 그 상태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애)정이 발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전쟁입니다.

‘내가 정말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 세상 것을 버리는 것이, 여호수아의 가나안 31왕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내 평생 생각하고, 사로잡히고, 사모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것이 변화되고 깊어져 가는 것이.. 인생의 성장 과정입니다.

 

많은 이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지 않으시는 것에 목숨을 걸기 때문에

어둠의 영들에게 시달리며 사는 것입니다.

 

마귀가 얼마나 교활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낮은 욕망, 물질적인 낮은 것에 만족하게 하고

정신적인 낮은 영역의 것에 속해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우심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좋은지

기도가 얼마나 황홀한 것인지

왜 모르냐면 마귀가 주는

많은 거짓된 사상을 받아먹고 취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영적 위치와 단계들                         이 단락 출처

 

독자들로부터 교회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게 됩니다.

나 정원 목사는 목회를 하지 않는 것을 아니까, 목사님이 직접 하시지 않더라도

추천할 만한 교회가 없느냐고, 제게 질문들을 많이 하지요.

 

나는 목회를 하다가, 이것이 나의 길이 아닌 것을 느끼고 내려놓았습니다.

사람들과 만나고 같이 교제하고.. 그러한 것은 분명히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내게 주어진 진리에 대한, 영성에 대한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내가 계속 목회를 하고 있었다면

집회의 기쁨을 많이 경험할 수 있고 교제도 더 많이 누리겠지만

거기에 많은 힘을 빼앗겨야 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보람과 뿌듯함도 많이 느낄 수 없었겠지요.

역시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니까요..

 

교회에 대한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나는 뚜렷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를 추천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교회도 별로 없지요.

 

나는 여기서 간단하게, 교회의 영적 수준이나 상태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하여, 일반적인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상태와 같이, 교회도 각 교회마다 영적인 수준과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을

-애굽의 단계에 있는 교회,

-광야의 단계에 있는 교회,

-가나안의 단계에 있는 교회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하게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1. 애굽 수준의 교회.

이것은 영혼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보지 못하는 수준의 교회입니다.

여기에 속한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을 압도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상태가 신앙적/영적 발전단계의 초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치원 수준의 교회입니다.

대학교나 고등학교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치원도 필요합니다.

다만 ‘유치원’이 너무 많으면.. 좀 문제가 되겠지요.

 

-사회 운동을 많이 하는 교회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들은 사회의 이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유치원)  교회들은, 물질적인 복이나 형통에 대한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아직 애굽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보통의 교회들은, 이러한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본능에 속한 여러 욕망들,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고

가족 문제들에 사로잡혀 있으며

윤리 도덕 차원의 믿음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직 영혼의 깨어남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이 없는 상태의 교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고, 가끔 전도도 하지만

아직 영적인 깨우침이 없고

진리의 빛 가운데서의 자유함도 별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자기들보다 도덕적이나 삶에 있어서

별로 나아보이지 않는, 그러한 모습을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들은 <애굽>에 속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 속하는 교회들은

삶 속에서 많은 고통과 눌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훈련과 고난은 광야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아직 이들은 그러한 단계에 와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눌려 있으며, 악한 영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그들은 예수 이름의 능력과 보혈의 힘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 전쟁 중에 있다는 사실도, 개념적으로 이해할 뿐

그 실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의 눈이 현실과 환경과 육체에 고정되어 있어서

영혼의 세계를 보고 알지 못하고 있으며,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은 성도들이 이 단계에 있기 때문에

역시 이 단계에 속하는 교회들이 가장 많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이나 죄에서의 해방,

자기 못된 성질에서의 해방 등은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아주 급한 상황에서, 어쩌다 한번 응답을 받거나 하는 편이지요.

평범하게 주님과 같이 동행하고 삶을 나누고.. 그러한 것은 아직 요원한 일입니다.

그들은 아직 영적인 실재에 대하여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입니다.

 

▲2. 은사적인 교회도.. 아직 ‘가나안’은 아닙니다. ‘광야’입니다.

이 교회에서는 기적과 능력, 표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 교회에서는 더 특별하게 자신들의 교회가 가장 영적이고

수준이 높은 교회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교회를 떠나면 죽을 것 같이 말하는 교회도, 이러한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은사 체험도 하고, 환상도 보고,

예언은 아예 달고 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곳이 아주 특별한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 많은 곳이라고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곳은, 능력과 은사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들은 어느 정도 악한 영들에 대해서 알며

영적 전쟁에 대해서도 알고, 어느 정도의 풀림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은 더 많은 묶임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작은 전쟁에서는 승리하지만, 그 결과 더 큰 묶임을 가지게 됩니다.

 

이들은 아직 영혼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의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이들은 예언을 입에 달고 살기 때문에, 그 예언의 내용에 대하여 항상 묶여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평범하게 사는 이들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에 있는데,

이들은 그러한 것들을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경배와 찬양을 많이 드리고

기름부음집회라든지 능력 사역을 많이 하는 곳들이, 이러한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 영혼은 열리지 않았지만, 몸에는 여러 느낌과 감동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느 정도 기쁨과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의 승리의 영이 임하고 있기 때문에

물권이라든지, 질병의 치유라든지, 인간관계의 묶임에서 승리하게 된다든지..

하는 등의 작은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숙의 과정>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직 이 단계에서는 영혼의 자유를/ 즉 가나안의 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에서의 해방과, 의지의 자유를 맛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단계가 필요한 사람들이

    처음에 이러한 패턴의 교회나 예배를 경험하게 되면

    그들은 많은 충격과 도움을 얻게 되지만

    그들의 영혼이 어느 정도 자라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될 상황이 될 때

    그러한 외적인 강함이나 열정이 허무하고 피곤하게 느껴지고

    좀 더 내적인 것들을 구하게 되어

 이러한 패턴의 신앙에 대해서 많은 묶임과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3. ‘훈련’ 중심의 교회도.. 가나안에 이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까지는 도달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헌신도나 성품이나 은사적인 교회들보다는

조금 격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부드럽고 잔잔하며 주님을 알아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적인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적 실재를 모르기 때문에

눌려 있고 침체되고 답답합니다.

훈련 계통의 교회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들은 홍해를 통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래디컬한 중생 체험이 생략되었다는 뜻인듯

애굽에 거하는 사람을, 훈련시키는데.. 별로 결과가 없는 게 당연합니다.)

 

애굽의 단계는 유치하지만 기본적인 것입니다.

압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살아있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바로의 군사들을 다 홍해에 장사시킨 후에 광야의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단계를 생략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많은 묶임과 눌림과 고통이 있습니다.

 

광야에도, 한 때 전쟁에서 승리와 감격이 있습니다.

많은 결신자들을 얻고 의지적으로 주님을 믿고 말씀을 묵상하며

어느 정도 열매를 얻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후반기가 되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사는 것이 지옥일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단계로 가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광야 교회의 모습입니다.

 

물론 광야에도 한 두 가지의 과정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하나씩 영혼의 눈이 떠가기 까지, 물질 훈련, 사람 훈련, 위기 훈련,

죽음의 훈련, 낙담과 포기의 훈련 등이 수 없이 이어집니다.

 

 

은사도 있으면 좋고,

훈련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만족하지 말고, 반드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그 약속의 땅으로..

우리는 나아가는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4. 가나안에 들어간 교회는

이제 어느 정도 영혼이 눈을 뜨고, 주님이 모든 것 되심을 알게 되는 교회입니다.

사실 그 이전의 사람에게는, 주님이 우주의 중심되심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공상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영혼이 어느 정도 깨어나야 가능한 것이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서는 비로소 주님과의 연합이 삶의 목적이며

그리스도인의 길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연합에 힘을 씁니다.

 

가나안의 훈련은 단순합니다. 모든 전쟁, 삶의 문제들을 위해서

오직 주님과의 연합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대체로 주님의 임재 속에서 낮아짐과 굴복, 진리의 계시가 이루어집니다.

 

<가나안>에서는 어느 정도 영혼이 눈을 뜨기 시작하며

그것은 머리 중심의 개념적인 신앙과 은사 중심의 체험적인 신앙과

분명히 다른 어떤 실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서는 실제적인 주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그 분량만큼 죄에서의 해방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실제적으로 천국에 거하고, 거기와 교통하기 때문입니다.

 

대충 여기까지 이야기하게 되면

현실의 세계에서 '가나안 단계'에 이르는 교회는

이 땅에 거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 '애굽'이나 '광야'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삶에서 누림이 없고 천국의 영광에 대해서

주님의 영광의 실제에 대해서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싶은 것은

어느 교회가 옳고 어느 교회가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다 사명이 있으며,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유치원은 악한 것이며 대학만이 좋은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틀린 것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자기의 영적 발전단계에 맞는 교회에 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 성도들이 어느 정도 영이 자라게 되면 전에는, 이 교회가 참 좋았는데

지금은 만족이 되지 않는.. 그러한 현상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나는 자기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영적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대체로 은사가 나타나거나 표적이 임하는 교회들이, 그러한 생각에 많이 잡혀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은 그들이 아직 너무 어린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묶임입니다. 성도들을 묶으며 또한 자신들을 묶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의 마을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중심에 목회자가 살고

그 주위에 그 목회자와 영적 발전상태의 단계가 비슷한 성도들이 같이 모여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적 수준이나 단계가 비슷하면

그들은 서로 기쁨을 느끼며, 마치 가족이나 형제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영원한 곳에서도 같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영적 발전 상태와 성도들이 서로 맞지 않으면,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사역자보다 영이 너무 높거나 낮은 상태에 있으면, 서로 간에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보통 이러한 경우에, 서로 상처를 많이 주고 받고 떠나가게 되는 데

이것은 배반이나 마귀의 역사라기보다는, 성숙의 한 과정입니다.

 

즉 자녀가 장성하여 결혼을 하는 것이 부모를 배반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일 것입니다.

 

그럼 가나안의 교회는 어떤 교회야? 하하하.

신앙 성장상태가 깊어질수록, 교회와 사역자와 성도들은 모든 것보다도

오직 주님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우주와 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의 진리이며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있어도 유명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리 많이 모이지 않으며 아름다운 건물도 없을 수 있으며

목회자도 그리 잘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한 교회가 있으면 유명해질 리가 없으니

기독교 TV 앞에서 그러한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별로 가능성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교회에서 주님은 감추어진 분이시니까요.

 

그러한 교회는,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그리 매력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준비가 되고 영혼이 어느 정도 눈을 뜬 이들은,

주님 자신을 알고 싶어 하며, 그러한 메시지에 굶주려 있지만,

그러한 이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환경과 가족과

현실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며

진정한 영혼의 해방이 무엇인지 깨달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좀 더 성숙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나안의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상태에 있는 성도들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오직 교회 건물의 크기나 외적인 명성으로 교회와 사역을 평가합니다.

그들은 내면의 눈이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깊은 내적인 만족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주님은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가나안에 속하고

그 상태에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나는 그러한 상태의 교회들이 이 땅에 많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성도들이 진정 주님을 그리워하고 그분을 높이며 그의 임재를 추구하고 사모하는

교회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사역자들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교회는 사역자의 수준보다 더 깊어질 수가 없으니까요.

 

또한 그러한 사역자들을 돕는 성도들도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그러한 교회들이 세워지고 발전해질 테니까요.

 

가나안에 속한 교회는 자유로운 교회입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교회입니다.

거기서는 아무도 잘난 척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아무도 남들을 위협하거나 압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초월적인 평화와 기쁨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목사나 성도나 주님을 부르고 주님이 그리워서 울며

서로 보고 싶어하고

이 땅에서 유명해지고 출세하는 삶을 원하지 않으며

많은 묶임과 욕망에서 벗어나 그저 주님의 발을 씻겨드리고

주님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답고 포근하고 주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임재로 가득한 교회.

그러한 교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 까요.

그러면 저도 교회를 좀 추천해달라는 부탁에 시달리지도 않게 될테니 까요.

 

이 땅에 가나안에 속한 주님께 속한 그러한 교회가 많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다.

그것은 곧 천국의 임함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가나안에 들어간 성도는,

다른 어떤 세상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 예수님을 구합니다.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기도가 삶의 이유가 되고

기도하기 위해 밥 먹고 직장에 가고 돈을 벌고

주를 만나 교제하는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됩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 될 때

인생이 아주 단순해집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더 구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만큼은 꼭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제목들이 점점 사라져 갑니다.

 

제 정원 목사의 소원과 기도는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되는 것.

둘째는, 다른 이들이 예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소원 때문에 저는 살고 있어요.

 

정결한 사람, 향기로운 사람, 주의 사람 되고 싶고

더 더.. 더...엎드리고 기도하고 싶은... 그 소원.

그것은 천국에서 오는 것이예요.

 

세상적 성취를 목적으로, 많이 애쓰고 노력하게 하는 공포 신앙.

두려움으로 죄를 억압하려고 하는 것.

거기에는 승리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하는 모든 노력은, 실패할 것입니다.

그럴 때 ‘왜 나는 사랑이 없을까..’ 탄식하는 것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엎드리는 것 밖에 없어요.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쟁에 패하고 하루 종일 엎드렸습니다.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겼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자 그저 엎드려 있었어요.

주께서 ‘일어나라.’ 할 때 까지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랑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임하셔서, 그 분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은 내가 애쓰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내가 착하고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아요.

 

그러나 나는 끝났습니다.

아직 자기 의지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사랑을 일으키십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고

내 안에 계신 예수 이름이, 내 안에 계신 예수께서

나의 남편을, 아이를 사랑하시고, 부모님을 사랑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인데

나로서는 죽었다 깨도 사랑할 수 없는데

내 안의 예수께서 강권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면 순풍에 돛단 듯, 자연스럽게 사랑이 일어나고 평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면 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내가 왜 이 모양이지?” 하며 자책하는 이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주 앞에 엎드리세요.

우리는 기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 분을 갈망하게 되면, 그 분이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나면, 주님께서 이끄시고 사로잡아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부터 따라만 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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